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공범자 (임지현)

2007. 7. 11. 16:21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목차
 
     1부. 국사와 문명사
     2부. 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
     3부. 움직이는 근대
     4부. 분열된 정체성
     5부. 외부의 시선 - 논평


 


 

썸머리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우산 아래 모인 연구자들은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관계'를 드러내고 해체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막상 공동작업을 진행하면서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크고 작은 어려움에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비대칭성과 그에 다른 입장의 차이가 큰 부담이었다.
한국측은 한국 측대로 민족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작업이 주는 부담이 컸고,
일본측은 일본 측대로 제국주의의 원죄의식 때문에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권력담론으로서의 일본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족주의와의 정면대결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랑케이래 근대 역사학이 누려온 학문적 지위는 그것이 국가권력과 같은 결로 짜여졌기에 가능했다.
근대 역사학이 자부한 '과학성'과 '객관성'은 사실상 현존하는 민족국가의 역사적 신화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을 뿐이다.
랑케나 드로이젠과 같은 '과학적' 역사가가 민족 신화의 가장 위대한 생산자 였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도 이 지점에서이다.

이들에게 역사 발전에 대한 연속적인 이야기인 '정사'는 국가의 역사였으며,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제반 잡사'에 불과했다.

그것은 비단 프로이센 국가의 공식 역사가였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에 비해 국가보다는 민중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 서술도
'국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중심 기관인 의회가 항상 민중을 대변하고 대표함으로써 이들의 '정사' 역시 기본적으로는 국가의 역사였다.

'역사'와 '과학'이 '민족'과 결합한 계몽주의 이래의 근대 역사학에서 '국사'의 패러다임은 굳건한 것이었다.
민족국가를 역사 발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한 역사 서술은 사실상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제였다.

냉전체제의 붕괴와 세계화가 가져온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가 '재국민화'를 요구한 것이다.
'재국민화'를 향한 권력의 욕구가 존재하는 한
'국사'는 이제 세계화와 접목되어 자신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 역사학조차 '국사'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판적 역사학'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헤게모니로서의 '국사'의 패러다임은 그 안에서 오히려 굳건했다. 
 
민족국가의 실현을 역사의 종말로 보는 '민주주의적 목적론'은 오히려 주변부의 역사 서술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일한 유럽의 역사적 경로가 비유럽의 경험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통합유럽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통합유럽사가 '국사'의 틀을 해체하지 못하고,
개별 민족국가에서 유럽으로 '국사'의 패러다임을 확대 적용한 데 불과하다는 비판은 이 점에서 타당하다.

 


 

장엄한 '국사'를 가진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자기 고유의 유구한 '국사'를 발명하는 것은
'서양의 '국사'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이었다.
곧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역사학적 저항이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문명' 개념에 대해 '문화'를 내세워 집단적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독일의 고전사상,
법과 국가로 표현되는 '외면적 진리'에 대해 도덕과 종교, 전통의 '내면적 진리'의 우월성을 주장한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자들,
서양의 물질 세계에 대해 동양의 정신세계를 대항논리로 내세운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역사적으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장소로서의 자격을 '서양'에 투사하여 상상된 지리에 역사적 실정성을 부여하고,
서양 따라잡기를 역사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서양'을 보편적 지표로 설정했다.
또 그것은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서양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 투쟁이었다.
 
서양의 지배에 반발하면서도 서양의 논리를 모방하는
그래서 결국 서양의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주변부 민족주의 역사학의 관성에서 동아시아 최초의'국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주변부 역사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마스터 코드로서의 서양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실체화되는 한,
그것은 이미 서양의 헤게모니에 포섭된 역사 인식인 것이다.
물론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제국의 '국사'와 그에 대항하는 이념적 기제로서의 주변부 '국사'가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제국의 국가권력과 주변부의 국가권력 혹은 저항운동이 갖는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대칭성이 제국의 '국사'에 대해 저항의 '국사'를 자동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옥시덴탈리즘이 오리엔탈리즘의 거울반사이듯이
저항의 '국사' 또한 보편적 세계사로 편입되기 위해 제국의 '국사'를 역사적 재현의 모델로 채택되는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서양의 헤게모니에 포섭된 저항일 뿐이었다.

