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都 베이징의 파괴와 文革의 광기

2008. 7. 24. 14:21책 · 펌글 · 자료/역사

 

  

1948년 겨울,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베이핑(베이징)에서 포위했다.

80만 명 대 30만 명의 결전이 초읽기 단계에 들어갔다.

1000년 역사를 가진 고성(古城)은 전화(戰火)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인가.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 것인가.

이성을 갖고 고성을 보호할 것을 절절히 호소하고,

베이징성이 지켜지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칭화대학 건축학부의 량쓰청 학부장과 뤄저원 교수 등은

공산당군에게 '국가(보)급 중요 건축 문물목록'을 제출했다.

그 속에서 베이징성은, 목록의 제1페이지 첫 번째에 올라 있었다.

 

1949년 1월, 베이핑의 국민강군 푸쭤이 장군은 베이핑의 문화계 명사를 모아

 베이징성 보호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화가 쉬베이롱은

 "베이핑에는 많은 위대한 고대건축물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궁(故宮), 천단(天壇), 이화원 등…….

푸쭤이 장군, 고도의 운명을 첫 번째로 고려하여 민의에 따라 베이핑이 포화에 무너지지 않도록

해줄 것을 바랍니다"

라고 요구했다.

 

역사학자 양런피엔은

 "강준, 베이핑을 전화로부터 지켜 준다면,

나는 역사학자로서 역사를 쓸 때 장군의 의거를 반드시 크게 쓸 것입니다."

라고 호소했다.

 

양심과 지혜가 승리했다.

1949년 1월 31일, 푸쭤이 장군이 무력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에

공산당군은 평화적으로 베이핑에 들어왔다.

 

베이징은 22년간 상실했던 수도로서의 전통과 영광을 완벽하게 회복했다.

그와 동시에, 요 왕조의 남경, 금 왕조의 중도, 원 왕조의 대도, 명 · 청 왕조의 베이징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 베이징에서 사상 다섯 번재의 대규모 수축이 시작됐다.

 

 

 

  

 

 

 

건국 후 베이징은 1950년대와 1980년대 중반, 두 차례에 걸쳐 꽤 상세한 도시계획을 세웠다.

1953년에 '베이징 도시계획 초안' 이 만들어졌다.

이는, 1957년에 '초보 방안'으로 베이징시당위원회에 의해 의결되어,

이듬해 9월에 당 중앙의 승인을 얻었다.

이 '베이징 도시계획안'의 모두에는 베이징 도시계획의 기본 방침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도시는 공업화를 위한 것,

그리고 당 중앙과 국가기관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과적으로 모든 노동 인민을 위한 것이 되기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옛 성을 개조하는 것을 위주로 한 신베이징 건설법안이 결정되었다.

모든 역사 문물, 고대 건축물들은 이제 신베이징 건설의 장애물이 됐다.

고도의 골격인 베이징성의 성벽이 우선 공격 대상으로 잡혔다.

이 성벽은 신베이징 건설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봉건 문화의 상징이었다.

 

  

전문(前門)은 원래 베이징성 내성의 대문 격인 정양문 앞의 전문이었고,

이 전문과 정양문 사이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거대한 성이 있었다.

베이징성 내성에는 모두 9개의 성문이 있었고,

각각의 성문은 정양문과 같은 형태와 규모로 치솟아 있었다.

또 내성 밖에는 외성이, 내성 안으로는 황성(皇城)이 겹겹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한가운데에 지금의 천안문을 대문으로 하는 궁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다중 구조의 성벽에는 성문, 전문(전루), 각루 등이 도합 47개나 있었다.

이러한 베이징성의 거대한 전모를 실제로 본 사람은 그 누구라도 전율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어느 방향에서든 성 밖에서부터 성문에 접근하고자 하면,

거기엔 전루와 성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채가 지면에서 튀어나온듯 우뚝 솟아 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압도될 정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성문 앞을 지날 때에는 자연히 걷는 속도를 늦추게 된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이화원이나 와불사등과는 달리,

오래된 중국의 일상생활이 배어 있는 박진감 넘치는 이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는 스웨덴 사람 오스왈드 사이렌(Oswald Siren)의 저서 《베이징의 성벽과 성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1924년의 저서는, 현재 볼 수 있는 베이징성에 대한 유일한 상세한 기록이다.

