2008. 7. 31. 10:19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죽어서도 멸시 받는 유럽의 불가촉 천민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온 집시의 삶
최근 한 장의 사진이 이탈리아를 부끄럽게 했다.
나폴리의 해변에 방치된 두 소녀의 시신과 그 옆에서 태연히 일광욕을 즐기는 이탈리아인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후 언론에 사진이 공개되면서 질타와 반성이 잇따랐다.
그런데 어째서 죽은 사람의 지척거리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비인도적 행위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죽은 소녀들이 ‘집시’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16)와 비올레타(14)는 해변에서 휴양객들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소녀들이었다.
두 소녀는 지난 19일 더위를 이겨보려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 들어갔다가 그만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인명구조원들이 달려왔지만 때는 늦었다.
구조원들은 두 소녀의 주검을 해변에 뉘어놓고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경찰서로 가버렸다.
그나마 휴양객 중 누군가가 안타까웠는지 시신에 해변용 수건을 덮어줬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없었다.
나머지 관광객들은 유유히 해수욕을 즐겼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탈리아인들이 몇 세대 동안 함께 살아온 집시에 대해 최소한의
인간적 예우조차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그들에게 집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단 이번 일만으로 이렇게 떠드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최근 늘어나는 거리 범죄의 단속을 명분으로 로마 등 3대 도시부터 집시들을
상대로 지문 채취에 나섰다.
더타임스는 ‘나치즘의 메아리’라는 표현으로 비판했다.
베로나 외곽에 거주하는 집시족 반다 콜롬보는 어린이까지 포함한 지문 채취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같은 것”이라며 강하게 저항했다.
그는 “나치가 유태인과 집시들을 학살할 때도 처음엔 이런 종류의 차별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종교계를 비롯해 양심있는 사람들의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해도 너무한다’는 지적이 일었다.
유럽의회는 지난 10일 결의문에서 집시 지문 채취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며 이탈리아 정부는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라들에서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반(反) 집시 정서’는 마찬가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루마니아 동부 툴체아에서 경찰이 집시 110명을 강제 퇴거시키면서
이들의 살림살이를 불태웠다고 전했다.
7년 넘게 이들이 살아온 터전을 하루 아침에 없앤 것이다.
체코의 브세틴에서는 집시들이 집단 거주하는 아파트에 경찰이 들이닥쳐 이들을 어디론가
태워가기도 했다.
지리 코넥 브세틴 시장은 이를 두고 “종기를 제거했다”고 말했고 시민들은 환호했다.
유럽 집시 권익 센터가 가디언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러한 행태는 동유럽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도 흔한 일이다.
최근 들어 강하게 나타났을 뿐 역사적으로 면면히 이어온 정서다. 집시는 항상 희생양이었다.
우리가 ‘집시’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도 유럽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저분한 부랑자, 구걸하는 떠돌이의 이미지.
이 같은 이미지는 역사를 기술하는 서양 중심부의 시각과 동일하다.
역사에서 집시는 항상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이방인이다.
집시(Gypsy)의 어원은 이집트인(Egyptian)이다.
오랜 기간 유럽에서 집시는 이집트에서 온 민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어 계통 연구 결과 그들은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 고향과는 무관한 이름으로 불려온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복자들이 인디언에게 ‘미개’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은 집시에게 ‘부랑’과 ‘죄악’의 이미지를 입혀 소탕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집시라는 이름 대신 스스로를 롬족(Roms, Roma)으로 부르고 있다.
떠돌이는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배세력의 생각이었다.
이는 곧 보편적인 상식으로 둔갑했다.
실상 부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은 집시들의 의지가 아니다.
6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의 박해를 피해 점차 동쪽으로 이주해오던 집시들은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아가게 된다.
이들은 정착하는 곳마다 지배세력의 희생양이 됐다.
실정에 따른 민심의 분노는 집시를 향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은
집시를 아랍인들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이슬람 세력을 피해 유럽에 온 집시를 이슬람 세력이라며 탄압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기간 집시가 ‘불가촉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집시가 머문 곳마다 차별받고 박해받지 않은 곳은 없다.
