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깨지 말고, 새를 죽이지도 말고, 새를 꺼내 보라."

2007. 12. 29. 23:37책 · 펌글 · 자료/종교

 



불교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화두가 있다.

 

 

 

(*화두(話頭)

말보다 앞서가는 것이라는 뜻에서,
禪宗에서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고자 參禪하면서 연구하는 과제이다.

공안(公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가 어릴 때 병에 들어갔다.

새는 커지고 병은 상대적으로 작다.

병을 깨지 말고, 새를 죽이지도 말고, 새를 꺼내 보라."



화두의 원전은 다음과 같다. (<허문명 기자의 禪 이야기>에서 인용함.)


당나라의 유명한 남전선사(南泉禪師)의 지인 중에 육긍(陸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출가한 몸은 아니었지만 스님들과 담소하기를 좋아하는 선객으로 한때 어사대부까지 지낸 관리 출신 선비였다.
그래서 곧잘 남전의 처소를 찾곤 했는데, 남전 역시 그와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육긍이 남전에게 문제를 하나 냈다.
그들은 가끔 기괴한 문제로 선문답을 주고받던 사이였기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님, 문제를 하나 낼 테니 풀어보시겠습니까?"

"그러지요."

남전이 흥미로운 눈으로 육긍을 쳐다보았다.

"옛날에 어떤 농부가 병 속에 거위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위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병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스님이라면 병 속에 든 이 거위를 어떻게 꺼내시겠습니까?
단, 병을 깨거나 거위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육긍이 말을 마치자 남전은 대뜸 그를 불렀다.

"대부!"

어사대부를 지낸 육긍을 남전은 항상 그렇게 불렀기에 육긍은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남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나왔소."

 

 


이 수수께끼와 같은 화두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새가 원래 병에 들어간 적이 없다.' 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 존재'이고,
은 인간을 구속하는 '생각(욕망이나 선입관)'이다.
따라서 생각이란 것이 없으면 병이 없고,
병이 없으면 새가 병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말이 성립한다.


더 자세한 해설을 하는 도병훈 작가는 '병과 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스승이 말한 병과 새는 개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스승이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부터, 그 젊은 승려는 ‘병과 새’를 실제로 존재하는 ‘병과 새’로 생각해버렸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은 실재 대상을 전제로 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은 약속된 기호체계를 빌린 개념일 뿐이고, 실재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언어와 실재 세계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1979년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김성동 작가의 소설 <만나라>에서 나오는 답은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하고 환속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난다.
 
그 내용을 간략히 보면,
 

 

스물다섯 살의 젊고 성실한 법운(法運) 스님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후 사회를 정화하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장한 뜻을 세우고 출가한다.
"입구가 좁은 병 속에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넣고 키웠는데, 새를 꺼내려고 하니까 그동안 커서 병을 깨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병을 깨지도 않고, 새를 다치지도 않도록 꺼내 보라"는 어려운 화두를 안고 자나깨나 병 속의 새를 꺼내려고 괴로워한다.

이때 법운은 벽운사라는 절에서 우연히 서른두 살의 타락한 파계승 지산(知山)이라는 스님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절을 망치는 땡추라고 경멸하지만,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끌려 친하게 된다. 법운은 지산을 통해 '어떻게 수행 정진하는 것이 진정한 구도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열심히 수행을 하며 부처가 되고자 하나, 지산은 결국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마을에서 돌아오다가 얼어 죽고 만다. 법운은 지산을 다비하면서 문득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하게 된다. 법운은 결국 10년 동안의 방황을 마치고 환속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은 속세이고, 그 속을 살아가는 '새'는 중생이 된다.
중생은 속세 속에서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살 때 구제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생(衆生)이란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인간, 그 밖의 일체의 생물을 말한다.

 


대행 큰스님은 다음과 같은 답을 말한다.



"우리 사는 것이 병 속과 같습니다.

마음이 넓어지고 지혜로워지면 누가 꺼내주기 이전에 스스로가 나고 들고 하는 것이 자유스럽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거는 병에서 새를 꺼내려고 하니 꺼내집니까, 그게?
즉, 말하자면 내 자성불(自成佛)이 있는데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면 되느냐 이 소리죠.
문제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중생이 사는 조건은 병과 같고, 그 병 속에서 '마음이 넓어지고 지혜로운'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부처가 되면 병 속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혜로운 말씀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병 속의 새'라는 화두를 가지고 불교계에서 나온 여러 해석을 살펴보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결론이 나올 것 같다.
 
만일 '병'을 속세나 육신으로, '새'를 인간이나 정신으로 비유하면,
인간은 속세를 벗어날 수 없고, 정신은 육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렇다면, '병을 깨지 말고, 새를 죽이지도 말고, 새를 꺼내 보라."는 문제는
'속세(육신)를 망치지 말고, 인간(정신)을 죽이지 말고,
인간(정신)을 속세(육신)의 괴로움으로부터 꺼내 보라.'는 문제로 바꿀 수 있다.


인간이 속세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신이 육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야말로 부처가 출가한 근본 문제였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된 수련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병 속의 새' 에 대한 불교계의 여러 가지 해석은 좁은 범위의 자의적이고 적절하지 못한 답으로 보인다.
남전 선사와 육긍의 일화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남전 선사가 육긍에게 "대부!"라고 불렀을 때 육긍이 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때 남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벌써 나왔소."

남전 선사는 부처를 상징하고 육긍은 중생을 상징한다.
따라서 남전 선사의 부름에 응한 육긍의 대답은 부처의 말씀에 순응하는 구도자의 길을 가는 것만이
'병'이라는 육신(속세)의 고통을 벗어나 자유로운 '새'처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석된다.


글 : 옵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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