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이에 오해가 없어 맺히고 풀어지는
긴장과 이완이 없다면
사는게 얼마나 지루하고 밋밋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는데
오해의 간극을 단번에 메꾸어 해소하는 데는
술잔을 앞에놓고 가슴을 열어 보여주고 또 들여다 보는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다.
술잔을 주고받는 거듭되는 손길과
무안함을 감추며 교차되는 눈빛에서
그동안의 증오가 부질없이 느껴져 봄눈녹듯 사라지고
내 증오에 시달렸을 상대가 안스러워
그만 부둥켜 안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못견디게 되는
급작스런 감정의 증폭은
술을 마실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술의 맛은 잘 모른다
그러나 술의 멋은 알 것 같은데,
먼데서 오랜만에 찾아온 동무의 확장된 사유와 촉기있는 사변에 달뜨면서
거오한 취기에 서서히 젖어드는 감상도 좋으며,
여럿이 모여든 걸판진 술상 앞에서 벗이 내뱉는
치열한 분기충천이나 비분강개의 절규도 좋고,
침묵에 익숙하던 벗의 취기빙자한 궤란쩍은 도발에
불끈한 좌중의 소란도
응축되어 침작되 있던 감정의 해빙을 보는듯하여 그또한 좋다.
무엇보다 좋은 건 형제들과의 만남이다.
나름대로 멋들은 아는지라 술상 앞에서의 거대담론은
새벽을 재촉하기 일쑤인데
시린 새벽내음 맡으며 잔잔히 이어지는 곡진한 마음씀이
눈물마저 솟구치게 하는것은
공유하여 반추할 거리가 많아서이리라.
또한
서로를 牽引(견인)하길 원하고
서로의 삶을 조망하여 탓하기도 하기에
혈육이란 질기디 질긴 인연이 구속과 상처가 되기도 하고
소속감으로 위안이 되기도 하는 운명의 덫을 수용하며
부딪치는 술잔의 내용이 더욱 농밀해지니 이아니 좋겠는가.
내 어릴적, 원체 약주를 즐기시는 아버지탓에
군데군데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동네 술도가(양조장)로 가끔 술심부름을 갔었는데,
졸리운듯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나온 술도가집 할머니는
내키보다 더큰 술항아리에 반쯤은 빠질듯 거꾸로 엎드려
한되들이 주전자에 막걸리를 퍼담아주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맛이 궁금하여 주전자 꼭지에 입을대고
벌컥벌컥 마셔본 게 술과는 첫인연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멀지 않은 길에는 무수한 언덕이 갑작스레 생겨나
넘어질듯 위태했는데
그네를 탄 거 같이 세상이 뒤집혔다 바로되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후 울창한 치기와 열기를 식힐 수 없어
괜히 몰려다니던 친구들과 어느 곳에서 맛본 맥주는
충격으로 나를 강타 했는데
차가운 사이다 맛일 걸로 예상했던 나는
그 찌리~ 하고 쓰디쓴 맛에 절망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 되었고
풀길없는 갈증엔 맥주가 젤이라는 나름의 기호도 생기게 되었으니,
나의 발전이 참으로 괄목하다 하겠다.
차디찬 맥주를 가득부어 마시는 첫 한모금은
모든 긴장, 긴박감, 치열함, 탱천함,억압,폭력의 사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평안과 행복으로 순간 환치시키니
이는 도피가 아니고 추구의 미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흔히들 말하는 필림이 끊기게 되는 독주는 기피하는데
급작스레 취해서 사고가 마비되면,
고조되고 상승되는 감정의 교류에서 더욱 공고히 다져지는
유대의 구축이 생략되고,
서로의 내면을 응시하는 사색을 방해받으며,
내밀한 언어의 공감이 만들어내는 통쾌한 소통이 삭제되어
만나서 헤어질때 까지의 과정을 모두 삭제당해
기억이란 저장창고가 비어
두고두고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취하고
벗의 도저한 취기에 더불어 대취해 버리는 나는
이제 득도의 경지에까지 오른건 아닌가 건방진 생각도 해본다.
몇해전 북해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오는 길에 동경에서 하루밤 자게 되어 거리로 나갔었는데,
지나다 나는 참 이상스런 광경을 목도했다.
한 건물에 스시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일인용, 또는 이인용의 앙증맞은 식탁과 의자들이
가장자리인 창가를 중심으로 배치되 있었고
일인용 식탁에는 한사람씩 앉아
몇개 담긴 초밥 한 접시와 맥주 한 컵씩을 놓고
밖을 응시하는 시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술자리는 잔치의 흥겨움이나 벗과의 나눔이
원칙인 것으로만 알고있던 나의 정서로는
참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생경스런 광경이었다.
왁자한 소란도 있고 벗의 미더운 어깨가 있어
다소 과한 취기도 그리 큰 결례가 아니게 너그러운
우리네 사람내음 물씬한 문화가 있어
우리는 아직 견딜만한 분량의 외로움을 안고 살고있는데,
언젠가 만나게 될 여러님들의
추억 만들기의 음모와 도발을 짐작하며 들뜬 나는
이 아름다운 유대에 미리 취기올라
이 저녁 참으로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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