 

  

 

  

 

 

 

1950년, 베이징성의 운명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新베이징의 건설자들은 이내 두 파로 나뉘었고, 대학생, 간부, 일반 시민들까지 논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논쟁이 베이징성 '해체파'의 주장 일변도로 흐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이징성 '보호파'인 량쓰청의 비통한 외침은 고독했다.

 

'성벽 보호파'는 무력했다.

하다못해 해체하기 전에 사진촬영이라도 하고 설계도를 만들 자료를 남기기 위해 나름대로 분주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성문은 차례차례 헐렸고, 끝내는 숭문문, 서직문도 무너졌다.

량쓰청은 자신의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두 문은 천안문 앞에 있던 정양문과 같이 전문과 정문이 있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 성문이었다.

게다가, 이 형태의 성문들 가운데 아직 무너지지 않은 최후의 두 곳이었다.

아직 구해 낼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각 부문 지도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지도자들에게 자기 의견을 들려주고, 겨우겨우 공사 보류 동의를 얻어 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숭문문은 벌써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무너져 버린 뒤였다.

그나마 서직문은 형태를 남길 수 있었지만, 그 운명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불과 10년 뒤, 서직문은 문화대혁명 와중에 사라져 버리게 된다.

 

성벽의 해체가 결정된 첫 10년 동안은 진정한 위기가 찾아 오지 않았다.

베이징성은 너무나도 거대했기 때문에

성문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데에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본격적인 대규모의 성벽 해체 작업은 사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진행된 것이었다.

1967년 서직문이 결국 해체됐고, 이어 안정문, 조양문, 영정문 등이 사라져 갔다.

1969년 부터는 "방공호를 파라"는 마오쩌둥의 대호령 아래 성벽 허물기가 시작됐다.

무수한 간부, 노동자,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성벽의 벽돌을 들어내고,

각자 직장의 '방공호'를 만들기 위해 들고갔다.

 

량쓰청은 당초 성벽의 해체에는 83년의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무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 버렸다.

그는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이 가진 위력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열차 따위를  쓰지 않고서도 성벽해체에 83년이나 되는 시간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인해전술로, 저마다 가래를 하나씩 들고 나와 불과 5~6년 만에 성벽을 모두 무너뜨렸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사방에 굳건히 서 있던 웅대한 베이징성을 순식간에 철저히 무너뜨려 버린 것이다.

 

 

 

  

 

 

 

베이징城엔 본디 47개의 성문, 전루 및 각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양문과 덕승문의 전루, 그리고 동남각루 등 고작 세 개가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일찍이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던 둘레 23킬로미터의 내성, 내성 남쪽 둘레 14킬로미터의 외성,

그리고 둘레 9킬로미터의 황성 등 명대의 성벽은 거의 다 사라졌다.

지금은 두 군데 수백 미터가량의 성벽 잔해가 남아 있을뿐이다.

성벽이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제2순환도로와 입체교차로, 그리고 전국에서 처음 건설한

지하철 등이다.

이것이 신중국이 자랑하는 건설이다.  

 

량쓰청은 이렇게 말했다.

"패루의 역사적 가치, 그리고 도시 경관상의 가치는 파리의 개선문에도 결코 모자라지 않는다.

예술적가치로 말하자면 오히려 훨씬 더 높다."

량쓰청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는 최후의 희망을 걸고, 직접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의견을 올려 패루의 보존을 호소했다.

저우언라이의 대답은 무정했다.

량쓰청이 편지에 적은 "저녁 해 아래 징더가 패루의 절묘하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대목에 대해

"저녁 해는 한없이 좋으나, 황혼때에만 그러할 뿐(그러므로 금세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한시가

돌아왔다.

 

 한편, 정부는 1980년대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시안(西安)의 성벽을 수복했는데,

과거 베이징의 성벽에 비하면 조악하지 그지없는 포켓판 수준이었다.

 

  

베이징은 '보물의 땅'에 비유되곤 한다. 가는 곳마다 문물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회색의 낡은 집처럼 보이는 곳도, 의외로 과거에 호걸, 명사가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 낸

장소인 경우가 흔히 보인다.

예를 들면, 신제커우(新街區)에 있는 루쉰의 고택도 그러하다.

그 황폐한 모습을 보면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덩윈샹은 1988년에 처음 찾아갔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좁은 진흙길에는 오수가 흥건하고, 오수는 아직 얼어 있었다.

언 땅 위에 쓰레기, 연탄재, 달걀 껍질 따위가 널려 있었다.

