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일여(寤寐一如)

2008. 7. 29. 10:40책 · 펌글 · 자료/종교

 

 

 

‘오매일여’ 논쟁 불교계 달군다

 

 

 


불교계에 성철 스님(1911~1993)이 깨달음의 근거로 제시한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해방 후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1981)’에서 깨달음의 점검 기준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화두 참구가 이뤄지는 상태),

몽중일여(夢中一如·꿈 속에서도 정신이 한결같음),

오매일여(깊은 잠에 들더라도 깨어있을 때처럼 수행의 자세를 유지하는 경지)

를 주장했다.

 

성철 스님은 “오매일여를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悟道)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오매일여는 깨달음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가운데 재야 불교연구가인 윤창화씨(도서출판 민족사 대표)가
월요불교포럼에서 ‘오매일여는 가능한가

- 오매일여의 진실과 오해’란 주제발표를 통해

“화두참구 상태가 오매일여가 돼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분별망상”이라며 “그렇게 오도된 데는 성철 스님의 견해가 역할을 했다”고 주장,

논쟁의 불을 붙였다.

윤씨는 “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이나 간화선(看話禪=화두선)을 주창한 대혜종고는
부질없이 오매일여에 대해 분별하지 말라고 했다”며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오매일여가 돼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윤씨는 또 “대혜가 깨달은 후에는 ‘오와 매를 분별하지 말라.

꿈과 현실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말라’고 강조한 것으로 ‘서장’에 기록돼 있다”며

 “이는 본질적으로 모두 부처인데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또는 꿈과 현실을 분별할 것이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화두참구의 상태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윤씨의 주장에 대해 성철선사상연구원 연학실장 원충 스님은 불교계 언론인 주간 ‘법보신문’에 반론을 싣고,

윤씨 역시 같은 신문에 재반론(7월18일)을 게재하면서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성철 스님의 상좌로 지난 3월 일본 고마자와대에서 선학(禪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원충 스님은

 “윤씨가 몽산어록 등 기본적인 자료해석부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매일여를 실천적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실제적) 의미로 규정한 것은 잘못”이라며

 “이들의 어구는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화두를 참구해서 얻은 견처(見處)를 ‘형이상(形而上)’으로 표현한 것으로

 조사스님들의 오매일여 견처관을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된다는 것은 불조의 수행관과 진리관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원충 스님은 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는 화두 참구하는 수좌들의 자기 점검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며

제대로 깨닫지 못한 수행자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일에 대한 경책”이라면서

 “성철 스님의 목적은 오매일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에 바로 들어가게 하려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윤씨는 원충 스님의 주장을 재반박하면서

“화두를 참구해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분은 오로지 성철 스님뿐”이라며

 “정작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은

  화두를 들어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분별심이요, 망상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매일여는 엄격히 말하면 성철선(禪)에서 수행·깨달음의 척도이지, 간화선의 기준점이나 척도는 아니다”라며

 “그러므로 성철선은 간화선에서 한참 빗나가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금강대 안성두 교수가 윤씨의 주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유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안 교수는 지난 25일자 법보신문을 통해

 “선이나 선어록에서의 모든 화두는 하나의 구체적 상황에서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일회적 사건”이라며

“화두의 생명은 매뉴얼 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성철선이 강조하는 오매일여는 제자들이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가도록 요구하는 것”이라며

“매우 교육적이고 따라서 일회적인 선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매일여 (寤寐一如) /

성철스님이 주장한 깊은 잠에 들더라도 깨어있을 때처럼 수행의 자세를 유지하는 경지를 말한다.

 

 

 

 

 

 

‘오매일여론 비판'에 대한 비판

1. 들어가는 글

선객: 조사서래의가 뭡니까?
성철: 오매일여가 되는가?
후학: ․․․․․․안 됩니다.
성철: 아직 멀었으니 돌아가라!
후학: @#$%^&!

 


위의 대화는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었던 성철 스님(이하 성철)과 그의 지도를 받으러 온 한 후학과의 대화를 필자가 꾸며 본 것이다.

보통 선사와 선객의 대화는 법거량(法擧量)이라고 부르는 선문답을 하고 나서 끝난다.

그런데 성철의 경우에는 선문답을 하기 전에 오매일여 여부를 가지고 상대를 재단해 버리니

한 수 겨뤄 보려고, 혹은 한 수 지도를 받으려고 찾아간 후학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학들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분통을 터뜨리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윤창화 선생(이하 윤창화)이 당시에 당한 후학들의 한(?)을 풀어 주려는 글을 발표했다.

