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28. 10:06ㆍ책 · 펌글 · 자료/역사
‘환희의 올림픽’ 그 허구와 진실
올림픽과 정치, 그리고 국가주의
이번 올림픽은 중국이 구 소련의 붕괴 이후 유일하게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슈퍼파워의 자리에 스스로(?) 오르는 대관식이었다. 그 유구한 역사 중 세계 최강이었다가 재수 없게도 딱 지난 100년 몰락했던 중화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중화올림픽이었다.
한 역사학자는 이론적으로 볼 때 중화사상이 대동아공영론보다 그 질이 더 안 좋다고 한다. 근대 개념인 대동아공영론은 표면적으로라도 ‘함께 번영’을 내세우는, 즉 중화사상보다는 상대적으로 순진한 편이다. 그러나 중화사상은 장구한 세월 동안 타 민족 지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본적으로 공격적이고도 지배적인 민족주의이다.
중국이 7년 전 이번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면서 내세웠던 논리 중 하나가 바로 올림픽 개최가 중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정반대로 갔다. 티베트에 대한 무력진압이나 베이징 시내 150만 빈곤층 강제 퇴거, 외국인 시위자 구금, 외국인 기자 연행, 심지어는 관광객 감시 논란까지 등장하는 상황에서 보듯 중국은 정확하게 반대로 갔다. 이번 올림픽은 중국 내 티베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독점권’을 허용하는 면죄부가 돼버렸다. 올림픽 때도 끄떡없었으니 앞으론 더 ‘세게’ 나갈 것이다. 촛불정국 이후 우리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이번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이 혐한 정서를 확실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무조건 한국팀의 상대팀만 응원한 것도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의 야구경기에서 중국 관중이 일본을 응원한 것은 충격적이다. 만주전쟁과 난징대학살이라는, 근대인류사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을 자신에게 저지른 일본보다 한국인이 더 미운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이를 ‘혐한’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집단적 차원에서 이건 증오의 수준이다. 혹시 일본에 대한 과거사 문제에서라도 중국이 우리와 한편이라 착각하시는 분들, 이제 중국을 다시 보시라.
사실 올림픽에서 오랜 기간 문제가 되어왔던 이스라엘이나 아프리카 문제는 대강 정리(?)가 된 상태다. 과거 미·소간 냉전으로 인한 문제도 없다. 그러나 양극체제는 곧 다극체제로 대체됐다. 올림픽 개막과 함께 시작된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보듯 러시아 내 문제, 러시아와 이웃한 동유럽과 중동 문제, 그리고 중국의 티베트 등 소수민족 문제는 언제든 올림픽을 뒤흔들 수 있다. 거기에 자원과 식량은 언제나 무기화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9·11 이후 테러의 위협은 올림픽의 가장 위협적 요소가 되고 있다. 2004년 그리스는 아테네올림픽의 안전과 보안 비용으로만 1조3000억원을 쏟아 부어야 했다.
이렇듯 올림픽은 민족간 갈등을 손쉽게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이를 즐기는 정치인들도 있다. 위정자들은 스포츠를 좋아한다. 특히 독재자나 제3세계 권위주의정권이 스포츠를, 엄밀히 말해 스포츠 이벤트를 좋아한다. 히틀러, 무솔리니에서부터 자이르의 모부투, 필리핀의 마르코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그리고 우리의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올림픽 같은 메가이벤트가 좀 버거우면 무하마드 알리의 타이틀매치 같은 세계적 경기를 스폰서하기도 했다.
이들은 수만의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에서 손을 흔들며 등장하길 즐겼다. 대표팀이 승리하면 자신의 업적이었다. 국제행사를 열면 그는 ‘국제적 지도자’로 각인된다. 대중이 아무리 우매할지라도 폭력만으론 ‘위대한 지도자’의 범주에 들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에 스포츠 같은 문화행사를 국가적 이데올로기 장치로 삼아 상징조작을 통해 상징정책을 펴는 것이다.
상업화·신자유주의·경제효과의 허구와 국민기만
이렇게 올림픽은 이념대결의 장이 됐지만 이러한 국가간, 민족간 대결을 오히려 흥행요소로 삼으며 괴물이 돼갔다. 그런데 84년 LA올림픽부터 여기에 새로운 엔진이 하나 더 장착된다. 바로 상업주의다. 그 연유는 이렇다. 76년 올림픽 개최지 몬트리올은 재정확보 문제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몬트리올 시장은 “남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 한 올림픽으로 인한 재정적자는 없다”고 장담까지 했지만 역시 폐막 후 도시재정이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이를 본 세계 다른 어느 도시도 84년 올림픽 유치신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4월 베이징올림픽 성화의 국내 봉송이 시작된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중국의 티베트 시위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을 향해 한 중국 유학생이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휘두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개최지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난 IOC에 접근한 것이 바로 LA였고 LA는 올림픽의 로고를 기업에 팔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조건으로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올림픽은 다국적 거대자본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게 되면서 ‘돈다발이 떠다니는 평화의 제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포화상태에 이른 미국시장에서 국경을 넘어 해외로 진출하려는 다국적기업들에 올림픽은 최고의 마케팅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출발점은 바로 올림픽인 것이다.
