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7. 19:12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죽음의땅 파괴된 역사
바깥세상에서 보면 이라크는 ‘죽음의 땅’이다.
더 이상 ‘알라딘의 요술램프’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가 담긴 ‘아라비안나이트’의
고향이 아니다.
신밧드가 모험을 시작하며 출항한 바스라 항구는 그저 피바람이 부는 전쟁터일 뿐이다.
지난 7월 한 달 동안 순수 민간인만 387명이 희생당했다.
국제 고고학계는 이라크 상황을 또 다른 차원에서 죽음의 땅으로 본다.
인류 문명의 시원을 알려줄 고대 유물이 거의 매일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 ‘유물 사냥꾼’들의 손에 넘어간다.
수많은 정보를 품고 있을 유적이 도굴로 파헤쳐진다.
수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고대 건축물들이 부서져나간다.
학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간직한 수많은 수수께끼들을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한번 훼손된 문화유산은 복구가 불가능하다.
우리의 숭례문(남대문)이 복원된다 한들 600여년이란 세월의 더께까지 복원해낼 수 없는 것처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라크는 “온 국토가 박물관”이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은 인류 4대 문명의 하나로 원류가 9000여년 전까지 올라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았다.
이후 5000여년 전 수메르부터 아시리아, 바빌론 문화 등을 키워낸 땅이다.
대영박물관의 존 커티스 연구원은 “인류 문명의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이라크의 문화유적은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 시카고대 고고학팀은 90년대 후반 이라크 전역을 조사한 뒤
무려 50만곳에서 유적이 발견됐다고 보고했다.
이 중 국제 고고학계가 인류 역사의 핵심 유적으로 꼽는 것만 1만2000여곳이다.
그러나 이라크 문화재 관리요원은 현재 1500명에 불과하다.
전세계 유물 사냥꾼들에겐 ‘꿈의 땅’인 셈이다.
이에 따라 상당수 유적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유물 사냥꾼들이 전국을 누비고 있다고
미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 등 외신들은 전한다.
설형문자를 만든 수메르의 도시국가 우르,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
아시리아 제국의 님루드는 물론 키시, 니네베, 모술 지역이 대표적으로 훼손된 유적들이다.
엘리자베스 스턴 미 스토니브룩대 교수는 “아예 유적지 밑으로 터널을 파 도굴할 정도”라며
“차이는 있지만 유적의 대부분이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CSM은 불도저, 포클레인까지 동원해 아주 조직적으로 도굴이 벌어진다고 전했다.
도굴꾼, 약탈자들은 다양하다.
고대 유물 하나를 훔쳐 일확천금을 노리는 좀도둑도 있고, 생계형 도굴범도 있다.
종파간 갈등과 분열에 따른 상대 종교유적 파괴도 잇따른다.
무장세력도 자금 마련을 위해 유물에 손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바논의 고고학자 조앤 파치아크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유적 파괴의 위험성은 커진다.
어쩌면 우리 손자들은 수메르 문명에 대해 배울 기회조차 없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유적을 파괴하는 것은 약탈꾼들만이 아니다.
미군은 우르에 군기지를 세워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군은 바빌론 유적을 훼손했다.
이라크의 고고학자 바하 마야 박사는 지난 5월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연합군이 군기지 등으로 사용함으로써 훼손된 우르, 자바람, 움마, 바빌론 등의 유적에 대해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유적 파괴를 수수방관하고, 지금도 모른 체하는 국제사회를 향한 절규다.
그러나 2003년 3월 미군 주도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 문화재 수난사에서 최악의 경우다.
개전 20여일 만에 미군이 바그다드를 장악한 4월10일.
이라크 고고학자들은 이날을 “이라크 문화의 사망일”로 표현한다.
바그다드를 장악한 미군은 전세계 학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립박물관 등을 혼란 속에 방치했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미군이 보호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미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 이틀 동안 국립박물관이 털리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전세계 학자 100여명이 사이언스지를 통해 미국에 “폭격뿐 아니라
무법천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약탈로 귀중한 유물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 경고가
현실화한 것이다.