윤창화는 《불교평론》 2008년 가을호에 실은 <성철 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이란 논문에서

성철이 주장하는 ‘자면서도 화두를 드는 오매일여’는 불가능하고,

오매일여의 의미는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철은 열반송에서 "평생 동안 사람들을 속였다."라고 했으니 오매일여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윤창화의 주장대로 "숙면 속에서도 깨어 있을 때와 다름없이 화두를 놓치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참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후학들뿐만 아니라 성철 자신도 오매일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철이야말로 자오오인(自誤誤人)의 대죄과(大罪過)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과연 대중에게 "자기를 속이지 마라."던 성철이야말로 자기를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내 말에 속지 마라!”고 하더니 오매일여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필자는 윤창화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창화가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의 해석을 보고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아전인수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등의 내용은

성철이 주장하는 오매일여의 근거로 충분히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윤창화의 ≪능엄경≫<상음변마>, ≪서장≫<답향시랑>, ≪현사사비어록≫ 해석은 대부분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어긋났을까?

윤창화가 어긋나게 된 이유는 그가 한 잘못된 분석 때문이다.

성철의 주장에 금테를 두르고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하는 교조주의적 태도도 문제지만

잘못된 주장으로 성철이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그러니 지금부터 윤창화의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자!



2. 성철의 오매일여론

오매일여에 대한 성철의 언급은 그의 저서인《선문정로》(해인총림, 1981년)에 많이 나온다.

윤창화는 성철의 오매일여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 언급들을 인용하고는

 “《선문정로》〈오매일여〉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오매일여란 ‘실제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낮(깨어 있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에 깊은 잠 속에서도 화두를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2007년 장경각에서 펴낸 《옛 거울을 부수고 오너라》를 보면

 《선문정로》의 내용에 대해 성철이 한 육성(肉聲) 법문을 ‘강설’이라는 이름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8. 오매일여>의 강설 부분들을 보면 성철이 주장한 오매일여의 뜻이 한층 명확해진다.

아무리 대단한 지견을 얻고 휘황한 경계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가 꿈속에 일여한지 깊은 잠이 들었을 때도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망상의 인연으로 나타난 경계이지 바른 깨달음이 아님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옛 조사스님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몽중일여 오매일여를 반드시 점검했다.

설사 오매일여의 깊은 경지에 들었다 해도 다시 공안을 들어 크게 깨치는 것이 우리 선문의 바른 공부이다.

그러니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부끄럼이 없이 공부를 해야지,

오매일여도 되지 않은 6식의 사량분별로 함부로 지견을 휘두르지 마라.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면 까마득히 먼 경지로 생각할 수 있다.

허나 고불고조와 다름없는 장부의 몸을 타고났으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장애일 뿐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태고 스님도 오매일여를 거쳐 대오하고 인가받았던 것이다.

철저히 깨쳤더라도 오매일여가 되는지 점검해야 하며,

또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정안종사를 찾아가 점검받는 것이 우리 종문의 철칙이다.

 

......천하 선지식들이 증명하였듯 오매일여를 거쳐 성취한 대각이 아니면 견성이 아님이 명백한데

그것을 어떻게 달콤한 거짓말로 가릴 수 있겠는가?

양심을 속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반드시 오매일여가 된 뒤에 크게 깨쳐야 한다.

위의 문장들에는 ‘화두’나 ‘화두참선’, ‘화두수행’ 등 화두와 관련된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옹집(懶翁集)’의 인용문에 대한 주해에서

?선문의 정안종사치고 이 오매일여의 현관을 투과하지 않고 견성이라고 한 바는 없으며,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니 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한 부분과

 <9. 사중득활>의 ‘대혜록(大慧錄)17’에 대한 강설에서

"완전한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다시 공안을 확철히 깨쳐야 병이 완전히 없어진 대조사라 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을 감안하면

윤창화가 한 성철의 오매일여에 대한 정의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필자가 정리한 성철의 오매일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매일여는 ‘깨어나 있을 때 얻은 경지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도 같은 것’이다.

둘째, 오매일여는 몽중일여와 구경각 사이에 있는 단계다. 즉 ‘몽중일여→오매일여→구경각’이다.

셋째, 오매일여는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단계다.

넷째, 오매일여에 도달한 뒤에는 반드시 화두참구를 통해 구경각을 얻어야 한다.

다섯째, 오매일여는 숙면일여다.(이는 아래의 주해 부분들의 비교에서 증명됨)

 

 

- 중략 -

 

 


3. 윤창화의 오매일여론

 

1) ≪서장≫<답향시랑>에 대한 분석

 

윤창화는 먼저 ≪서장≫<답향시랑>의 긴 내용을 소개하고는 오매일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간화선을 대성‧체계화시킨 대혜종고와 그의 스승 원오극근의 말에서도 오늘날 《선문정로》의 해석과 같이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분별 망상으로 파악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다.

