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의 오해

2007. 7. 30. 23:48책 · 펌글 · 자료/역사

 

 

 

아편전쟁      

                                                                                               

   

마오하이젠의 『천조의 붕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전쟁 내내 계속된 전방 관리들의 거짓말 잔치였다. 최고 권력을 지닌 도광제는 그들의 거짓말과 빈말만 믿고 의사 결정을 해야 했다. 그러니 전쟁의 패배는 예고된 결과였다. 아편전쟁 기간에 거짓말은 대부분의 청나라 조정 군신들을 마비시켰던 지독한 아편이었다.

청나라가 이 전쟁에서 실패하고, 마침내 와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관리들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아편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아편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고, 결국 과다 복용과 중독 증상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거짓말'이라는 아편을 끊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혁산을 비롯한 관리와 장수들에게는 거짓말이 필연적이었다. 그들의 거짓말은 하나같이 적의 강한 병력과 위협적인 기세를 은폐하는 데만 집중되었다. 상식적으로, 전쟁에 패했을 때는 적군의 실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야 조금이라도 책임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정반대였다. 서양 오랑캐가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느니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했다느니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느니 하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이유는 단지 황제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적의 상황을 과장해 보고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가 청나라 관리들 사이에 보고서 조작이나 허위 보고가 이미 습관화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편 중독과 다름없었다. 아편의 독소는 이미 그때의 중국인들의 뼛속 깊숙이 퍼져 있었던 듯하다. 황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거짓말 듣기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이들은 모두 귀가 즐거운 말이나 덕담, 공치사나 아부성 발언만을 듣고 싶어 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나 진심 여부는 다음 문제였다. 그러니 그들의 귀에 들려오는 정보는 대부분 사전에 선별 과정을 거친, 왜곡된 것들이었다.

   

기왕 전쟁에서 패했다면 남은것은 상대에 대한 도덕적 비난뿐이다. 중국인들이 1840년에 일어난 전쟁을 굳이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그러한 심리가 작용되었다. 사실 영국인들이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절대 아편의 밀거래에 있지 않았다.

 

영국 수상 파머스톤도 중국 주재 사절단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이 점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우리 영국 정부는 중국 정부가 아편의 수입을 금지할 권리가 있으며, 외국인 혹은 중국 백성들이 중국 영토 내로 밀반입한 아편들을 몰수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여왕 폐하께서는 그 사안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제시하지 않았다."

 

'남경조약'에도 아편무역을 개방한다는 조항이 전혀 없었다. 영국 입장에서 당시의 전쟁은 아편 수입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통상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평등과 통상을 요구하는 방법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뿐인가 하는 문제는 영국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았던 부분이다.

 

그래서 영국 정부가 입안한 對중국 전쟁 사안은 당시 271표 대 262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겨우 통과되었고, 심지어 반대파들은 의회변론에서 이를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며 심하게 반발했다. 결국 '아편전쟁'이라는 표현은 영국인들이 그들 정부를 풍자하면서 탄생한 말이었다.

 

영국 반대파들이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써도 문제될 것은 없지만, 만일 그것을 정말 '아편전쟁'이라고 여김으로써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아편 중독의 증후는 아닐까?

 

 

 

  

  

 

도광제(帝). 휘는 민녕(). 1820년에 즉위하였다. 

1839년에 아편전쟁. 1842년 約. 에 있어 지방관리 의 쇄신,

소금의 를 금하여 을 지키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체제는 허물어져,

1850년 그가 죽은 뒤 반 년도 안 되어 의 난이 일어났다.

에 조예가 깊어, 40권을 비롯한 많은 시문집을 남겼다.

 

 

 

-  『제국의 슬픔』중에서 발췌 -

 

 

 

 
 
 

 

 

 

그렇다면 왜 그들은 '거짓말' 이라는 아편에 중독되었는가?

- '天下의 중앙에 위치해 中國이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天子이며 천자의 왕조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므로 天朝이다. 천조의 신하와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니 華夏(화하)라 구분하고, 천자에서 멀어 야만적인 변방 민족은 蠻夷(만이)라 불렀다.
그들의 인식속에 '화하' 와 '만이' 는 '군신' 관계 혹은 '문명인' 과 '야만인' 의 관계이므로 등급이 달랐다. '만이' 가 '중국' 에 온다면 이는 조공, 이나 의식, 에 참가하기 위함이며, 아니라면 '은혜' 를 구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러 오는것, 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천조' 에는 '외교' 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고, 오직 '중국' 과 '속국' 의 개념만 존재했다.
기영이 성 아래서 영국군과 동맹을 맺을 때, 상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표현을 태연하게 사용한 것도 다 이러한 통념 때문이었다. 상대편에서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마당에, 오히려 자신들이 은혜를 베푼다고 합리화하다니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은혜를 베푼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경죄를 짓는 것이었고, 즉시 매국노로 전락했다. 오랑캐가 겁을 먹고 굴복했다거나, 실력이 별 볼일 없다거나 하는 말들을 지어내 않으면 '겁쟁이' 라는 비난을 받거나 적의 폭력행위를 눈감아 준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사실 영국은 외교적 평등과 통상 요구라는 측면에서 당시 모든 서방 국가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입장이었다. 영국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른 국가들도 똑같은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영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찻잎이나 다른 상품이 아닌 아편을 주거래 품목으로 삼은 것은 단지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라고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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