길에 면해 있는 벽은 곳곳이 무너져 있어, 마치 오랜 옛날 성벽아래의 빈민가와 흡사했다.

사합원 내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거주자들 손에 의해 세워진 남루한 작은 집들이 어지러이 서 있고,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 루쉰의 고택은 1995년, 부동산 개발 때문에 시 정부에 의해 철거가 결정되었다.

이 지경까지 이르자 베이징의 문화인들도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그들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루쉰 고택의 철거 계획은 겨우 백지화되었다.

 

 

 

 

 

  

 

 

중국의 6대 고도, 즉 시안, 뤄양, 카이펑, 난징, 항저우 및 베이징, 그리고 세계의 10수도, 즉 파리,

런던, 로마, 모스크바, 워싱턴, 멕시코시티, 카이로, 도쿄, 바그다드, 베이징 등을 죽 훑어보면,

베이징만큼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도 없다.

 

베이징은 천하에 둘도 없는 고도이고, 장대한 스케일의 엄격한 도시계획에 입각하여 정비된 고도이다.

밖으로는 만리장성이 도시를 품듯이 수호하고 있으며,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진 베이징성은

그 성문과 성벽을 위풍당당하게 세워 사방에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궁성을 중심으로 세로축선, 즉 남북을 관통하는 중심축선의 양편에는 왕부, 관청, 제단, 사원,

주민 거주지 등이 좌우대칭으로 질서 있게 전개되어 잘 정돈된 공간 배치를 보여 준다.

또 이 배열 사이에는 무장과 문인들의 다채로운 정원들이 곳곳에 모습을 감추고 있어,

고도의 문화적 정서를 엿 볼 수 있다.

베이징성 안에 흩어져 있는 패루는 도시의 명소를 표시하고, 도시 경관에 고귀한 기풍을 더해 주었다.

 

수평의 시각에서 보면, 징산(景山)과 백탑, 성벽과 성문 등 높이 치솟은 건축물들이

베이징의 스카이라인을 그려내고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베이징성 전체를 죽 훑어보아도 어디 한 군데 시선이 막히는 곳이 없다.

서편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는 마치 한 편의 수묵화처럼 서산(西山)이 시야에 들어온다.

베이징성 안의 모든 명소는 이 서산을 배경으로 삼아자태를 드러내곤 한다.

 

장기판과 같은 도로망과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하천, 호수는 도시를 하나로 묶어 낸다.

스차하이(什刹海)의 3해, 베이하이, 중하이, 난하이 등 '내성 6해'라 불리는 6개의 호수 지역은

베이징성의 심장부였다.

북 · 중 · 남 3해는 황실의 어원으로 고귀하고 화려한 풍경을 자랑했다.

스차하이 일대는 거꾸로 자연스런 맛이 있는 서민들의 놀이터였다.

스차하이를 비롯하여, 텐차오, 룽푸스, 창뎬 등 서민들의 번화가는 각종 다채로운 민속 문화를 키우는

무대였다.

베이징성은 말하자면, 고궁을 필두로 하는 거대한 역사문화박물관과도 같았다.

 

미국의 저명한 도시계획학자 에드먼드 베이컨(Edmund N.Bacon)의 《도시계획》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구의 표면 위에 있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계는, 아마도 베이징성일 것이다.

이 중국 도시는 제왕의 주거지로 설계된 것이지만, 여기에는 우주의 중심이 표현되어 있다.

도시 전체에 예의 규범과 종교의식이 녹아들어 있다. ……

베이징의 평면 설계는 위대한 걸작이다.

오늘날의 도시계획에도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보고이다.

 

1982년 10월, 베이징에서는 원명원파괴 123주년 행사가 열렸다.

당시 서독 기자의 논평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외국의 침략자가 일으킨 전화로 원명원은 이렇게 폐허가 됐다.

그러나 베이징성의 오래된 성벽, 궁전, 사원, 공원 등 문명의 상징들이 파괴된 것은

중국인 자신의 책임이다. ……

현재의 베이징은 하나의 도시라기보다는,

그저 도로와 콘크리트 건푹물과 빈 땅이 어질러져 있는 곳처럼 보인다. ……

도로를 따라 몇 시간을 걸어도 2세기 전의 고건축물을 볼 수 없다.