탈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봉건제론,
자본주의 발전의 유럽적 모델에 기대어 있는 한국의 자주적 근대론 혹은 내재적 발전론,
맑스의 유럽 중심적 발전단계론에 기대어 중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맑스주의 역사학이 모두 그러하다.
 

세계사적 차원으로 얽혀 있는 '국사'의 대연쇄를 잘라내는 작업이야말로 서양의 헤게모니를 해제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한국·중국·일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역사 논쟁이나,
고구려의 '역사적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한국과 중국의 '국사' 논쟁 등을 거치면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사'의 연쇄고리는 오히려 더 강화되는 느낌이다.

이 논쟁들은 어느 일방 혹은 쌍방에 의해 과거가 왜곡되고,
따라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해 왜곡된 과거를 바로잡는다는 실증적 방법으로 해소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북한의 핵주권이 일본의 재군비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우경화가 다시 남한·북한·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중국적 세계질서를 복원하려는 중화주의가 남북한과 일본의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복합적인 정치적 연쇄고리의 이데올로기적 축인 것이다.

역사 논쟁의 텍스트 그 자체에 대한 실증적 이해를 넘어서
그 텍스트가 배치되어온 근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지형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 전쟁에서 보듯이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 전략을 공유한다.
적대적이면서 동시에 공범자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적대적 공범관계' 속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살찌우고 강화시켰던 것이다.
민족주의를 국민 통합과 동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는 동아시아의 국가권력은
표면적으로는 적이지만 실제로는 내연관계를 맺고 있는 '내연의 적'인 것이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민중들 사이에 민족적 냉전체제를 조성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재생산함으로써 권력의 헤게모니를 강화해왔다. 

 

사실상 좌파 역사학의 문제 제기는 '국사'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왔을 뿐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의 전제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국사'의 해체는 궁극적으로 개별 민족국가-동아시아-유럽 세계를 잇는 '국사'의 대연쇄고리를 끊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세계사적 차원에서
그것은 '국사'의 패러다임이 근거하고 있는 유럽중심의 세계사에 대한 동경이나 제국과 근대에 대한 욕망을 버림으로써
'길들여진 타자'인 주변부의 역사학을 오리엔탈리즘의 사고에서 해방시키는 계기가 된다.

둘째, 동아시아 차원에서
그것은 남·북한-중국-일본의 국가권력을 잇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해체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국사'의 대연쇄구조가 존속되는 한,
동아시아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하고 그것을 매개로 민족주의의 동원 논리를 정당화하는
국가권력간의 담합구조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국사'의 해체가 밑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자발적 시민적 연대망을 구축하기 위한 소중한 전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셋째, 개별 민족국가 차원에서
그것은 특정한 헤게모니 집단이 단일한 의지와 이해를 지닌 국민의 이름으로 전체 주민을 대표하고,
그것을 통해 개별 민족국가 내부의 차이를 은폐하고 억압하는것은 헤게모니의 해체를 의미한다.

 

 


요컨대 '국사'의 대연쇄를 끊는다는 것은
개별 민족국가-동아시아-유럽 세계라는 세 차원에서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권력 헤게모니의 복합적인 고리를 해체하는
작업인 것이다.
'국사'를 해체하는 작업은 따라서 일국적 틀에 갇혀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최소한 동아시아 4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다.
일국적 차원에서 '국사'의 일방적 해체는 다른 국가권력의 공식적 역사 해석을 반사적으로 정당화하고,
그것이 일으키는 민족주의의 도미노 효과는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관계'를 강화하는 역작용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4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의 해체를 지향하는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의 존재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구려 역사를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국 또는 중국의 민족국가의 궤적에 구겨넣으려는 한·중간의 논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사유의 틀을 찍어내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일본이나 중국의 '국사'는 틀렸다는 비판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지적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다.
설혹 검증 가능한 오류를 모두 고친다 해도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국사'의 이데올로기는 건재하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재국민화'를 불러내는 주술적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을 잇는 '국사'의 연쇄구도에서 이들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공범관계인 것이다.
 
