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철학

2008. 1. 12. 14:17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폭력은 안됩니다."

 

미국의 네오콘도 일본의 핵무장을 주장하는 보수 정치인도 외치는 이 명백히 올바른 구호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오늘날 거대한 폭력수단을 독점한 자들이 널리 퍼뜨리는 이 도덕은 어쩌면 앞에 '너희들'이라는 말이 생략된 채 사용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폭력은 항상 '정의'와 '예방'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일찌기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인 우리에게 폭력은 숙명이다."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이 폭력에 대해 사람들의 반감이나 거부감을 높이기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처음부터 역설을 잉태하고 있다.

폭력은 안 된다, 그러니까 폭력을 증오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폭력을!

- 이러한 논리를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특히 오늘날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는 자'로까지 확대되어

현실적으로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곳에 폭력이 발생할 것 같다는 이유로 폭력이 행사되는 기묘한 사태마저 생겨나고 있다.

 

폭력으로 불리는 행위는 이 세계에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번번히 비난받고 있는 폭력,

이를테면 점령지에 탱크를 몰고들어가 팔레스타인 민중을 살해하는 강대한 이스라엘군의 폭력과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수류탄을 몸에 칭칭 감고 경찰 앞에서 자폭하는 팔레스타인 어린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폭력이

과연 똑같은 폭력일까?

 

미국이 베트남에서 대량살상무기로 퍼부었던 폭력과  

할렘가 뒤골목에서 흑인 폭력단이 휘두르는 자동소총의 폭력이 똑같은 힘일까?

 

이라크 전쟁은 예상대로 대량 파괴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대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지만

부시 정권과 밀접히 관련된 미국 기업들이 이라크 복구사업에 독점 참가하고 있는 사실로도 잘 알 수 있듯이

정도야 어떻든 배후에 '연고 자본주의'의 이권이 있음을 아예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시는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기독교 원리주의 요소가 농후한 절대적 정의를 계속 외치고 있다.

"전쟁은 수단을 달리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던 프로이센의 군사이론가 클라우제비츠의 철학도 정치 없는 오늘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로드니 킹 事件

 

로드니 킹이라는 당시 25세의 흑인 청년이 LA 근교를 드라이브하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고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경찰의 만행으로 불리는 이런  종류의 사건이야 흑인들 거리에서는 일상다반사이지만 이 사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배관회사 경영자인 조지 홀리데이라는 백인 남성이 우연히 이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일들이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순박한 마음에서 즉시 테이프를 LA시경에 우송,

이 사건을 알리지만 무시당한다.

결국 그는 테이프를 지방 방송국으로 보내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잘을 수 없이 커져 버린다.

 

이 영상은 같은 해 공개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맬컴X』의 첫 장면에,

아메리카 사회를 격렬하게 고발하는 연설장면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여러분도 직접 확인해보시기를 바라는데, 킹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경찰에 둘러싸여 약 81초 동안 56회 구타당했다.

주먹과 발뿐만 아니라 경찰봉으로 계속 폭행당한다. 게다가 두 번의 전기충격공격까지 받는다.

볼과 발목뼈가 으스러지고 아홉 군데의 두개골 골절, 안구장해를 입었으며 얼굴을 스무 바늘 꿰매는 증상이었다.

 

그런데 이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찰이 무죄방면으로 풀려나며 끝난다.

판결이 내려진 1992년 4월 29일이 바로 LA폭동이 발생한 날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판결로 흑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쌓일 대로 쌓인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네 명의 경찰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을가?

이 재판의 배심원들은 전원 백인이었다.

지역주민 중 배심원을 선출하는 미국에서는 재판을 어디서 열 것인가가 재판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치열한 공방 끝에 흑인 주민이 2% 정도에 불과한 시민 밸리라는 곳의 재판소로 사건이 이관되며

그 결과 배심원의 인종 구성이 백인으로만 이루어져 버렸다.

아무리 전원 백인인 배심원들이지만 그렇게까지  명백한 증거물을 들이대면 다소의 인종적 편견은 극복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놀랍게도 이 명백한 증거물인 비디오테이프가 경찰들의 '무죄'를 증명하는 증거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킹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기절 상태임은 누갑 봐도 명백했다.

그래서 평소 경찰의 폭행에 그저 울며 참아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흑인들이 이 재판에 거는 기대도 컸다.

그런데 경찰 측 변호인단은 이 테이프를 세밀하게 분석,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경찰이라는 사실의 증거물로 이용했다.

로드니 킹은 만약 공격(폭행)을 멈추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경찰에게 덤벼들어 폭력을 행사할 무시무시한 육체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상상적인 전도로 부를만한 조작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 구도는 인종차별이나 민족주의 내에서 '다수파의 공포'라는 리비도 경제로 나타난다.

역학관계로 말하면 '강자'에 속하는 측이 '약자'에 속하는 쪽에 의해 압도적인 힘으로 포위당하고 있는 듯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심리적으로 전도되어 나타나는 구조이다.

