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고모님네 여인들

2008. 7. 23. 23:59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내 어릴적 소광이란 동네에 살때의 일이다.

방학이 되서야 갈수 있었던 그동네의 일은
어른들의 두런거림에 내용을 짐작할뿐이었는데
이제야 실타래같이 설킨 사연들이 이해가 되니
세상살이 라는게 미묘하고도

복잡다단 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던 동네라
우리가 살던 사택에서 삼십여리 산길을 걸어서 들어가면
아담한 농가 몇채가 나오는데,
넓게 터를 잡아 각종 유실수로 집둘레에 병풍을 만들고
자글거리는 양지쪽에 날아갈듯 기와를 얹은집이

내 왕고모님 댁이었다.

  

  

 

 

마당 앞으로 펼쳐진 들엔 푸른주단을 깔아놓은듯
한창 물올라 파란 벼가 소소한 바람에 일렁이고
구수한 쇠죽내음 가득한 외양간의 소들은
흰김을 내뿜으며 새김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왕고모님네 가는길엔 보리밀이 한창 이었는데
새콤한맛 나는 보리밀의 작은 알갱이를 입에넣고 터트리던 그날은
내가 방학을 해서 가족 소풍차 인사차 나들이한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내 아버지의 고모님, 그러니까 나의 조부님의 여동생이니
내겐 왕고모님이 되신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듯이 집안으로 들이며 바라보시던
왕고모님의 눈길이 참으로 그윽했다고 기억하는데
그도 그럴것이 오빠의 아들, 그것도 조카가 여섯살 되던해
너무나 젊어 돌아가신 오빠에대한 추억과 조카에대한 연민이
그런 눈빛을 만들어 내신것 같다.


나의 조부님은 그성정이 대단하셔서
꼬장꼬장하기가 하늘을 상대로 싸울 정도였단다.
추수하여 마당에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비내리니 낫으로 찍어내더란다.


젊어 일찍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누워 지내시는 동안
여섯살된 막내인 내아버지는 종일을 조부님곁에서 놀며
홍시를 숟갈로 떠서 입에 넣어드리곤 했다는데,
돌아가시던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뒤곁에 떨어진 홍시를 소매끝으로 닦으며
방에 들어가 조부님의 입에 자꾸 숟가락을 넣어시며
'아부지가 안먹어... 왜 안먹어... ' 하고 우셨단다.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하시더니 결국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소매끝으로 눈가를 훔치셨었다.

 

   

 

허우대 좋고 시조를 좋아하시는
한량같은 종손에게 시집을 가신 왕고모님은
작고 단아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안중에도 없는 신랑을 대신하여 온갖 농사일이며
문중의 대소사를 장악하셨고 살림도 크게 일구셔서
그 영향력이 문중에서도 대단 하셨다 한다.

 

  

 

 

우리가 살던 동네의 산판 트럭이 다니던 길가에
거의 이마를 붙이다시피한 두채의 집이 있었는데
정답게 보이던 두채의 집 사연은 지금 생각해도 소설같기만 하다.


오른쪽의 허술한 집은 혼기에 이른 큰딸과 내또래인 딸만 둘 낳아
거의 소박지경에 이른 두째 여인의 집이었고,
왼쪽의 정갈한집은
떡두꺼비같은 아들만 둘낳아 기세등등한 젊은여인이 사는,
한량같으신 왕고모부님의 여인들이 사는 집이었다.


어떻게 나란히 살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아뭏든 그들의 사연은 근방의 제일가는 가십거리 였는데
특히 가끔씩 벌어지는 두여인네의 싸움은 가히 온동네를 흔들고도 남았으니
격렬한 싸움에 아무도 말릴 엄두조차 못냈던것 같다.

 

 

  

 

 

어느날 왕고모부님이 지나시다 두째네 큰딸의 혼사문제로
잠시 두째여인과 안방에서 대면한 것이 화근이 된다.


아들 둘만 낳은 여우같은 셋째 여인이 한겨울 차디찬 물을
두째 여인에게 냅다 퍼부은 일이었다.
두여인은 한몸으로 뒤엉켜 차길까지 굴러나와 떨어질줄 몰랐고
결국 학교로 허겁지겁 달려온 동네사람의 전갈에
내 아버지가 달려 가서야 진정이 되었으니
그래도 조카라는 일가의 시선앞에서 수치는 있었던것 같다.


남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서로 오손도손 사는게 좋지 않겠냐고
당부하러간 아버지 앞에 술상부터 봐온 두째는 그동안의 설움을 서리서리 풀어놓는다.
수업중 달려나가 느닷없이 대낮부터 술상을 마주하던일,
어느 대목에서 끊고 일어서야 될지를 몰라 곤혹스럽던 그때의 일을
요즘도 가끔씩 말씀하신다.