≪서장≫<향시랑>에 대한 윤창화 주장의 핵심은 ‘오매일여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에 있다.

하지만 이 핵심은 물론이고 다른 주장들도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뒤에 필자가 소개하는 ‘4.《서장》<답향시랑>에 대한

필자의 분석’ 에서 일일이 보여 주겠다.

2)≪능엄경≫<상음변마>에 대한 분석

 

≪능엄경≫<상음변마>에 나오는 말은 오매일여가 아니라 오매항일(寤寐恒一)이다.

윤창화는 이 오매항일을 오매일여와 동의어로 보고 있는데 성철은 약간 다르게 보고 있다.

앞(2.성철의 오매일여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철은 오매항일을 몽중일여와 숙면일여로 나눈 다음 숙면일여를 오매일여로 보고 있다.

아무튼 윤창화의 논문에서 오매항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부분을 원문, 해석, 분석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원문: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地, 想陰盡者, 是人, 平常夢想消滅, 寤寐恒一, 覺明虛靜, 猶如 晴空...
해석: 아난아, 선남자가 삼마지(삼매)를 닦아서 (그 결과) 상음(想陰, 생각=분별/망상/번뇌) 이 다 없어지면

그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없어져서 깨어 있거나 잠자거나 항상 한결같게 된다(오매항일).

또 깨달음은 맑고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아서…….

 

분석: 《능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매항일’ ‘오매일여’란 생각이 다 없어지면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을 자도 꿈이 없다고 하여

잠을 잘 적에 꿈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낮에는 번뇌가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가 오매항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밤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낮 동안에 생각(번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 꿈이 없어야만 비로소 상음(생각)이 다 소멸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화두 참구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 즉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여 맑게 갠 하늘과 같은 상태를 오매항일, 오매일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계환(戒環)의 주해에도 “번뇌 망상은 낮에는 잡념(생각)으로 발전하고 밤에는 꿈으로 발전하여 본성품을 혼란케 하여

순일할 수 없고, 각명(覺明)을 요동시켜서 고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음이 다한 자는 몽상(夢想)이 소멸하고 오매항일해서 각명이 허정(虛靜)함이 마치 맑게 갠 하늘과 같다.”라고 하여

번뇌 망상이 제거되면 낮에는 생각이 없고 밤에는 꿈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화두를 참구하여 실제 오매일여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위의 문장들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원문의 몽상(夢想)에 대한 해석’이다.

윤창화는 몽상을 ‘꿈과 생각’으로 봤는데 몽상에 대한 계환의 주해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필자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윤창화나 계환뿐만이 아니고 제법 이름 있는 학승들도 몽상을 ‘꿈과 생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몽상을 이들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견해를 폐기처분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 점을 파악한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한 성철의 주해를 다시 살펴보니

 "오매항일(寤寐恒一)은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다 통한다."라며 슬쩍 넘어갔고 강설도 아예 없다.

만약 성철이 남의 말이나 읊조리는 창도사(唱道師)였다면 여기서 분명 허방다리를 짚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몽상을 건드리면 대혜를 쳐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모른 척하고 넘어감으로써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오매항일을 자신의 오매일여론을 지지하는 근거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기막히게 딜레마를 피해 간 성철이 얄밉기는 하지만

이는 문장의 자구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니 과연 정안종사의 노련한 안목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윤창화는 문장의 자구에 얽매여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는 바람에 몽상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고

 ‘꿈이 없는 상태’를 오매항일로 봄으로써 오매항일에 대한 해석마저 대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즉, 대혜가 보는 오매항일과 윤창화가 보는 오매항일은 이 지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뒤에서 ≪서장≫<답향시랑>에 나오는 대혜의 견해에 대한 분석과 연계해서 설명하겠다.


 

- 중략 -

 

 


 

6.나오는 글

앞에서 우리는 《서장》<답향시랑>, 《능엄경》<상음변마>, 《현사사비어록》등에 대한 윤창화의 분석과

그에 근거한 주장이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윤창화는 자신의 논문에서 성철의 오매일여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오매일여는 실제경지가 아니다.
②오매일여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③오매일여 하는 주재자가 있다면 무아에 어긋난다.
④오매일여는 문학적 표현일 뿐이다.
⑤오매일여라는 깨달음은 깨달음의 정의와 어긋난다.
⑥오매일여는 성철만의 주장이다.

