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그림' 酷評

2020. 8. 16. 18:26미술/미술 이야기 (책)

 

 

 

잘 못 그린 그림이다.

색은 더럽고 붓끝은 설명만을 좇고 있다.

피아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이 그림은 엉성하기만 할 뿐 그 어디에도 재미의 요소가 없고 선명한 부분도 전혀 없다.

 

르누아르는 오랫동안 그림을 공부했다.

데생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물의 형태는 그릴 수 있다.

구도도정돈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화가의 기쁨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자신의 경험만으로 붓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아니, 나쁘면서도 보고 있으면 지루하다.

모든 것이 설명적이며 축 늘어져 있다.

긴장감이 없다.

 

그림의 느낌은 확실히 부드럽다.

하지만 부드러움은 어딘가에 긴장을 내포하고 있을 때야말로 기분좋게 느껴진다.

그 긴장은 형태의 긴장일 수도 있고, 구도의 긴장일 수도 있고,

색의 긴장일 수도 있고, 작은 붓선의 긴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부드러움'이라는 표어 같은 것이 전제가 되어, 붓은 단순히 그것에 영합해 움직이고 말았다.

르누아르의 이 ㄱ,림에서는

부드러움주의로 인해 화가의 호기심이 증발해버렸다.

아마도 세상이 이처럼 지극히 부드러운 그림을 원했을 것이다.

르누아르는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세상의 바람에 맞추었다.

세상의 바람대로 그림이 완성되고 세상은 절찬한다.

그런 절찬이 르누아르로서는 기분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해서 팽팽한 긴장감 없는 그림들이 점점 늘어간다.

 

화가 자신의 즐거움이 캔버스 위에서 뛰어다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좋은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 법이다.

세살ㅇ 논리에 맞춘 영합은 아무래도 화면에 그애로 표출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지루함이 곰팡이처럼 번지고 만다.

 

 

그나마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보 부분이다.

피아노 전면에 세워놓은 것을 옆에서 그리고 있다. 한 장을 걷으면 정확히 걷힐 듯한 감촉이 있다.

이것만은 조금 청량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단지 이것 하나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세상이 화가에게 들러붙어서

화가가 얼간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세상 자신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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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른이 되면 이것저것 정보를 흡수하게 되고 아무래도 자신만의 확고한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힘들어진다. 보고 있다고는 해도 대개는 타인의 눈, 줘들은 정보를 통해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자신의 눈, 고독한 관찰자의 눈,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느끼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명화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그림을 말한다. 명화가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명화라는 명성에 질린 게 아닐까. 명화라는 명성만 보고 그림은 보지 않은 것이 아닐까.  반대로 명화이기 때문에 본다는 사람들도 있다. '명화이기 때문에' 보는 것 역시 명화라는 명성만 감상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단지 명화라는 이유 하나에 만족하고, 정작 그림은 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