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

2023. 2. 18. 18:58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하나

 

 

 

 

 

나는 그림 그리러 가면 커피부터 한 잔 만들어다 놓고서 시작을 하는데,

그런데 단 한번도 뜨거운 커피를 마셔본 적은 없을 것이다.

미지근한 정도도 아니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중간에 문득 생각이 나서는 후르륵 마셔버리는 식이다. 

오전엔 목원대에서, 오후엔 유성에 있는 화실에 가서 작업을 하는데,

그러니까 식은 커피를 오전 오후에 한 잔씩 마시는 셈이다.

캔버스를 대하고 앉으면 금세 나도 모르게 어제 그리다 만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새 벌써 붓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요샌 음악조차도 듣지 않는다. 그럴 새를 느끼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맘이 조급해져서는 그야말로 그림질 삼매경에 빠져드는 것이다.

 

 

 

 

 

 

 

 

삼매(三昧)


모든 수행은 "알기" 위한 것이다.

知的 알음알이와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認識의 전면적인 전변인 통찰이라는 것이다.

불교 명상수련의 목적은 신통력을 얻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복을 구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신비체험이나 법열을 얻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이차적이며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사성제(四聖諦 -고제, 집제, 멸제, 도제)

삼법인(三法印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열반적정)

연기(緣起)

공(空)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선정수행을 통한 명상적 직관(知見)에 의해 통찰하는 것은 다르다.

즉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일상적 알음알이와 명상수련을 통한 직관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굳이 '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불교적 깨달음이 앎의 깊이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여

깨달음을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경향을 불식하기 위해서이다.

붓다에 따르면

중생의 미망은 좋은 것을 탐하고 궂은 것을 미워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시초는 이렇듯 사소하지만 모든 번뇌와 고통이 여기서부터 유래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분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이러한 분별에 근거하여 일상적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문제는 분별 그 자체가 아니다.

분별없이 어떻게 하룬들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분별이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육근(六根)이 대상을 지각할 때 개입하게 되는 (samskara) 때문이다.

행은 업(業)의 형성력, 업력, 조건 지워진 행위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생이 대상을 지각할 때 그의 경험을 물들이는 경향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생의 경험세계는 업력이 산출한 것이다.

따라서 업력에 오염되지 않는 상태 [三昧]를 얻는 것이 불교수행의 요체이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음사이다.

흔히 마음의 집중, 몰입으로 번역되며,

산란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극히 짧은 순간에도 고요하게 머물러있지 않고 온갖 잡념으로 혼란되어 있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번뇌나 망상, 혹은 분별심 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의식활동 자체인 것이다.

착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중생의 생각은 그 자체로 망상인 것이다.

그래서 공부할 때에는 물론, 심지어 놀고 있는 중에도

대개의 경우 온전히 자신이 하고 있는 동작이나 생각에 몰두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 혹은 다른 대상들에게로 빈번하게 왕래하는 것은

행(行) 내지 업력(業力)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받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찰나에 수 백가지 망상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초기 경전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이가 붓다에게 물었다 :

"당신의 제자들은 매일 한 끼 식사만 하고 의복이나 잠자리가 그토록 거친데 어떻게 얼굴에서 빛이 납니까?" 이에 붓다가 대답했다 :

"나의 제자들은 과거 일을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를 근심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삽니다.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낮의 햇볕에 시드는 갈대와 같습니다.

저들의 얼굴이 빛나는 것은 현재 순간에 살기 때문입니다. ···"

현재 순간에 산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의식을 현재 자신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흔히 독서삼매니 유희삼매니 해서 일상언어로 정착되기도 했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놀이를 할 때 의식이 산란되지 않고 대상에 몰두한다면

그것을 일종의 삼매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재 순간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삶의 형태이다.
삼매를 불교만의 고유한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방법과 이름이 달라도 인류의 다양한 종교전통 속에서 보존되고 있는 모든 실천수행은

궁극적으로 삼매와 관련이 있다.

다만 불교에서는 삼매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과 독특한 실천방법을 체계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 다르다.


불교에서의 삼매,

즉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어느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일체의 모든 사물이 집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호흡을 예로 들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수를 세거나,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현상자체에 마음을 고정시킨다.

이렇게 집중하는 수련을 통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마치 바람이 없는 호수와 같은 상태가 된다.

붓다는 이 수행을 할 때 바로 앞으로 수레 오백대가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삼매에 잠겼다고 전한다.


밀린다팡하』 (해제) 2004.
서정형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그럼 지금 내 삶이 행복한 건가?

 

 

'이런 저런 내 얘기들 > 내 얘기..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실 정리  (0) 2023.07.17
3월 2일 혈액검사  (0) 2023.03.11
누구나 다 이럴거야, 그치?  (0) 2023.01.03
9월 서울 친구들 모임  (2) 2022.10.01
큰일이네, 몸이 이래서야  (0) 2022.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