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은 왜 '염황자손'인가
반고는 틀림없는 중국인의 조상이다. 역사서의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이구동성으로 황제黃帝 희헌원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가슴까지 쾅쾅 치며 '우리는 황제 자손이야.'라고 침을 튀기며 말한다.
덕분에 반고는 한 발에 걷어 차여 저 음산 뒤로 날아가버린다.
그는 당시 세상에 어떤 재난을 가져다준 것도 아니고 후세에 부끄러운 짓을 한바도 없는데,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눈처럼 흰 새끼 양
왕조의 개산조 '황제' 희헌원은 사람의 몸을 하고 있었지만 관세음보살과 맨발의 적각대선의
신통력을 겸비한지라. '오씨'의 마지막 신농씨 후손 유망의 정권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강성했던 치우(蚩尤)의 구려(句麗) 부락에 맞섰다.
구려 부락의 무당은 입으로 주문만 외우면 바로 안개를 일으켜 앞이 보이지 않게 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희헌원은 방향을 알 수 있는 나침반을 장착한 지남거란 수레를 발명하여 한바탕 큰 싸움을
치른 끝에 치우를 잡아서 목을 댕강 잘라버렸다.
그는 이렇게 왕조의 기틀을 놓음으로써 훗날 한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는다.
희헌원은 단 한 방에 반고를 경계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한족의 조상이 되었다.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제왕
이방훈에 대한『제왕세기』의 찬양은 지극히 평범하다.
『통감외기』에 이르면 그 낯 뜨거움이 도를 지나쳐 솔직히 '졌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해보자.
이방훈이 평양(임분)에 도읍을 정했다.
흰색을 좋아하여 제사 때 백옥을 흰 비단 위에 올려놓고 공손히 떠받들었다.
생활은 몹시 소박하여 초가집의 풀도 다듬지 않을 정도였다.
처마 밑 기둥도 깎거나 다듬지 않은 원래 모습 그대로였으며,
기둥을 연결하는 자재도 모두 생략했다.
수레는 장식도 없고 칠도 하지 않은 간소함 그 자체였다.
식탁에 올라오는 포도는 겨우 한 사람 배를 채울 정도였고,
음식은 맛을 내거나 조미도 하지 않은 간단한 식단이었다.
오곡잡곡은 베지 않았다. 나뭇잎과 콩잎도 먹었다.
음식은 흙으로 만든 그릇에 담고, 물은 독에 채워 사용했다.
몸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고, 푹신한 침상에 눕지 않았으며,
비단이나 솜이불 따위도 덮지 않았다.
희귀하고 기이한 물건은 보여도 보지 않았다.
사람을 유혹하는 보물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으며,
부드럽고 달콤한 음삭은 듣지 않았다.
정부와 공공 건축물은 모두 원래 색으로 전혀 장식하지 않았으며 …….
여기까지 인용해놓고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만약 위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방훈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유기학파의 요구 때문에 그는 성인이 아니라 나무토막이 되어버렸다.》
.
.
.
"↑ 요 내용을 잘 살펴 보세요. 우리 민족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다만 평양이란 지명은 서너군데 있다는군요.)
이 책을 쓴 '보양'이라는 사람은 대만 사람인데,
이 양반은 우리나라의 존재는 전혀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거든요.
바로 그 점에서 이 대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겁니다.
'책 · 펌글 · 자료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인 BC급 전범(3)... 재판 (0) | 2007.12.08 |
---|---|
조선인 BC급 전범(2).. 콰이강의 다리 (0) | 2007.10.17 |
조선인 BC급 전범 (1) (0) | 2007.10.16 |
죽으라면 죽으리라 (0) | 2007.09.07 |
'아편전쟁'의 오해 (0) | 2007.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