 

'해체한 다음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준비된 답변은 없다.
대안에 대한 질문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훗날 동아시아 사학사에서 20세기란 국민국가와 거푸집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이야기를 재생산한

'국사의 시대'로 자리매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성시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고대>(삼인, 2001)에서 지난 20세기를 이렇게 회고한 다음,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우리는 '국사의 시대'에 짜여진 이야기에서 언제쯤이면 해방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이 글은 이같은 이성시의 지적에 공감하여 그가 희구한 '국사의 시대'로부터 '해방'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한 취지에서
출발하고 있다.

'국사'라는 '짜여진 이야기', 곧 신화로부터 해방되면 역사의 민주화가 이루어진다.

국사라는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는 '거푸집'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배타적인 소재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 역사관이다.

실은 문명이란 것만큼 애매하고 지배를 위한 기회주의적이며 전략적인 개념은 없다.

확실한 세계 도처의 여러 나라가 각기 상이한 자연환경과 사회조건과 국제관계의 균형체계로 성립시킨
개성적 형태의 문명을 두고 선·후진을 따지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생각이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은 여러 문명은 상호 대립하고 지배하며 그 과정에서 융합한다는 사실이다.
문명의 본질은 차라리 그러한 상호관계로 정의됨이 더 옳을 듯하다.
문명은 문명들의 대립과 융합으로 발전하며, 접촉을 거부하는 문명은 정체하거나 소멸한다.  
혼혈이 근친혼보다 우성인자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부여하듯이,
문명의 진보는 대개 혼혈의 형태로 발전함이 일반적이다.

 


 

국사로부터의 체계적인 관심이 결여되더 있어 한국 문명사의 이해에는 아직 너무 많은 공백이 있고
수많은 신화의 억측이 그를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하에서는 사회의 문명적 편성과 관련하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족, 사유재산, 계급, 시장, 단체, 이데올로기의 여섯 분야에 한정하여
지금까지 필자가 나름대로 파악해온 한국 문명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가족>이라 하면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부모와 그 자식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혈연공동체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러한 가족 개념이 법제화되고 일반화한 것은 1910년대 식민지기에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근대적 가족법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 19세기 말까지의 조선사회에서는 아예 '가족'이란 말이 없었으며,
그저 가(家)이거나 가솔·가속·가권과 같은 말들이 그에 준하는 뜻으로 쓰였다.
기원 전후부터 19세기 말까지 국가에 의해 법제화된 家는
상고 1~7세기의 연(烟), 중고 8~14세기의 정(丁), 근고 15~19세기의 호(戶)라는 세 형태와 단계를 밟아왔다.


) 후략 (


 




 
아래는 오래전에  오마이 뉴스에 실렸던 기사다.


▲ 내는 책마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적대적 공범자들>를 쓴 임지현 교수. 

임지현(47·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책을 낼 때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1999년)가 그랬고,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동편집, 2003)가 그랬고,
<대중독재>(공동저서, 2004)가 그랬고,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공동저서, 2004)이 그랬다.
여기 언급하지 않은 다른 책들이 나왔을 때도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다분히 논쟁적인 책 <적대적 공범자들>(소나무)를 내놨다.
임지현 교수를 만나 책에 관해 들어봤다.