하지만 위의 근거들 역시 모두 반론(반증)이 가능하다.

 

①에 대한 반증
*대혜는 실제로 오매항일을 경험하고 붓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원오, 몽산, 태고, 나옹 등도 오매일여(혹은 오매항일)에 도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②에 대한 반증
*깨어 있을 때만 화두를 들면 되고 잠잘 때는 화두를 들지 않아도 된다면 화두 참구는 두뇌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두뇌 활동이 없는 숙면 시에 화두를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깨달음도 결국 두뇌 활동 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철의 깨달음은 물론이고 붓다의 깨달음도 두되 활동의 소산일 뿐이다.
*깨달음이 두뇌활동의 소산이라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므로 유물론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다.
*하지만 붓다는 당시 아지타 케사캄발린(6사외도 중의 한 명)의 유물론을 부정했다.
*두뇌 활동으로 얻는 것은 모두 6식의 소산이므로 6식의 망념을 여의려면 두뇌가 활동 을 멈추는 숙면 시에 화두 참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③에 대한 반증
*무아를 체득하는 과정에 거쳐야 하는 단계가 오매일여이므로 무아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성철이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몰랐을 리가 없다.

 

④에 대한 반증
*개인의 자내증인 깨달음의 상태는 비유에 의할 수밖에 없으므로 오도송이나 열반송의 경우

‘金烏夜半徹天飛’나 ‘日月無光大地沈’처럼 소위 문학적인 표현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매일여는 깨달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므로

굳이 문학적인 수사를 동원해 그것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오매일여나 오매항일을 주장한 고금의 도인들치고 오매항일이나 오매일여가 문학적 표현이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⑤에 대한 반증
*‘번뇌망상을 제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는 윤창화의 주장은 옳다.
*그런데 오매일여를 통해야만 그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성철의 주장이다.
*‘오매일여 하는 그 상태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윤창화의 착각이다.
*따라서 ⑤는 성립하지 않는 명제이며 진리값은 당연히 거짓(F)이다.

 

⑥에 대한 반증
*성철뿐만이 아니라 원오, 대혜, 몽상, 태고, 나옹도 오매일여(오매항일)를 주장했다.
*경봉, 구산 등 동시대 선문(禪門)의 거장들이 성철의 오매일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성철이 “화두 참구 상태가 실제 오매일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은 상태”라고 했다는 것은 윤창화의 주장일 뿐이다.

 

성철은 "참선 오도에는 오매일여의 통과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만일 이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며 오도(悟道)가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쓴 논문의 앞부분에 해당 구절을 인용하고서도 오매일여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윤창화가 오매일여나 성철 혹은 양쪽 모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매일여는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절대적으로 참(T)이 되어야만 하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 가설이 참으로 증명되는 방향으로만 자료들을 분석하다 보니 허점이 생기고, 딜레마에도 빠지고, 허구적인 주장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성철은 오매일여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후학들에게 오매일여라는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과정, 예를 들어 염불이나 진언, 간경이나 기도 등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다면

오매일여 대신에 다른 방법을 제시했을 것이다.

 

오매일여는 깨달음을 위한 조건, 특히 화두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단계일 뿐이지 그 자체가 ‘깨달은 상태’는 아니다.

성철의 경우 오매일여를 거쳐서 깨달음을 얻었고 지도를 받고자 찾아오는 후학들도 화두참선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매일여가 상대방의 수준을 점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철이 한 실수라면 상대방에게 오매일여에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원오와 대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성철이 만약 자상하게 후학들을 이끌어 오매일여를 체득한 사람들이 소수라도 생겨났더라면

오늘날 이런 비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성철의 그런 점들이 더욱 그를 신뢰하게 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가 만약 사람들을 기만하는 엉터리 선사였다면

좋은 평판을 유지하려고 적당하게 선문답을 해 주고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발언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철은 남들의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매일여가 안 되었다’고 하면 사정없이 쫓아내 버렸다.

 

오매일여를 도교적 신비주의 정도로 폄하하고,

잠잘 것 다 자고 먹을 것 다 먹어 가며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머지않아 이 땅은 ‘도인만천하(道人滿天下)’의 상태가 될 것이다.

 

"화두에 대한 생각이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상태,

화두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오매일여이다."라고 본다면

꿈을 꿀 때나 잠을 잘 때도 화두가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국의 사찰에, 시민선방에 참선을 하는 선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지만

수십 년이 가도 도인이 나오기 어려운 것도 성철의 주장대로 오매일여가 되는 사람들이 드물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오매일여를 주장하는 성철을 비난하기 전에

붓다처럼 뛰어난 자질을 가졌던 분도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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