이후 IOC는 거부가 됐다. FIFA와 함께 최후의 독점기업이라 일컬어지는 IOC는 아무런 노동도, 투자도 하지 않는다. 힘든 일은 개최지가 다 알아서 하고 IOC는 밥상이 차려진 후에 나타나면 된다. 4년마다 보장되는 수조원에 달하는 스폰서십과 중계권료만 챙기면 된다. 아, 열심히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올림픽 개최를 원하는 세계 각지의 도시들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국제교류와 경쟁의 단위가 국가에서 도시로 전환되고, 대도시들이 제조업 기반 생산도시에서 탈근대적 소비도시로 탈바꿈하며, 그리고 안정적 관리주의에서 흥행성 강한 기업주의로 도시행정의 목표가 수정되면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또 파리가 유럽의 문화중심도시를 기치로 2012년 올림픽 유치를 선언하자 그 꼴을 못 보는 런던이 뒤늦게 유치에 나서 극적인 막판 역전승을 거둔 것처럼 이제 올림픽은 초거대도시들의 자존심 대결의 장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시의 전환과정은 재정문제, 환경문제 그리고 시민들의 반대 등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올림픽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의 유치는 이러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게 해준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개발에 대한 향수와 지지가 절대적이고 스포츠 성적을 국력으로 여기는 스포츠 민족주의가 폭발적인 곳에서 개발과 스포츠는 환상의 조합이 되고 따라서 어느 정치인이나 지자체장이라도 이를 흠모하게 된다. 이들이 내세우는 선전문구도 당연히 ‘경제효과’가 된다.
그렇다면 경제효과는 주민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사실상 도심부를 들어내는 (재)개발 프로젝트인 올림픽은 과연 얼마나 ‘주민친화적’일까. 녹색평론의 김종철 주간은 “역사상 개발을 통해 원주민이 혜택을 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당장 뉴타운이 그렇지 않은가.
국내외 할 것 없이 올림픽 유치에 나서는 도시들의 문제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민을, 지역주민을 기만한다는 점이다. LA올림픽을 제외하면 모든 올림픽이 개최도시에 엄청난 재정부담을 떠안겼다. 흔히 말하는 ‘경제효과’의 액수는 대부분 경기장 등의 건설비로 채워지는데 이것이 사실은 시민들의 세금이라는 점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출’이 ‘수입’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여실히 증명됐듯 올림픽은 특히 빈곤층을 초토화시킨다. 베이징은 150만명을 강제 퇴거시켜 사실상 ‘계급청소’의 오명을 안았을 뿐 아니라 주택환경운동가는 구금하고 고문하기까지 했다. 애틀랜타는 96년 올림픽을 흑인들의 밀집거주지역인 다운타운을 재개발하는 기회로 삼았는데 결국 원주민들은 시 외곽으로 밀려나 미국에서도 ‘인종청소’ 논란이 있었다. 올림픽은 그래서 ‘토지강탈면허증’이라 불리는 것이다. 특히 큰 문제는 폐막 후에 뒷감당을 모두 지역주민들이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98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던 일본의 나가노는 아시아 최대의 겨울리조트로 ‘준비된 개최지’란 평을 들었음에도 폐막과 함께 지역경제가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필자가 일본에서 만난 미디어마케팅 전공 교수와 세계적 광고회사 덴쓰에서 스포츠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가노가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것이 지역주민들에게 잘된 일이었는가?”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No!” 한 학자는 나가노 주민들이 “추운 겨울 밖에서 비 맞는 꼴”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이벤트 하나가 국가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사례다. 카라만리스 총리는 개최 이듬해 ‘절망적’이라 실토하며 “실제 적자규모는 아직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정부예산의 부채율이 너무 높아 EU로부터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부산의 경우는 그 놈의 ‘세계적인 도시’ 타령 덕에 2002년 아시안게임과 2005년 APEC을 연달아 치렀다. 그 결과는 변함없이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부산 경제, 그리고 빚내서 사업하느라 차곡차곡 쌓인 지방채 적자 2조원에 그 이자만 연 1000억원이다. 그래서 부산시민의 삶의 질은? 다른 건 몰라도 공공요금만큼은 전국 최고 수준이다. 웬만한 공장도 하나 유치하지 못하면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그 발상에 고개가 절로 꺾인다.
88올림픽은 우리에게 환희와 자부심을 선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88올림픽이 도시빈민운동의 출발이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 올림픽유치에 도전하는 도시들의 자료를 보면 88올림픽과 관련해 어디에나 동일하게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빈곤계층 72만명을 대책도 없이 서울시 밖으로 내쫓았다고 말이다. 올림픽의 환희 너머엔 하늘의 별처럼 많은 아픔과 바다처럼 거대한 욕심도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희준 교수·동아대 스포츠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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