주목할 만한 건축 스타일이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isbury)는 1985년, 두 번째 중국 방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년 전(1973년) 나는 미지의 고대 도시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 같은 것울 품고 처음 베이징을 방문했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베이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이징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지만, 폭풍처럼 몰아친 파괴 활동에 의해 그 본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오랜 기간 동안의 내전, 일본의 점령, 혁명전쟁, 그리고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테러 행위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너무 늦게 왔다. 무려 반세기나 늦은 것이다. 

중국인의 역사에 대한 태도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편에선 백성들과 영도자들이 자신들의 고대 문명을 무척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유서 깊은 사물을 놓고 역사 속에서 열심히 유래를 찾아낸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그러한 옛 영광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체적인 사물들을 도대체가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베이징의 문물에 대해 말하자면, 문화대혁명은 확실히 공전의 재난이었다.

1985년에 끝난 베이징시 제2차 문물조사에 의하면,

1958년에 제1차 문물조사 때에 결정된 6843개의 보존문물 가운데 4922개가 훼손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문화대혁명와중에 파괴된 것이었다.

파괴된 문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고대 건축물, 각종 조각상, 석각, 석비 등이었다.

모두 200여 곳에서 고대 건축물이 훼손되었고, 700여 개에 달하는 불상이 파괴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석비가 쓰러졌다.

 

무너져 버린 중요한 고건축 가운데에는, 백탑사의 산문과 종루 · 고루 등도 포함되어 있다.

공왕부의 80여 개의 옛 건물, 동서 창안가(長安街)에서 타오란팅 공원으로 옮겨놓았던 패루도 파괴

되었다.

중요한 불상이었던 백운사의 명대 불상 37점, 서산 바다추(八大處)의 명대 불상 222점,

베이하이(北海) 및 퇀청(團城)의 명 · 청 시대 불상 22점, 대종사의 청대 불상 24점, 담자사,

계태사의 80여 점의 불상과 법원사의 불상도 모두 파괴되었다.

거기에다 도솔사의 수만 권에 달하는 역대 불경도 불타버렸다.

 

베이징 교외 펑타이 다징촌 연수사의 천수천안보살 동상은 명대 초기의 유물이었다.

연화좌로 부터 노이 8미터에 이르는 높은 예술 수준을 과시하던 걸작 동불상이었지만,

이 시기에 파괴되어 버렸다.

금대 천회 연간(1123~1135)의 성안사는 고건축이 53채나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웅보전 속의 세 개의 명대 불상은 매우 귀한 것이었다.

200제곱미터에 달하는 대형종교화는 15세기 초 종교벽화의 대표작으로 예술적 가치가 지극히 높았다.

그렇지만 이들도 1966년 여름에 파괴되었다.

대웅전 또한 오래지 않아 '위험 전축'으로 취급되어 해체됐다.

 

중요한 고대 유적도 파괴될 운명에 처했다.

한 보고에 따르면, 원명원 둘레의 2290미터에 달하던 긴 벽이 파괴되었고,

3930제곡미터에 이르는 유적지가 파헤쳐졌다.

또, 토산 95군데가 평지로 변했고, 2만 4000그루의 나무가 벌채됐다.

원 대도의 토성 유적지에서는 1750미터 길이의 토성이 파괴되었으며,

주변 녹지 10여 헥타르가 사라지고 수만 그루의 나무가 뽑혀나갔다.

외국에서 보면 굉장한 보물이었을 장성의 벽돌은 댐, 군 막사, 화장실, 돼지우리 등을 짓는 데 쓰였다.

 

많은 학자, 문인, 문물 수집가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물마저도 파괴됐다.

특히 어처구니없었던 일은 1966년 8월 24일에 홍위병이 명 13릉의 정릉에 잠들어 있던 만력 황제와

두 황후의 유골을 꺼내 광장에 늘어놓고 비판투쟁대회를 연 사건이다.

홍위병들은 "지주계급의 우두머리, 만력제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돌로 뼈를 부수고 불로 태워버렸다.

문물 가치가 높은 목관도 함께 재가 됐다.

 

  

 -양둥핑 著『중국의 두 얼굴』중에서 발췌-

 

 

 

 

 

'책 · 펌글 · 자료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위병-下放-제3세대 지도자.  (0) 2008.07.31
Gypsy  (0) 2008.07.31
『엑소더스』(Exodus)  (0) 2008.07.18
홀로코스트  (0) 2008.07.18
샬롬과 쌀람  (0) 2008.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