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3. 13:39ㆍ책 · 펌글 · 자료/역사
1.
1952년 6월 14일, 스가모 형무소에 구금된 조선인 29명, 대만인 1명,
전범 30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됐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1조] 일본국은 일본 국내 국외의 다른 연합국 전쟁범죄 법정의 재판을
수락하고, 일본 국내에 구금된 일본국민에게 이들 법정이 부과한 형을 집행하도록 한다. 이들을
사면 감형 가출옥시킬 권한은 각 사건에 관해 형을 부과한 하나나 둘 이상의 정부 결정과 일본국의
권고에 기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사할 수 없다.
이 조문에 따르면 '일본 국내에 구금된 일본 국민'에게 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패전 후
부터 이때까지 조선인 전범은 '일본국민'으로서 형의 집행을 받아왔다. 과연 11조에 규정한 '일본
국민'의 범주안에 조선인과 대만인이 포함되는지 아닌지, 미묘한 문제였다.
조선인 전범을 논의하였던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서, 조선인 군속의 문제는 공중에 떠버린채 초안을
작성하였던 듯하다.
스가모 형무소장의 주장
1. 재판할 당시 일본 국민이었다면 그 후의 국적의 변경은 형 집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조약 당사국 간의 일치된 견해이므로 일본 국내 재판도 이 해석에 구속된다.
2. 조약의 영문 해석에 따르면 '일본국민'은 재판시를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형의
집행은 수형자가 그 후 국적을 변경하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3.일본국이 승인한 국제 재판의 선고가 존재하는 이상, 일본이 조선인 대만인 수형자를 구금할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죄나 형기만료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재판소에 의한 구제도 완전석방
외의 적당한 처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가토 변호인의 변론요지
1. 법 103호는 평화조약 제11조의 위임적 성격이 있으므로 조약에 반하는 해석은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구속자는 '일본국민'에 한정해야 한다.
2. 평화조약 제11조의 '일본국민'은 협의로 해석해야하며 조약 발효후 일본국적을 상실한 조선인
대만인을 포함하지 않는다.
3. 조약은 제3국이나 제3국인을 구속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연합국도 잘 안다. 연합국이 일본에
시켜서 조선인 대만인을 구금하고 간접적으로 이 나라들의 주권을 침해하게 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판결
1. 연합국은 평화조약 제11조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 또는 연합국 범죄 법정에서 선고한 형의
집행을 일본에 위임하는 것에 관한 규정을 두었다. 집행의 요건은 다음의 두가지다.
1) 극동국제군사재판소와 일본 국내 국외의 연합국 전쟁범죄 법정에서 일본 국민에게 형이
선고되었던 점 ( 곧 형을 과한 당시에 일본 국민이었던 점)
2) 위 전범 일본인이 평화조약 발표 직전까지는 일본에서 구금되었던 점 (곧 구금 당시에
일본 국민이었던 점)
이 두 요건을 갖춘 한, 그 후에 국적을 상실하거나 변경하였다 하더라도 앞서 서술한 조약에
의한 일본국의 형 집행 의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조선인 대만인 전범의 경우 이 두
요건을 갖추고, 이 사실에 관하여는 당사자 간에도 이론이 없으므로 본 건 구속자의 구속은
법률상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청구자의 본건 청구는 이유가
없다.
포츠담선언 수락 1945년 8월 15일 /
항복 문서 조인 1945년 9월 22일 /
평화조약 발효 1952년 4월 28일 /
일본 정부가 1의 견해를 취한 것은 법무부 민사국장 통첩에서 명백하다.
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이탈하는 시점이 1952년 4월 28일이라 하더라도, 그때까지 일본에서
차지하는 조선인의 지위는 '일본 국적을 소유한 외국인'이라는 극히 모호한 것이었다.
이 논리라면 1945년에 무너진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1952년 4월 28일까지 존속하였던
셈이다.
2.
전범의 석방에는 만기와 가석방의 두 종류가 있었다.
연도별로 보면 이렇다.
1947년 1명, 1948년 4명, 1949년 8명, 1950년 31명, 1951년 23명, 1952년 29명.(4월 28일 이전)
1953년 5명, 1954년 3명, 1955년 8명, 1956년 12명, 1957년 1명이다.
유기형 125명 중 96명은 평화조약이 발효되기 전에 석방된 셈이다.
스가모 형무소를 출소한 조선인에 건네진 '석방증명서'에는 '2주 이내에 외국인 등록을 할 사람'
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가모 형무소를 나오면서 조선인 전범들이 받은 것은 귀환증명서 1장과
석방증명서, 피복, 일용품, 가장 가까운 연고지 까지 쓸 수 있는 여비였다. 일본에 육친도 지인도
있을리 없건만 지급된 여비는 도쿄 도내에서 가장 먼 거리까지 계산하여 200엔을 주었다.
지급된 군복 군화 담요 반합 모두를 팔아 치우면 3,000엔. 여기에 여비 200엔을 더한 금액이 1952년
석방된 어느 조선인 전범의 손에 들어온 전부였다.
3.
스가모 형무소를 나온 조선인들이 단합하여 '동진회'를 결성하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보상문제를 청원하던 중에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던 바,
1965년 12월 18일.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간 협정
(한일협정)'을 발효하여 청구권에 관해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공표하였다.
이학래씨 일행은 자신들의 문제가 조약 안에서 일괄 해결되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 그 문제라면 이미 끝난 것이에요. 불만이 있으면 한국 대사관으로 가세요."
한국대사관의 대응도 결코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견해는
일본정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전범'에 대해 무언가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듯했다.
일제에 협력하였을뿐 아니라 한국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한국에서는 포로감시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일본에 협력했다고 비난받는다. 그 때문에
과거가 밝혀지는 것이 싫었던 포로감시원 중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거나, 이력서에 그 경력을
지운 사람들도 있다. 허나 전범들은 과거를 지울 수도 없엇고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4.
정수웅 PD가 1980년대에 MBC에서 <포로 감시원>이라는 프로를 만들었다.
이때도 자바의 고려독립청년단에 초점을 맞추었고, BC급 전범문제는 다룰 수 없었다.
당시는 아직 한국 사회가 전범 문제를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2006년 여름. 이 금기에 도전한 사람이 이 책을 번역한 이호경 PD다. 2006년 8월 KBS에서
BC급 전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나서는 따로따로 살아온 유족들이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유족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물음과 동시에 단죄된 전쟁범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시각은 한국전쟁에서의 포로 문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전쟁범죄를 생각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 우쓰미 아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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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전쟁범죄에 관한 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취급한다."
내가 이 책을 썸머리하면서 선택과 구분을 저렇게 한 것은
대목별로 음미를 해 볼 구석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천천히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 포로감시원의 동남아 현지에서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공정한 평가를 하기에 다소 한쪽으로 기울거나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 보다도 나는 '내선일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진보계열의 지식인들의 솔직한 견해가 몹시 궁금하다.
만약에 일본의 패망이 없었다면, 아니 한 30년 정도만 한일합방의 관계가 지속이 되었다고 가정을 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고려와 元, 조선과 明 淸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려와 조선은 과연 독립국가였을까?
우리는 왜 元-明-淸-日으로부터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비해서 늘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까?
"전쟁범죄에 관한 한 고려인은 몽고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은 성립이 안되었을까?
"전쟁범죄에 관한 한,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취급한다."는 이 말의 함의가 참으로 깊다.
이 말은 단순히 전범재판 과정상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목격하고 경험한 동남아의 해당 국민과 연합국 포로들의 시각에서 그러하다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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