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20. 21:05ㆍ詩.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목사 10주기를 맞아 3권의 책이 출간돼 눈길을 끈다. 이혼과 암 투병, 큰아이의 죽음 등 시련과 인내로 가득한 시간을 보냈던 이 목사는 2012년 3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열림원)는 지난달 26일 별세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딸 10주기에 맞춰 발간을 계획했던 시집으로, 그의 유고 시집이 됐다. 시집에는 딸을 잃은 고통과 딸을 향한 그리움이 정제된 시어로 담겼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사진처럼 슬픈 것도 없더라 / 손을 뻗어도 다가오지 않는 너’ (‘사진처럼 강한 것은 없다’), ‘세수를 하다가 / 수돗물을 틀어놓고 / 울었다 / 남이 들을까 몰래 울었다’ (‘지금 몇 시지’)
이 전 장관은 소진돼 가는 생의 끝에서 오래도록 이 시들을 모아 정리하고 표지와 구성 등 엮음새를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라는 서문을 출판사에 전화로 남겼다.
‘땅끝의 아이들’(열림원)과 ‘땅에서 하늘처럼’(열림원)은 이민아 목사가 2011년과 2012년에 출간했던 책의 개정판이다. ‘땅끝의 아이들’은 땅끝 아이들의 ‘엄마’로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했던 이 목사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시련과 시험, 그것을 극복하며 보고 들은 깨달음이 담긴 책이다. ‘땅에서 하늘처럼’은 그가 한 기독교방송과 함께 기획한 간증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1년 10월부터 11월까지 진행한 강연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믿음이 있는데 왜 병에 걸리는 것일까’, ‘구원받은 우리가 왜 환난을 당하는 것일까’ 등 크리스천으로서 던지는 질문과 고민이 들어 있다.
서울신문 윤수경 기자
서문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2022년 2월 22일
이어령
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당신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영혼이 있다는 것
사랑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뉘우친다는 것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눔물에 젖은 빵을 먹는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가난을 넘어서는 사랑의 눈물에서만
영혼의 무지개가 뜬다.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
어제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오늘이란 말도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그러나 내일이란 말은 올 來자 날 日자,
한자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말인데,
어째서 내일이란 말만은 한자말로 되어 있을까요
순수한 우리말이 있었을텐데,
어째서 가장 소중한 내일이란 말은 잊었을까요
어째서 가장 희망을 주는 내일이란 말을 빼놓았을까요
(후략)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치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네가 혼자 긴 겨울밤을 그리도 아파하는데
나는 코를 골며 잤나보다
내 살 내 뼈를 나눠준 몸이라 하지만
어떻게 하나 허파에 물이 차 답답하다는데
한 호흡의 입김도 널 위해 나눠줄 수 없으니
네가 울 떄 나는 웃고 있었나보다
아니지 널 위해 함께 눈물 흘려도
저 유리창에 흐르는 빗방울과 무엇이 다르랴
네가 금 간 천장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바깥세상 그 많은 색깔들을 보고 있구나
금을 긋듯이 야위어가는 너의 얼굴
내려가는 체중계의 바늘을 보며
널 위해 한 봉지 약만도 못한 글을 쓴다
힘줄이 없는 시
정맥만 보이는 시를
오늘도 쓴다
차라리 언어가 너의 고통을 멈추는
수면제였으면 좋겠다
민아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 민아야
너무 미안하다.
미국서 검사로 활동하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딸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손자의 사망 질병 등을 겪으면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세례를 받고 신앙을 고백한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를 출간하기도.
81년 김한길과 결혼했지만 86년 이혼.
3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 그리고 김한길과의 사이에서 얻은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아들의 갑작스런 사망과
둘째 아들의 자폐판정과 본인 실명 위기까지 겪고,
위암 투병끝에 53세의 나이로 먼저 간 딸의 이 고백이 ----------- 아버지 이어령의 마음에 평생 상처로 남았죠.
목숨의 깃발
네가 없는 세상
나는 아무데고 간다
성난 코뿔소처럼
무한궤도를 단 장갑차처럼
나는 아무데고 간다
그러다 어디 지쳐 쓰러진 언덕에
내 서러움의 말뚝을 박고
거기 네 찢긴 깃발을 세우겠다
아름답고 찬란한 목숨의 부활.
전화를 걸 수 없구나
죽음이란 이렇게도 명백한 것이냐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것
아이폰이 뭣인가
아이폰 2 아이폰 3
이제는 아이폰 4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어제만 해도 단축키를 누르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전원이 꺼져 있어도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는데
아 전화기가 아무리 스마트해도
너의 단축기 숫자가
무슨 소용이랴
진 전화의 신호음이 허공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바람
(후략)
죽음의 속도계
너를 묻었다 흙 속에 너를 묻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은
차를 세우고
국밥 한 그릇씩 먹었다
진한 눈물이 흘러 들어갔던 목구멍인데
밥과 국물이 넘어가더라
방금 너의 몸에 흙을 뿌린 그 손으로
젓가락질하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주 보며 먹는다
이젠 검은 띠 두른 장례차도 떠나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차를 타고
묘지의 역방향으로 달린다
죽음에도 속도계가 있는가보다
0에서 300킬로까지
대시보드의 스피드 미터 바늘이
점점 높은 숫자를 향해 움직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기 있는데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데
그 사이에 너는 없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너의 찻잔은 없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 정거장에 서 있는데
그 많은 얼굴 가운데 너는 없다
새도 저녁이 되면 둥지를 찾는데
너는 무슨 연유로 저녁 일곱 시가 넘었는데
돌아오지 않느냐.
돈으로 안되는 것
내가 아무리 돈이 많이 생겨도
이제 너를 위해 아무것도 살 수 없다
네가 맛있다고 하던 스시조의 전골도
봄이 올 때까지 방 안에서 걷겠다고
워킹머신 사달라고 하던 것도
(중략)
돈은 벌써 죽었는데
이상하다 사람들은
오늘도 돈 돈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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