맥과이어 깁슨 시카고대 교수(메소포타미아 고고학)는
“눈앞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격변으로 유물·유적이 훼손된다면 이는 이라크만이 아닌
전세계의 비극이라고 전쟁 전 경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틀 동안 사라진 유물만 1만5000여점에 이른다.
“국립박물관의 120여개 전시실과 연구실의 방문이 모두 부서졌다. 수장고까지 털렸다.”
도니 조지 바그다드박물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대영박물관의 존 커티스 연구원은 “사담 후세인 제거의 대가가 비쌀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지적했다.
자와드 바샤라 당시 문화부 대변인은 “미군은 이라크의 문화와 예술품, 문화재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원유와 무기를 우선으로 여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약탈당한 유물들은 지금까지 이라크 정부와 전세계 학자들의 호소로
1만여점이 이라크로 돌아왔다.
지난달 24일 이탈리아가 13점을 반환했고, 시리아는 701점을 이라크로 돌려줬다.
이라크 정부는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독일 등을 상대로 반환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5000여점의 유물이 고향을 잃고 떠도는 셈이다.
미군 당국은 지난 5월 도굴과 유물 밀반출 등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 요르단에 ‘문화재 보호 전문 병력 양성’을 위한 캠프를 차렸다.
전쟁은 주민들의 죽음만으로 부족한 듯 인류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재앙을
낳고 있다.
시카고대 동방연구소는 이라크의 문화유적 약탈과 파괴의 심각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참사, 이라크 과거의 약탈과 파괴’라는 특별 전시회를 12월까지 열고 있다.
맥과이어 깁슨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는 동안
엄청난 유물 도난과 유적 파괴 등이 일어나고 있다”며
“우리는 인류 역사와 문화에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물 사냥꾼들이 도굴·약탈한 예술 작품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라크 국립박물관에서 도난당한 1만5000여점 중 아직까지 회수되지 않은 것만 5000여점이다.
이 유물들은 주로 인접국인 요르단이나 시리아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나라 중개상에게 팔린 유물은 여러 중개상을 거쳐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제 암시장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미 요르단·시리아는 물론 미국 뉴욕, 이탈리아 제노바 등에서 수십~수백여점의 약탈 유물이
압수되기도 했다.
맥과이어 깁슨 시카고대 교수는 “일부는 각국 중개상, 일부는 수집가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유물의 최종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들이라고 말한다.
지난 4월30일 미 뉴왁공항 관세담당 직원들은 런던에서 온 상자 4개를 압수했는데,
상자 속에선 박물관 도난품 669점이 나왔다. 수취인은 뉴욕의 고미술품 중개인.
문화재 전문가인 도니 조지 박사는 영국 BBC방송에
“비양심적인 문화재 수집가가 진짜 주범들”이라며 “유럽,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앉아
특정 유물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부 유물은 특정 웹사이트나 온·오프라인 경매업체 등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라크의 고고학자인 바하 마야 박사는 “지난해 12월 e베이의 스위스 웹사이트에 몇 분 동안
4000년 전 수메르 점토판이 경매 대상으로 올라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 등 각국 정부가 약탈 유물의 불법 거래를 철저히 단속해야 하는데도 무책임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인터폴이나 각국 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물 약탈·거래는 막대한 이익이 남는 ‘비즈니스’인 만큼
끊이지 않는다.
바그다드 암시장의 사이드 마흐무드는 레바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바그다드에서는 고대 동전,
인장, 금·은·동 조각품이 단돈 10달러에 팔린다”며
“그러나 외국에서는 수백 배까지 올라 거래된다”고 말했다.
그는 “고대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원통형 인장은 이라크 내에서 100달러 안팎이면 살 수 있지만
유럽에서는 2000달러를 넘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학계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귀중한 유물이 더 이상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유명한 도난 유물은 거래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공개 전시도 할 수 없다.
인터폴과 유네스코가 이라크 약탈 유물을 별도의 수배 리스트로 작성했기 때문에
이들 유물의 공개적 유통은 불가능하다.
자이나브 바라니 컬럼비아대 교수는 “귀중한 유물일수록 공공장소에서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들 유물은 개인 수집가 혼자만 몰래 감상할 뿐이다.
비양심적인 개인 수집가의 호사 취미 탓에 우리는 인류 역사의 한 자락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도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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