 

 

이러한 전도는 다양한 작품들에서 그려지고 있다.

최근의 『고(GO)』라는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제일 조선인학교의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된 일본인 남학생이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간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그런 장난을 무수히 경험한 탓에 여학생은 겁에 질려 버린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같은 조선인학교 남학생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다.

그런데 이 일본인 남학생은 그로부터 어떠한 공격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학생을 지키고자 하는 남학생의 행동(전혀 공격적이지는 않은)에 겁먹고 대뜸 가지고 있떤 칼로 찔러 죽인다.

 

바로 여기에 다수파의 공포가 작용하고 있다.

이 공포는 제일조선인을 폭력적인 가해자로 묘사하는 많은 이야기에 의해 촉진되었던 것이다.

제일조선인 남학생을 죽인 일본인 학생은 단순히 여학생과 사귀어 싶었을 뿐이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들(재일조선의 남학생들)이 '위험'하다며 호신용 칼을 쥐어주었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노숙자들을 흔히 '일반시민'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간혹 발표되는 노숙자들의 시나 글을 읽어보면 정작 그들의 생활 중 상당 부분이 공포나 불안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숙자 쪽이 훨씬 절실하게 '일반시민'이라는 젊은이, 경찰로부터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살아가야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노숙자에 대한 젊은 패거리나 '일반시민'에 의한 폭력은 보도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압도적으로 폭력적인 쪽은 노숙자에 비해 '평범한 다수파'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자야말로 공포의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로 인해 '일반시민'에 의한 폭력이나, 행정의 공정성 유무를 떠나

종종 폭력까지  동원한 노숙자 배제행위가 정당화되기도 한다.

 

여기에 '다수파의 공격'으로 부를 만한 전형적인 폭력의 한 발현형태가 있지 않나 싶다.

또 다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런 폭력의 특징은- 힘에 있어서 우위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측이, 

오히려 폭력을 당하는 열세인 측에게 힘의 우월과 폭력의 가해를 귀속시켜 버리는 '전도'이다.

이 전도야말로 사람들을 쉽게 폭력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치이다.

 

(사카이 다카시 '폭력의 철학' p117~ )

 

 

   

  

 

 직접행동

 

평화란 단순히 '파란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인가, 아니면 역동적인 항쟁 속에서 끊임없는 행동에 의해 유지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는

어떤 힘으로 충만한 상태인가?

단순히 '평화'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랄 뿐인가, 아니면 어느 가수가 외쳤듯 '평화에 힘을!"이라는 구호같이 행동할 것인가?

 

"왜 직접행동인가?

왜 농성이나 시위행진인가?

교섭이라는 더욱 좋은 수단이 있지 않은가? 라며 당신들이 질문하는 것도 지당합니다.

사실 대화야말로 직접행동이 목적으로 삼는 부분입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도록, 쟁점을 극적으로 고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폭력 저항자들의 임무 중 하나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더 감추겠습니까?

저는 이 '긴장'이라는 단어를 두려워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폭력적 긴장에는 진실로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비폭력적 긴장은 사태의 진전에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킹은 자신에게 과격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백인 목사나 '자유주의자'들에게,

원래 예수도 사도바울도 루터도 링컨도 제퍼슨도 그 시대에는 '과격주의자'가 아니었느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문제는 우리가 과격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과격주의자가 되는가이다.

 (p 42~45 )

 

 vs

 

비록 독립을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은 그렇지 않은 독립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피 흘리는 투쟁을 통한 독립은 식민지로부터 그리고 식민지 모델로부터 보다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식민지와 식민지 괴뢰정부 밑에서 안주하던 엘리트와 독립 후의 엘리트들의 연속성이 유지되어

결국 사회는 본질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파농)

 

"폭력은 취기를 깨우는 해독작용이다.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룸펜 프롤레타리아

 

아메리카와 프랑스의 게토에 대한 연구를 하는 로이 와캉에 따르면 -

대량생산방식 시대에 싸구려 노동력을 제공하던 게토는

중화학공업에서 서비스, 정보산업으로 기간산업이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직업없는 곳'으로 변하고 지역사회 기능까지 희박해지면서 공동화가 끝없이 진행되고 있다.

게토는 이제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이 되어버렸다고 분석한다.

(p 29)

 

가장 '주변'이므로 가장 저항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자들,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있는 시스템의 변혁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

변혁은 커녕 계급투쟁에도 이바지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발목을 잡는 경우조차 있었으니,

이 통합되지 않는 계급을 마르크스는 한없이 경멸했다.

그들은 "분명치 않으며 뿔뿔이 흩어진,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는 대중"이며

윤곽이 뚜렷한 다른 계급의 잉여, 즉 "모든 계급의 찌꺼기, 휴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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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s

 

평소 관심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읽기가 좀 힘들 겁니다.

전체적 구성이나 번역이 매끄러운 편도 아니구요.

이 책 보다는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이 괜찮아보이긴 하는데... 너무 두꺼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