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사자의 서

2007. 11. 25. 08:29책 · 펌글 · 자료/종교

 

 

 

티벳 死者의 書

 

 

1. 에반스 웬츠

 

<티벳 사자의 서>는 과학적이고 명상적인 방법으로 인간 존재를 탐구한 책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왜 나는 이곳에 육신을 갖고 태어났는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탄생은 왜 있으며 죽음은 왜 있는가?"

-->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이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티벳 사자의 서>는 간직하고 있다.

 

"그대여, 진리에 대한 열망과 명상과 실제 수행을 하나로 묶으라.

그리하여 실제 수행을 통해서 진정한 앎을 얻으라.

이 삶과 다음의 삶과 그 둘 사이의 삶을 하나로 여기라.

그리하여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대 자신을 수행하라."

--> '티벳 사자의 서'의 메시지는,

죽음의 예술은 삶의 예술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예술은 삶의 예술을 보완해 주고 완성시켜 준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많은 탄생과 죽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윤회에 대한 가르침이 사실이 아니며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도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이론은 사실상 무의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말고는 어떤 결론에도 이를 수 없다."

 

- 칼 구스타프 융 -

 

 


<이집트 사자의 서>는 그 원제목이 <낮으로부터 탄생한 책>이다.
그 책은 이 삶으로부터 나와서 다른 삶으로 탄생하는
이집트인들의 성스런 기술을 다루고 있으며,

<티벳 사자의 서>는 원래 티벳어로는 바르도 퇴돌,
그것은 '사후세계에서 듣는 것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의 뜻으로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넘어서 니르바나의 해탈로 들어가는 명상법을 의미한다.

 

 

 

 


 

영적 스승들이 선언하듯이, 인간은 영적으로 강해졌을 때 환희 상태에서 죽음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상태를 우리는 사마디(삼매)라고 부르는 것이다.

죽음의 기술을 알고 있을 때 죽음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는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육신을 버릴 때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음의 삶을 얻으리라.

 그의 생각이 몰두해 있는 그 상태를 그는 얻게 되리라."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의 결과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벳 사자의 서'의 독특한 점은 죽음과 환생의 중간상태에서 일어나는 윤회의 전체과정을 합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로마 카돌릭이 붓다를 중세시대의 성 요호사밧의 성격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린 것은

동양적인 것이 어떻게 서양적인 것으로 변화해 갔는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보기다.


 

/


 

 

신들이나 악마들, 천당이나 지옥의 영상들은 모두 사자의 의식체를 구성하는 카르마의 사념들로 부터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의식체란 마단 존재하려는 의지, 살려는 의지, 믿음을 가지려는 의지로부터 생겨난 일시적인 산물일 뿐이다.

<티벳 사자의 서>의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사자가, 곧 '꿈꾸는 자' 가 현상계에 환영으로 존재하는 모든 극락과 천국과 지옥과 연옥 등의 세계들을 넘어 초월적인 상태의 니르바나로 들어가게 하려는 데 있다.

 

진화를 거듭해 마침내 인간의 형태를 갖게 된 한 생명 흐름이 갑자기 엉뚱한 다른 형태를 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현재의 과학저인 눈으로 바라볼 때 꽃식물이 사과나 옥수수로 퇴화되거나 또는 어떤 종류의 가축이 다른 종류로

바뀌거나 문명인이 미개한 야만인 또는 인간 이하의 동물로 퇴화하는 일은 없다. 

동물계에서 최상의 존재인 인간은 그의 죄가 아무리 극악한 것일지라도 단번에 가장 저급한 동물이 되는 일은 없다.

인간이 축생으로 윤회한다는 사상은 인간의 의식 그 자체가 축생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저차원적이고 동물적인 부분만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육체가 죽음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분해되기 이전에도 이미 그 신체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끊임없이 윤회를 겪는다는

것이다. 인간계든 동식물계든 그 속에 담긴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윤회한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인간인 것과 동식물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부터 마누는 그의 법전(法典)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에서 벗어나

바라문 계급의 사람이 특별히 신성불가침하다는 교리를 합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상징적 해석론자들은 마누 법전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라문들은 그들 자신들의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반인들에게 윤회와 카르마의 교리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환생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상직적 해석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윤회에 대한 원래의 개념은 인간의 영혼이 새로운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단순하고 합리적인 것이었다.

짐승은 인간의 여러 속성들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물들이다.

사자, 곰, 여우, 올배미, 앵무새, 독사, 벌레 등과 같은 이름을 인간에게 하나의 별명으로 붙여 보라.

그러면 한 인간의 지배적인 속성을 한 단어로 압축해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재의식은 모든 과거 기억의 창고이고, 이 기억들은 한 번의 생애에 제한된 것이 아니며,

또한 이들 기억의 기억들은 다시 꺼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상의 계보에 영향을 미쳤던 모든 조건들의 최후 결과이며 최후 유전자이다.

 여기서 조상이 계보란 수백만 년 전, 생명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아득한 과거의 시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꿈의 연장이다.

일종의 4차원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꿈꾸는 자의 생각에 담긴 내용들이 곧바로 환영으로 나타난다. 

그런 영상들이 그곳에는 가득 차 있다.

 만일 좋은 카르마를 지녔다면 행복하고 천국 같을 것이고, 나쁜 카르마라면 비참하고 지옥 같은 환영들일 것이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계로부터 해방이며,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해방은 니르바나(모든 고통과 번외가 끊어진 경지)를 실현하는 데서 얻어진다.  

 


2. 칼 구스타프 융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이다.

그것을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은 사람에게 최고의 궁극적인 진리를 설명해준다.

그 진리란, 신들조차도 우리들 자신의 영혼에서 비치는 빛이고 우리들 영혼에서 투영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 세계의 입문식에서는 늘 관점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상징적인 죽음을 거친다.