 

 

 

 

 


 

 

  

 

 

지금와 생각하니 두째여인의 논리는 이러하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법, 내가 아무리 아들은 못낳았어도
지 형인 나에대한 예우가 말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도로 뺏을수 있지만 아들낳은 젊은년 앞날이 불쌍하여
방관하고 있는 나의 깊은뜻을 너무 모른다.
나와의 관계이전에 딸들의 아버지 노릇까지 훼방을 놓는다면 곤란하지 않느냐.. 이고,

세째여인은,
아들은 아무나 낳나, 능력이 안되 아들생산 못했으면
스스로 그죄과를 인정하고 물러나 앉아 조용해야지
아들낳아 가문의 영광에 일조한 나하고 같은 반열에 앉으려는 생심이냐,
다 늙은것이 이제와 알콩달콩 사는 꽃밭에 재를 뿌리려 든다면
좌시 않겠다... 인데,


내 아버지와 그네들의 관계도 잊은채 본능적인 적개심만 드러내어
서로 자기편이라는 심증으로 기세등등 했으니
그런일 있을때마다 아버지는 해결사로 불려 나가셔야 했고
여인들의 속타는 사연들에 난처한 증인이 되주어야 했으니
그 고충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은근히 두째를 동정했는데
그이유는 세째의 교만에 있었을 것이다.
왕고모님께 정기적으로 인사를 다니며 상납(?)을 했고
두아들을 시골아이들 같지 않게 항상 희멀끔하게 씻겨 키우고
집 안팍을 정갈히 했고 그음식 솜씨 또한 기막혔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차 많은 남편수발에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본가에서 오기만 하면 깔끔히 손질해 놓은 한복으로 단장 시켰고
여름이면 손질하기 힘든 모시옷을 입히고 부채를 들려 밖에 내놓아
지나는 길이 다 훤해질 만큼 이었다 한다.
생존본능 뛰어난 교활한 처세술이라는 동네의 비난을 감당해야 했지만
나는 정말 남편을, 한남성을 깊이 사랑했었구나.. 라는 생각이들어
처연하기만 하다.

 

 

  

 

 

 

 

 

 

  

 

한바탕 그런일이 있고나면 얼마후 왕고모님이 행차를 하시는데
두째네로 가셔서 여인들을 불러들이면
작은 체구의 왕고모님 앞에서 두려워 다소곳했다하니
조강지처라는 위치의 막강한 영향력 탓인지
아니면 내왕고모님의 카리스마 때문 이었는지는 모르나
어떤 도저한 질서가 내재 되었던것 같아 그의미가 불가사의 하다.


자칫 묘하게 질펀해지려는 불평들은 서릿발같은 추궁으로 압도하며
호통과 당부를 하시곤 우리집에 들러 한참을 내어머니와 얘기를 나누셨는데
두째의 어리숙함을 안타까워 하셨다.


본처 소생의 장성한 아들이 이미 있었지만
아들을 낳은 여인을 홀대 못하는 정서가 그밑바탕에는 깔려있었던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벌로써 한참 동안을 남편을 보내지 않았으니
두여인은 제일 무서운 상대가 내왕고모님임을 어찌 체득하지 않았겠는가

 

 

  

 

한량 남편을 둔 우리네 여인들이 겪어야 했을 모진 가슴앓이 한편엔
이런 익살스런 보복의 한풀이도 있었으니 위안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왜 본처에게 그런 권력을 주었는지 생각하면 한편 재미도 있다.
한가닥 죄의식을 들어볼 요량이었는지
아니면 골치아픈 문제에서 한발 빼고싶은 남정네들의 이기심이
본처의 보복심리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타협의 접점인지 모를일이다.

 

 

 

  

 

그시절은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출몰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68년쯤이었다고 기억된다.
산촌의 외딴집들에 들어왔던 공비들이 식사를 부탁하고선
위폐 쓰는법을 친절히 알려주며 몇다발씩 주고 갔다는 이야기며,
릴레이식으로 신고한 무용담이며,
자고나면 공비 이야기로 어수선하고 공포스러웠던 시절이었는데,


심란스럽고 스산하던 동네에서 그런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여인들의 까맣게 타들어가던 가슴아픈 사연들이
비정하게도 남들에겐 긴장을 풀고 맘놓고 웃게도 만들었던
청량제 구실을 한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와 동갑인 두째여인의 작은딸은
상미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영리하고 예쁜아이 였었다.


우리는 서로 얽힌 촌수가 어찌되건 관심도 없었고
내가 방학이되어 가면 서로 어울려 놀기에 바빴는데
그나이의 나로서는 감당 못할만치 성에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런 상미에게 나는 경탄했었고 존경심 마저 있었다.
그때 그아이의 치기는 그분야에 너무나 무식했던
나에대한 우쭐 거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웃음이난다.
내가 성에대해 동화속의 이야기라 상상할만큼 그아이의 표현은
자못 예술적이었으니 말이다.


결혼은 절대하지 않겠다던 상미는 영주로 시집가서
남매를 낳아 아주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나는 뛸듯이 기뻤는데
어른들의 복잡했던 갈등의 와류에 혼란스러웠을,
성장기에 겪었던 수난이
크게 상처가 안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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