인터뷰 약속을 위해 전화통화를 할 때 임지현 교수는 약간 격앙돼 있었다.
1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북 인권에 입 다문 민주세력 북정권과 적대적 공범관계"라고 제목을 단 자신과의 인터뷰 기사 때문이라고 했다.
해서 그에게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가 왜 문제였는지부터 물었다.
임 교수는 자료로 복사해간 인터뷰 기사를 들여다보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을 짚으면서 말했다.

"그 기자는 처음 만난 기자인데, 이 대목, '남한의 민주화 세력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북한 국가 권력과 적대적 공범관계를 이룬다' 이렇게 썼는데, 작문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적대적 공범관계'가 아니라 '이상한 동맹관계'라는 표현을 썼는데, 하지도 않은 표현을 썼어요."

개념 혼돈이 왔다. '적대적 공범관계'나 '이상한 동맹관계'나 말만 다를 뿐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물었다.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이냐고.

하지만 여기서 잠깐,
임 교수의 대답을 듣기 전에 그가 이번에 내놓은 테제 '적대적 공범관계'란 무엇인지부터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래야만 두 개념의 차이에 대한 그의 진술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가 2000년 6월 일본의 탈근대적 좌파 잡지 <현대사상>에
'한반도 민족주의와 권력담론'을 실을 때 첨부한 '일본 독자에게'라는 머리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적대적 공범관계'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하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 용어가 다분히 가치 개입적이라고 밝힌 임 교수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야만으로부터 주변부의 주민들을 구출한다는 중심의 문명담론이나
중심의 침략에 맞서 주체성을 지킨다는 주변부의 민족담론이나 모두 권력 담론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지난 1월 20일 취임식으로 마무리된 미국의 2004년 대선 막바지에 오사마 빈 라덴이 느닷없이 미국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빈 라덴의 이 메시지가 부시와 케리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를 생각해보면 된다.
임지현 교수에 따르면 깊이 생각할 것도 당연히 "부시"다.
왜? "부시와 빈 라덴은 서로를 적대시함으로써 오히려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독특한 동맹관계"이기 때문이다.

빈 라덴의 정치적 힘은
"아프간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점령과 공격,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점령과 살육을 불러일으키는 아랍인들의 분노"에서,
부시의 정치적 힘은
"빈 라덴의 기습 공격과 노골적인 적의가 불러일으킨 미국 시민들의 분노와 공포"에서 각각 나온다.

빈 라덴의 9·11테러가 미국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이슬람을 공격하게 했고,
그 공격은 다시 이슬람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정당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부시의 빈 라덴에 대한 적대감, 빈 라덴의 부시에 대한 적대감이 알고 보니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관계, 즉 서로의 적대감이 서로에게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동맹의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적대적 공범관계이다.

이쯤하고, 앞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들어보자.

" '적대적 공범관계'라 함은 서로 먹고 사는 문제까지 결부된 적극적인 관계를 뜻하지만
 '이상한 동맹관계'는 '의도하지 않은 공범 관계' 즉, 남한의 민주화 세력이 북한 인민의 인권문제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반사적으로 북한의 국가 권력에 정당성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그런 의도하지 않은 현상을 말합니다."

임 교수는 이어 '북한 인민의 인권문제 거론'에 대한 자신의 종전 입장을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부시의 북한 폭격을 위한 명분 쌓기에 도움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권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며,
임 교수는 남한의 민주화 세력이 당연히 문제제기를 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오히려 남·북한 간에서 '적대적 공범관계'를 찾는다면 국가권력들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이같은 관계를 눈치 챌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일성이 없었다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가, 또 박정희가 없었다면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과연 힘을 받았겠느냐는 것이다.

한일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일본 우익의 망언 한 마디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키고,
한국의 대일본 규탄은 다시 일본의 민족주의를 단결케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고 임 교수는 말한다.
임지현의 이같은 논쟁적 주장의 배경에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서 촉발돼 그 강도가 점층적 궤적을 그리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다.

애국심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한국사람 맞느냐" "민족 반역자가 아니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게 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 담론은 혈통, 언어, 문화 등 '불변의 그 무엇'에 근거한 닫힌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어느덧 포스트민족주의를 향해 치닫는다.