산 자의 입문식에 있어서 초월이란 죽음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사고와 관점의 대전환을 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음의 초월이고, 기독교 용어를 빌리자면 죄악과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티벳 사자의 서>는 영혼이 태어나면서부터 잃어 버렸던 신성(神性)을 되찾게 해 주는 하나의 입문 과정이다.


 

3.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

 

 

"한 사람도, 사실은 살아 있는 어떤 존재도, 죽음의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자는 없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이번 생애 태어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죽음들을 겪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죽음의 반대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 가운데 한 면과 같고, 방안에서는 출구라 부르고 바깥에선 입구라고 부르는 방문과 같다."

만일 자연의 어떤 장난으로 인해 잠재의식의 문들이 갑자기 활짝 열린다면 ,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그것에 압도당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잠재의식의 문들은 오직 신비 세계의 입문자들에게만 열러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신비와 상징의 베일 뒤에 감처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삶과 환생의 중간 상태에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보장하는

티벳 경전 <바르도 퇴돌>은 상징적인 언어로 씌어져 있다.

그러나 침묵의 봉인들을 뜯을 때가 이제 왔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물질 세계의 정복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스스로 만든 한계를 초월해 영적 세계를 얻기위해 노력할 것인가 하는 전환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는 구석구석 철저히 살아 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물질주의나 단순한 기계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나아가 진정한 불교인들은 어떤 한 가지 형태의 존재만을 고집하거나 실체의 한 측면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우주 속에 어떤 형태든지 존재할 가능성에 늘 깨어 있다.


티벳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이 어떤 오류나  불교가 아닌 사상이 개입에 물들지 않고

법통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바르도 퇴돌>은 본래 임종에 처한 사람이나 사자를 위한 안내서일 뿐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지침서다.

바로 여기에 <티벳 사자의 서>를 더 많은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근본 이유가 있다.
바르도 상태에서 나타나는 환영들은 사자가 몸담고 살았던 종교와 문화적 전통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근원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다.

 

 

 

 5. 존 우드로프


 

 첫번째 의식 상태는 탄생의 순간에 갖는 의식이고, 마지막은 죽음의 순간에 갖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 마지막 의식 상태는 다시 첫번째 의식 상태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의 상태를 우리는 바르도라고 한다.

바르도는 '중간 상태[中陰]'라는 뜻이다.

바로 이 중간 상태에서 '낡은' 존재는 버려지고, '새로운' 존재로의 탈바꿈이 일어난다.


이 중간 상태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

이 책에서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듯이 그것들은 치카이 바르도, 초에니 바르도, 시드파 바르도라고 부른다.

치카이 바르도는 '죽음(임종)'의 순간의 바르도'이고,

초에니 바르도는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게 되는 바르도'이며,

마지막 시드파 바르도는 다시 육체의 삶으로 돌아가는 '환생의 길을 찾는 바르도'이다.


이 책에 담긴 경전 부분고 에반스 웬츠의 해설문은 이른바 <탄트라>라고 부르는 티벳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죽음의 과학을 설명한 더없이 가치있는 글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번째는 이 책이 '죽음의 기술'에 관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두번째 특징은 이 책이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영적 치료 교과서이고,

죽음의 세계를 통과해 다른 세계로 가려는 인간 영혼을 정화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강한 정신력을 갖게 하는 하나의 정신요법이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사후세계의 중간 사태에 있는 동안에 사자가 겪게 되는 체험을 묘사하고 거기에 대해서 가르치는 책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은 단지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활동들의 복합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복합체는 끝없이 변화한다.

매순간 정신적이고 신체적이 경험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탈바꿈해 나간다.
모두에게 죽음은 단지 물질로 구성된 육체로부터 심령체(의식체)가 잠시 분리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 심령체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며, 육체는 활동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을 잃고 부패해 버린다.
죽음은 '영혼 복합체'가 육체를 벗는 것이고 탄생은 육체를 입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죽음은 마지막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다른 형태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입문식일 뿐이다.
'죽음이라고 부르는 붕괴 과정이 임종자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 어떤 소리들이 그에게 들린다는 설명이다.

그 소리? 윙윙, 우르릉, 딱딱 한느 소리로 임종자의 마음에 들리는데, 임종 전과 후 15시간까지 들린다고 한다.
죽는 순간, 대상을 경험하던 의식이 사라진다. 이것을 흔히 기절(실신)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초월 의식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결과이다.

초월 의식은 공의 세계로부터 나오는 투명한 빛으로 상징된다.
그렇다면 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 있으며, 이름과 모습의 세계에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다음으로 사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지나간 삶의 기억을 젊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직도 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육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이 지상에서 가졌던 육체가 아니라 일종의 '꿈의 육체'이다.

우리가 꿈 속에서 보는 그런 몸인 것이다.
사자가 첫번째 바르도의 투명한 빛을 인식하면 그는 다르마카야 속에서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두번째 바르도에서의 해탈은 삼보가카야 속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극락세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바르도에서의 해탈은 나르마나카야 속에서 체험된다.
두번째와 세번째 바르도에서 사자는 형상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만일 여기서 해탈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형상을 통해서다.

인간 영혼이 동물의 몸 속으로 환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되려면 84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으로 탄생한 어렵고 소중한 기회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다시 저급한 형태로 내려가겠지만,

인간의 형태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세월만큼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만일 사후에 인간의 의식체가 과거의 카르마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면,

<티벳 사자의 서>가 사자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피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카르마가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이미 되어 있다면 사자에게 충고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반면에 만일 영혼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카르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카르마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트마(영혼)는 본질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한 개인은 당연히 그 자신이 쌓은 카르마의 영향을 받겠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가 축적한 카르마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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