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충돌 (모택동에 대한 두가지 견해)

2007. 7. 11. 12:01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1. 중국의 붉은 별

 

 

 

에드가 스노우는 중국 소비에트 지역 내 곳곳에서 "놀라운 형제애"와 "단단한 유대와 결속"을 발견했다고 찬탄하는가 하면, 마오나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일반 홍군병사들 간에 어떤 차별이나 불평등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스노는 홍군 속에 자신의 실존을 깊이 파묻고 있는 마오부터가 이미 평등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보고한다.1936년에 스노가 처음 본 마오의 생활 모습은 이와 같았다. 모(毛)는 방이 두 개 딸린 요방(동굴 식으로 뚫어놓은 방-인용자)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벽은 지도로 덮여 있을 뿐, 도배가 되어 있지 않아 초라했다.  ( …… ) 모택동 부부의 가장 두드러진 사치품은 주은래와 마찬가지로 모기장이었다. 이것만 빼놓는다면 모의 생활은 홍군 병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10년간 홍군을 이끌어오고 또 지주와 관리, 정세원들의 재산을 수백 차례나 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담요 몇 장과 면제 군복 두 벌을 포함한 약간의 개인 소지품뿐이었다. 그는 주석이자 동시에 홍군 사령관이었지만 그의 군복 상의 깃에는 홍군 일반 병사의 휘장인 두 개의 불근색 가로줄만이 붙어 있었다.

 

"나는 열세 살 때 국민학교르 마치고, 낮에는 들에서 머슴을 도와 장정한 사람의 몫의 일을 하고  밤에는 아버지를 도와 장부를 정리하는 장시간의 노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런 속에서도 나는  독서를 계속해 경서를 제외하고는 무슨 책이든 닥치는 대로 탐독했습니다. ( …… ) 나는 중국 문학의 옛 전기(傳奇)소설이나 고사(故事)들을 계속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런 책들 속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즉 땅을 가는 농부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지요.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무인이나 관리, 학자들뿐이었고, 농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어요. 나는 2년 동안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소설들의 내용을 세밀하게 검토하게 검토해 보았지요. 그 결과 이런 작품들이 땅을 갈 필요가 없는 무인이나 인민의 지배자들을 찬미하고 있음을 알았어요. 이들은 토지를 지배하면서 농민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도록 부리고 있음이 분명했어요."

 

스노우는 결국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은 농민과 홍군 그리고 마오가 '한몸'을 이루는 사회주의적 평등에 힘입은 바 크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예 '대장정'이라는 길고 거대한 몸체가 되어 세계의 모순과 위선을 관통하며 당대 역사에 굵직한 일획을 긋고 있음을 스노는 말하고 싶어한다.

 

 

 

 

2. 마오

  

여기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위대한 영도자 마오는『마오』에서 전혀 위대하지 않다. 그러기는커녕,『마오』는 마오의 추악한 욕망과 광기로 '더럽혀져' 있는 책이다. 어릴 때 자기를 때린 아버지를 두고 "제트기(고문의 일종-인용자)를 태워야 했을" 인간이라 이죽거리고 "성적 질투심"에 불타 며느리로부터 아들을 떼어내 한국전쟁으로 내몰아 죽게 마든 '패륜아',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이 부려먹으려는 욕심에서 그리고 자기보다 더 빨리 죽게 할 심산으로 '2인자' 저우언라이의 방광암 수술까지 막으려 했던 '냉혈한', 문화혁명을 작당해 "30년간이나 자신의 가장 가까우 동료였던" 류사오치를 군중들의 발길질 아래 내동댕이 친 뒤 부하들을 동원해 사진을 찍고 그것도 모자라 자녀들을 불러 폭행장면을 지켜보게 한 '인간말종'이 바로  마오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마오는 권력 장악을 위해 부하를 시켜 동료 공산당원뿐 아니라 그 부인들의 "음부를 불이 붙은 심지로 지지고 젖꽂지를 조그만 칼로 도려"내는 등 무시무시한 고문을 가한 뒤 죽이는 야차 같은 인물이다. 대장정 기간 동안 홍군 병사들이 "무릎과 살이 벌겋게 벗겨져"며 메고 가는 가마 위에 누워 독서를 즐기는가 하면,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당 중앙이나 모스크바에 굴종적인 제스처를 보이다가도 권력을 위해서는 부하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비열한 인간이 마오다. 그래서 학살의 방식이죽어나간 숫자나 나치의 유대인 학사이나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 '저리 가라'다. 전시는 그만두고라도, "전시도 아닌 평화시에 7,0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희생된" 시대갸 바로 '마오시대'였음을 저자들은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마오는 1976년에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의 가까운 동료들은 거의 모두 그의 손에 의해 사망하고 없었다."  