"소위 저항적 민족주의까지 폄하하거나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해방과 저항에 근거한 규범적 이해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다행히 지난 몇 년간의 문제제기로 인해 민족주의는 절대선이라는 등식에 균열이 생기는 등 규범적 인식의 틈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시 재선에서 보듯 열린 민족주의라는 미국도 '대중독재'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젠 닫혔든 열렸든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그 무엇, 즉 포스트 민족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민족'이란 말은 1904년께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네이션'(Nation)을 '민족'(民族)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하였는데,
그게 그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임진왜란 때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瑣尾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의병장이 의병을 모으는데,
아랫것들이 의병 모이라면 하나도 모이지 않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그때 일본군 점령 정책이 동네마다 쌀 나눠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이었답니다."
임 교수는 그렇다면 교과서가 가르친 '민족의식이 투철한 민중'들은 당연히 일본군에 저항하고 게릴라전을 벌였어야 했을 텐데,
그 반대였다라는 건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내친 김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 고구려사를 둘러싼 그의 국사해체론과 변경사에 대한 입장도 들었다.

"민족주의를 국민 통합과 동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국가권력에게 있어
국사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로 촉발된 고구려사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민족 정권으로 보는 동북공정의 시각은 기존의 해석에 비해 다소 돌출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일 뿐이지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닙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지금의 중국과 한국을 염두에 두었겠습니까.
그래서 국사를 해체하고 변경사로 접근해야 된다고 봅니다."

임 교수가 말하는 변경사(Border History)는 현대적 국경의 개념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옛 기록을 보면 대마도 도주가 조선의 신하이자 일본 막부의 무사였다고 한다.
그럼 대마도는 조선땅인가, 일본땅인가.
이럴 경우 변경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개념이 보다 분명해진다고 임 교수는 말한다.
"쟁점이 되는 그 변경 영역을 실정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가 '국가 주권'적 해석을 선호한다면,
이웃 나라에 대한 그 영토의 정치적 귀속을 내심 인정하지 않는 다른 국가는 '역사 주권'적 해석을 선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24~25쪽)

따라서 변경사 연구는
"어느 하나의 국민이나 민족국가의 단위에 포섭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양한 문화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장으로 보는 관점"이다.

임 교수는 그에게 연구 지원을 약속했던 후원자조차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를 제외시키는 연구는 도와줄 수 없다"고 지원을 취소하는 현실을 언급하며,
변경사 연구에 대한 사회의 인식 부족을 안타까워했다.

그와의 인터뷰에서 '대중 독재' 얘기를 빼놓고 갈 수 없으리라.
스스로 '정신적 망명자'의 길을 택했다고 말하는 임지현 교수.

"박정희 기념관 사업을 보고 '대중 독재' 작업을 시작했는데,
고려대 설문조사에서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박정희가 뽑혔고,
또 경기도의 한 지방에서 실제 구술을 받아보니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참여' 메타포가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책 <대중 독재>에 실린 이 문제에 대한 서술을 한 대목 인용해보자.
"근대 독재의 폭력과 강제는 물의 표면에서 작동하는 현상일 뿐,
독재의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고 자발적 동원 체제를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정교한 헤게모니적 장치들이
물밑에 숨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12쪽)
그 결과 그는 독재 권력이 아니라 죄 없는 민중들을 적으로 돌리고 파시스트로 만드느냐는 비판까지 들었다.
 

'적대적 공범관계' 이외의 몇 가지

임지현과의 공식적인 인터뷰 테마인 '적대적 공범관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어봤다.

때마침 일부 공개돼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한일협정 문서에 대해서 먼저 물어봤다.