영국에서는 16세기 헨리 8세 때부터 집시를 탄압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530년 ‘이집트인 법(Egyptions Act)’은 집시의 영국 이주를 금지했다.
이후 단지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사형에 처해지는 사례도 자주 벌어졌다.
스페인에서는 1499년에서 1783년 사이 집시의 의복, 언어, 관습을 금지하는 법을 10차례 이상
제정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1539년 함선의 노를 젓는 노예로 집시를 썼다.
네덜란드는 1695년부터 공식적으로 추방 명령을 내려 이들을 제거하려 했다.
추방령에 따르지 않는 집시들은 횟수에 따라 태형, 낙인, 때로는 공개 사형에 처했다.
시사 주간 타임에 따르면 중세 루마니아에서는 집시를 사고 팔기도 했는데
그 가격이 돼지 1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18세기 프로이센에서는 집시들의 유랑 생활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했으며
18세 이상의 집시는 재판 없이 교수대에 오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야만이 최악으로 치달은 사례다.
흔히 유대인 학살로 알려져 있지만 집시도 같이 희생됐다.
당시 목숨을 잃은 집시들은 22만~50만명으로 추정된다.
유태인 600만명에 비하면 적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 숫자는 당시 유럽에 살던 전체 집시 인구의 3분의 2에 가깝다.
나치의 학살은 유럽인들의 집시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다.
집시들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떠돌지 않을 수 없었다.
편견이 적대감과 증오를 낳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유랑했고, 더러운 곳에서 살아야 했다.
정식 교육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일부 집시들이 관광객에게 공포의 대상인 소매치기로 전락한 것도
제대로 된 학교나 직장에 다닐 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 ‘선택’인지 모른다.
나폴리에서 숨진 크리스티나와 비올레타.
두 집시 소녀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주고 있다.
우리도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로 승화된 보헤미안의 恨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은 집시 여인이다.
그녀는 남자들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 파탈’의 전형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 역시 팜므 파탈 형의 집시 여인이다.
이 작품들은 당시 유럽인이 집시, 특히 집시 여성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보여준다.
서구의 역사는 집시를 ‘악의 근원’이라고 설명하면서 ‘다가가서는 안될 매혹’이라고 했다.
집시 여성에는 요부와 창녀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다.
생존을 위해 갖가지 천대받는 일을 하다보니, 이런 관념이 자리잡은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 ‘집시 여성=팜므 파탈’이라는 인식의 이면에는 유럽인들이 본능적으로 집시의 매력에 끌린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는 집시들이 보여준 춤과 음악의 재능에서 기인한다.
유랑과 탄압의 역사를 겪으면서 그들이 품은 분노와 절망은 예술로 승화됐다.
현실의 속박은 그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절실하게 만들었다.
집시 하면 연상되는 또다른 이미지인 ‘자유’는 실상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하는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는 15세기 프랑스에서 집시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시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이 집시들의 집단 거주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춤 ‘플라멩코’는 집시가 그 기원이다.
15세기 스페인 남부에 정착한 집시들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그리스, 인도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버무려 플라멩코를 만들어냈다.
융합된 문화의 원적은 이곳에 정착한 집시들의 이동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집시 음악의 특징은 즉흥성과 화려한 기교다.
현실의 고통에서 비롯된 자유에 대한 갈증,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집시 음악의 탄생 배경이다.
작곡가 리스트는 ‘헝가리안 랩소디’에서 집시들의 연주 스타일과 치고이너 단조를 사용했는데,
치고이너는 독일어권에서 집시를 부르는 말이다.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곡 ‘치고이네르바이젠’도 ‘집시의 노래’라는 의미다.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은 스페인 집시들 사이에 전해지는 각종 무곡을 소재로
다양한 기법을 구현하도록 만든 바이올린 독주곡이다.
여기에도 집시들의 자유분방함이 묻어있다.
제대로 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각기 거주하는 땅에서 차별받던 집시들에게는
음악과 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집시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뒤 공동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으며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표 단체를 구성했다.
체코 프라하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로마니 연합(IRU)이다.
IRU는 1986년부터 유니세프와 유네스코에 회원 자격으로 참여할 만큼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
헝가리의 집시 여성인 리비아 야로카는 2004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집시들은 일어서고 있다.
<정환보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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