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29. 10:49ㆍ책 · 펌글 · 자료/종교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 겨”
- 수월선사 법문중에서 -
조선 500년을 거치며 불교는 ‘박제’가 됐다.
승려는 천민 신분이었다.
유생들이 사찰을 찾을 때면 승려는 가마를 메거나, 술 시중을 들어야 했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내려오던 ‘선맥’도 가물가물해졌다.
일제 식민시대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교는 이름만 있을 뿐, 숨결을 찾긴 힘들었다.
그때 ‘한국 불교’에 불씨를 지핀 이가 경허 선사다.
그에겐 내로라하는 제자가 셋 있었다.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경허의 세 달’로 부른다.
수월은 멀리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그리고 만공은 중간 지점인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그 중 경허의 맏상좌였던 수월은 달 중에서도 ‘꽉 찬 달’로 통한다.
그러나 오도송(깨달을 때의 게송)도 없고, 열반송(입적할 때의 게송)도 없다.
이렇다할 설법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특이하다. ‘그림자 없는 성자’.
그의 자취가 깃든 북간도, 그의 흔적이 남았을지도 모를 옛 만주땅을 찾았다.
27일 옌지 시내에서 ‘수월정사(水月精舍)’ 개원식이 열렸다.
연변조선족자치주불교협회가 3층짜리 포교당(중국에선 ‘신흥불당’이라 부름)을 세우고,
이름을 ‘수월정사’라 붙였다.
모두 3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행사에 참석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구름을 벗어난 달은 백개, 천개, 만개의 강에 비칠 수 있다.
수월 스님은 그렇게 강에 비친 달의 실체”라며
“그러나 이름 그대로 물 위를 가는 달처럼 자취도, 흔적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월 선사의 손상좌뻘인 명선 스님(여수 흥국사 회주·조계종 원로의원)은
“10여년 전 이 일대에서 수월 스님을 기억하는 노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떨어진 벼이삭과 마을사람들이 김장하다 버린 배추잎을 주워 말린 뒤
겨우내 산속 동물들이 찾아오면 던져주던 수월 스님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며
“수차례 그분들께 고증을 받아 수월 스님의 진영을 그렸고,
이곳 수월 정사에 모시게 됐다”고 밝혔다.
출가 전, 수월은 머슴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했다.
하루는 그의 방에 탁발승이 잠을 청했다.
탁발승이 밤새 들려준 이야기에 그는 ‘출가’를 결심했다.
그러나 주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죽신을 던져주며 “신발이 다 떨어지면 떠나라”고 했다.
수월은 2년의 세월을 더 보냈다.
일을 마친 밤, 그는 들판에 나가 가죽신을 신고 끝없이 벼포기를 걷어찼다.
결국 가죽이 떨어지던 날, 그는 수행자의 길을 떠났다.
그는 서산 천장암으로 경허 선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나 깨나 ‘천수경’을 외었다.
그게 그의 ‘화두’였다.
결국 ‘나’는 없고 ‘천수경’만 흐르던 날, 그는 깨달음을 얻었을 터이다.
무식하고, 못 생기고, 키도 작고, 볼품없던 수월 선사는
수 차례나 ‘방광(放光·수행자의 몸이나 성스러운 물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했다고 한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밤에 불이 난 줄 알고 달려왔다가 합장을 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그건 ‘나 없는 나’에 우주가 온전히 응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옌지에서 버스로 1시간을 달렸다.
수월 선사가 머물던 투먼(圖門)시 이광(一光)산의 화엄사 옛터를 찾았다.
수월 선사는 그곳에 작은 초막집을 짓고 살았다.
바로 뒤가 천길 낭떠러지였다. 그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일제시대, 국경을 넘는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너고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수월 선사는 그 고개 정상에 손수 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놓아두었다.
누가 두었다는 흔적도 없이 말이다.
그는 평생, 그렇게 자비를 베풀었다.
화엄사 옛터로 올랐다.
온갖 풀과 소나무가 무성했다. 그 사이로 돌계단이 놓인 옛 오솔길이 잡초에 덮여 있었다.
수월 선사는 수도 없이 그 위를 밟았을 것이다.
거기서 작은 법회가 열렸다.
조선족자치주불교협회 부회장 지광(智光) 스님은
“구화산 김교각 지장보살처럼 연변에선 수월 스님을 조선족 스님으로 생각한다”며
“그리운 수월스님/언제나 오시려나”로 시작하는 추모시를 읊었다.
조선족자치주불교협회는 2011년 3월까지 그곳에 ‘화엄사’를 복원할 계획이다.
수월 선사의 법문은 오직 하나만 남아 있다.
몸을 다친 독립군 연설단원이 화엄사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이다.
거기서 수월 선사는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 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 겨”
라고 말했다.
이 법문을 기억한 그 독립군 단원은 나중에 몽골에서 스님이 됐다.
수월(水月), 스승이 내린 법명처럼 그는 쉼 없이 흐르는 ‘달’이었다.
옌지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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