"한국과 일본의 이런저런 속셈에 맞아떨어진 전형적인 담합이죠.
또 식민지배 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땀을 한국의 국가권력이 횡령한 사건이죠.
그 돈이 조국 근대화에 쓰여졌다 해도 정당화 될 수 없죠.
지금의 정부도 여하튼 그때의 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임 교수는 한국 언론이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다'는 논지의 뉴스를 내보내면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그러면 해결 실마리가 없다고 했다.
이 문제는 당시 징용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국가주의에 입각해 일본 국가를 상대해서는 배상 받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징용자 개인들이 모여 당시 임금을 착취한 일본의 재벌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합니다.
물론 일본 법정에서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소송을 거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는 비인도주의적 노동착취를 한 회사가 영업활동을 할 수 없게 하는 법률이 있는데, 이 법률을 이용하자는 것.
유대인이 독일의 폭스바겐이나 지멘스를 상대로 배상을 받았던 전례에 비추어 유럽 역시 이같은 접근이 설득력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요즘 보수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뉴라이트'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신문만 봐서 잘 모릅니다.
다만 80년대 운동권 중 주사파들인 것 같은데, 저는 주사파가 박정희의 사생아라고 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박정희의 민족주의로 완전무장하고 대학에 들어갔는데,
박정희는 관동군이었고, 김일성은 만주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
70년대에 북한이 남한보다 낫고, 자주적인 근대화의 표상으로까지 여기게 되니까 북한 쪽에 경도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론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180도 돌렸다가
그 후 남한이 잘살고 민족의 부국강병 노선은 남한의 논리라고 판단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향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한때 그와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떠올라 때마침 전해진 강준만 교수의 저널룩 <인물과 사상>의 종간 소식에 대한 느낌도 들어봤다.

"<인물과 사상>이 한 역할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터부를 깼죠.
그러나 지나치게 이분법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았나 합니다.
결국 그 이분법적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앞에서도 <조선일보> 얘기를 했지만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있는 그의 '조선일보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물었다.

"제가 <조선일보>에 쓴 글에서는 단 한 번도 진보진영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체 게바라든지, 로자 룩셈부르크라든지 이런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조선일보> 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에게도 이런 얘기를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함으로써 오히려 보수적 독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요.
진보매체에서는 저 말고도 말할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러면서 그는 원고를 보낼 때 청탁받은 매수보다 항상 0.1매 정도 적게 써준다고 했다.
원고량이 많으면 자르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게 때문이란다.


스스로 선택한 '정신적 망명자'의 길

어쨌든 임지현 교수가 제기하는 논쟁적 테제,
즉 민족주의 · 대중독재 · 국사해체 · 적대적 공범관계 등은 모두 일관되게 하나의 주제인 민족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임 교수는 결론적으로 허구적 개념인 민족의 현실적 힘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
국민국가(Nation State)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않겠지만
민족주의가 자본이 주도하는 지구화시대에 대한 저항기제인지는 의심스럽다고 했다.

임 교수는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한다는 방식을 넘어
과거를 드러내서 살아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때 과거는 극복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21세기 민족주의 담론은
국가권력이 설정한 경계를 넘나들며, 타자화된 '우리'와 '우리화' 된 타자간의 수평적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의 민족주의 지형은 권력→민족→민중의 올림차순으로 전유되었던 것을
민중→민족→권력의 내림차순으로 전복시키는,
민족주의 담론의 생산자인 권력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었던 민중적 주체를 되찾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권력담론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주의를 해방시켜 자율적 시민 주도로 한반도 민족주의 지형도를 새로 짤 것을 제안했다.

그는 '민족주의란 무엇인가'를 테마로 삼아
민족주의의 출발점부터 시작해 주변으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추적한 모노그래프적인 책과 포스트 막시즘 시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을 쓰고 싶다고 했다.

태어나 자라고 공부하고 일하고 먹고 사는 이 땅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고자 노력했다는 임지현 교수가 스스로 선택한
'정신적 망명자'의 길에서 던진 도발적 문제제기 '적대적 공범관계'는 또 어떤 논의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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