흥미롭게도  저자들은 마오쩌둥에게서 사상이나 신념보다는 현실의 어떤 물리적 지점을 앞세우고 있다. 마오는 어떤 '장소'를 먼저 차지하고 있었는데, 때맞춰 이념이나 사상이 그를 찾아온 것뿐이라는 논리다. 말하자면 마오의 공산주의는 내부의 신념에서 피어난 게 아니라 외부에서 입혀졌다는 것. 실상 마오의 공산주의는 그의 현실적 욕망이 걸친 외투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 점에서 마오는 어쩌면 사상 같은 '휘발성 기체'따윈 그리 신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그는 현실이라는 '고체',  현실의 중력이 고이고 그것을 내려받는 교차점을 탐색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인 것 같다. 마오의 자기중심주의를 감안하면, 마오가 "확장되는 조직에 편입된" 존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의 이후의 삶이 온통 '중심'을 향한 무자비하고도 끊임없는 탐색으로 점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장정은 일단 대일항전이라는 세계사적 명분을 향한 일사분란한 행군이 아니다. 그것은 마오, 장제스, 모스크바 3자의 욕망으로 꼬인 길일 뿐이다.

 

한편 장제스는 소련의 원조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홍군을 완전히 토벌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홍군에게 서북 쪽을 열어 준 것은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방향이 하필 서북 쪽인 것은 홍군을 쓰촨성으로 몰아넣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곳은 인구 5,000만 명의 큰 성인데다 물산이 풍부하여 그가 탐내던 성이었지만, 독자적 군대도 갖고 있어 그가 차지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만약 홍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으면 성의 군벌들이 겁을 먹고 자신의 군대를 성 안으로 들일 거라는 게 장제스의 계산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쓰촨성을 수중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마오』는 '자기중심주의-권력에의 집착-고도의 이미지 전략'이라느 3각구도를 통해 마오의 광기를 해명하는 책이다.

 

 

 

 

 

 

 

 

  

닥터 노먼 베쑨》

베쑨의 사회주의는 단순한 이념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지평에 정초한 사상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부터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행위를 채색하는 파시즘은 베쑨으로서는 가당치 않은 자기기만이었을 것이다. 그가 파시스트 프랑코로부터 스페인 민중을, 모택동 군대에 합류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로부터 중국 인민을 해방시키고자 한 것도 바로 이 '생명에의 존중'과 이를 위장하고 있는 '자기기만'의 그물을 찢어발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결국 일본군이 발밑까지 쳐들어오는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주위의 재촉을 물리치고 수술을 서둘다가 손을 베어 패혈증으로 1939년 중국에서 짧은 일생을 마친다. 일제의 침략에 국공합작으로 저항했건만 자기 군사의 치료에만 신경 쓰는 장제스 군대의 태도에 화를 내는 것도 다 이런 기만과 채색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노먼 베쑨은 특유의 '해부벽'으로 이 사회나 역사의 환부를 아주 예각적인 메스로 헤집어낸 뒤, 거기에다 자신의 삶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매우 절박한 처방을 가한 '큰 의사'라고 나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