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BC급 전범(3)... 재판

2007. 12. 8. 19:02책 · 펌글 · 자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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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 현지에서의 戰犯裁判

 

 

1946년 1월 21일, 싱가포르에서 영국군 재판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인 변호사도 통역도 없었다.

형식상 영국군 장교가 임시로 변호인을 맡고 통역은 거의가 일본에서 태어난 영국인 여성이라든가

그 밖에 임시로 불려오는 사람들이었던 탓에 언어 소통 면에서 피고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항변하고 싶어도 항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재판에서 눈을 뗄 여유도 없을 만큼 빠른 재판으로 1심 즉결, 간단히 사형 판결을 내렸다.

상고심이 없어 사형 판결을 받은 후 1주일 뒤든지 길어야 2개월 이내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연합국은 조선인 대만인을 일본인과는 따로 결집시켜 직접 본국에 송환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전쟁 재판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지 않았던 건 무슨 연유일까? 

구체적 경위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1945년 12월 11일과 13일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지구

검사총장과 영국 당국과의 회담에서 다음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범죄에 관한 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취급한다. 

 

조선인들은 설마 전범 문제에 관해서만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운명과 관련 있는 중대한 문제가 항상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결정되었다.

 

 

 

동남아시아연합지상군 최고사령부는 재판의 진행과 예정 일자를 신문에 발표했다.

공중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출두할 수 있도록 신문에

전쟁범죄재판을 발표하는 방침이 있었다.

싱가포르 도시 전체가 엄청난 반일 가운데 휩싸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진행한 재판이었다.

법정을 가득 메운 유족들 사이에서 증오의 소리가 넘쳐났을 것이다.

허나 수용소와 관련 있는 재판의 대부분은 시내에 만들어진 법정 10개소에서 방청인도 거의 없이

열렸다.

더위 때문에 대로는 졸리기도 한 한산한 법정 안에서 판사 변호사 통역 검사 피고인만이 참석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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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를 통한 영혼의 純化

 

 국어가 얼마나 민성 함양에 큰 힘을 발휘하는지는  새삼스레 논의할 것도 없다.

조선에서 초등 교육을 할 때 가장 힘쓰는 것은 국어 교육이다.

보통학교에서는 조선인 교원도 점차 늘어나는데, 교실에서는 절대로 '국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초등 1학년 어린아이들도 억양은 어색하지만 매우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고학년들은 자발적으로 일찍이 일본 본토의 일부 학교에서 활발히 진행했던 토론식 학습을 한다. 

노래 시간에도 우리 귀에 익숙한 우리 노래를 밝게 부르는 모습을 봤을 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사랑스럽고 기쁜 마음이 가슴속에 번져 온다.

 

우리들이 교문에 들어서자 교정에 있던 아이들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너는 몇 학년이냐?"고 물으니 "저는 4학년입니다"고 사랑스럽게 대답한다.

 말을 통해 서로의 영혼과 영혼이 만날 수 있다. 정말로 기쁜 일이다.

조선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일본어가 보급되어 있다.

어느 학교에도 예외 없이 국기 게양대가 있다.

같은 말로 서로 이야기하고 같은 일장기를 바라보니

이제 이것만으로도 조선에서의 초등 교육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부성 추천 파견 교육가가 본 조선 만주 실정』

 

 

 

 

  

 

 

 

『초등 국사』 6학년용에는 제 25과 「동아의 핵심」이라는 부분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조선의 정치는 역대 총독이 내선일치의 기치 아래 힘을 쏟아 부었기에 불과 30년 만에 크게

진보하였다. 그 결과 세상은 평온해졌고 산업은 발전했으며, 그중에서도 농업과 광업의 발전이

눈부시다.

근년에는 공업의 발달도 눈에 띄고, 바다와 육지의 교통 기관을 정비하여 산업이 번창하며

무역은 해가 다르게 발전해 왔다.

또 교육을 널리 보급하고 문화가 진전하면서 풍속과 관습 등이 점점 일본 내지內地 수준으로

높아지고, 사회 제도도 차례로 시정하여 내선일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방 정치에는 자치제를 보급하고 교육 수준도 내지와 비슷해졌다.

특히 육군에서는 특별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조선 사람들도 국방의 의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우다 죽어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서 호국의 신이 된 사람도 있으며,

일본식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하여 내지인과 같게 일본식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지나사변(일본에서 중일전쟁을 이르는 말_옮긴이)이 발생하고 나서는

조선 지방의 지위가 더욱 중요해졌다.

조선이 대륙 전진의 기지로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토대가 되어

우리나라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해, 내선일체의 정성은 점점 더 깊어지고 나날이 빛을 더해 간다.

 

                                                          - 조선총독부, 『초등 국사』5·6학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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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감시원 應募

 

 

소학교 선배 가운데 지원병이 있었다.

그 선배가 마을에 돌아왔을 때 치른 환영 행사는 엄청나서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뒷동산에 올라가 혼자서 나팔을 부는 지원병의 모습을 보고 동경의 마음을 품었던 것도 이 무렵이다.

사회 전체가 지원병을 띄워 주는 분위기였다.

배급도 최우선으로 받았고 직장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았으며 경찰도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시대였기에 지원병은 마을에서 영웅 같은 존재였다.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 조건을 보고 스스로 응모했다고 해서 일본 정부는 지원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형식은 지원이었다.

당시 조선 청년에게 자유롭게 인생을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군대에 가든지, 탄광에 가든지, 둘 다 싫어서 응모한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총을 잡고 싶지 않아서 군속이 된 사람도 있다.

집안의 말썽이 싫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응모한 사람도 있다.

50엔이라는 월급에 매력을 느낀 사람, 2년이라는 계약 기간에 매력을 느낀 사람…….

아마도 응모 동기는 3,000명 모두 제각각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