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8. 18:17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그리고 보니까 내가 일본 현대시를 읽어본 기억이 없다.
2015. 4
사과에 대한 고집
- 다니카와 순타로 시와 산문 (詩歷 1952-2015)
책소개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력 63년 기념 선집 『사과에 대한 고집』. 이 책에는 저자의 폭넓은 문학적 여정을 아우르는 육십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데뷔 시집의 '슬픔'에서부터 최신작 '2페이지 둘째 줄부터', '강가의 돌멩이', 그리고 '바람구멍을 뚫다' 등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이뤄낸 문학적 성취와 높은 열의를 밀도 있게 압축하여 한데 엮었다.
이 책은 때론 섬세한 감수성과 담박하고 분명한 어휘로, '방귀 노래'와 같이 맑은 동심을 그린 시에서부터 '(어디)2 교합', '미래의 아이' 등 철학적 고뇌 혹은 실험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시정을 아낌없이 선보인다. 그의 시는 지극히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언어를 선호하여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철학성과 가없는 시적 상상력이 담겨 있다.
저자 다니카와 순타로는 193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52년 데뷔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시작으로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목차
시 詩
1952 ─ 슬픔 9│이십억 광년의 고독 10│네로 사랑받은 작은 개에게 13
1955 ─ 빌리 더 키드 16
1962 ─ 포임 아이 18│오늘의 애드리브 20
1968 ─ 도바1 21
도바3 22
이것이 제 상냥함입니다 23
아침 릴레이 24
1971 ─ 살다 26
1972 ─ 오찬 29
헛들림 Vietnam1969 30
1974 ─ 아버지는 32
1975 ─ 잔디밭 33
사과에 대한 고집 34
1980 ─ (어디)2 교합 36
1981 ─ 방귀 노래 39
1982 ─ 평범한 남자 40
1984 ─ 12월 15일 41
1985 ─ 민들레꽃이 필 때마다 42
해질녘 43
1988 ─ 안녕히 계세요 44
1990 ─ 당신이 거기에 46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 48
11월의 노래 50
1991 ─ …… 51
탄생 52
장딴지 54
1993 ─ 웃다 55
울 거야 57
1995 ─ 지구의 손님 58
1999 ─ 해골 60
2000 ─ 현세에서의 마지막 한 걸음 62
2003 ─ 밤의 미키마우스 64
2005 ─ 부탁 66
책 69
2007 ─ 자기소개 70
안녕 72
어머니를 만나다 소년4 74
2009 ─ 나 태어났어요 76
임사선 78
2013 ─ 시간 88
2페이지 둘째 줄부터 90
강가의 돌멩이 92
미래의아이 94
산문 散文
1968 ─ 자서전적 단편 99
1979 ─ 시인문답 104
1985 ─ 연애는 야단스럽다 111
1994 ─ 장례식에 대하여 116
노망든 어머니의 편지 120
2001 ─ 이십일 세기 첫째 날 125
바람구멍을 뚫다 126
2010 ─ 《혼자 살기》 문고판 후기 130
2015 ─ 한국 독자에게 다니카와 순타로 136
요시카와 나기 139
책 속으로
빨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이 아니라 사과다.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양이 아니라 사과다.
신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맛이 아니라 사과다.
비싼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값이 아니라 사과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가 아니라 사과다.
분류할 수는 없다,
식물이 아니라, 사과니까.
꽃피는 사과다.
열리는 사과,
가지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사과다.
비를 맞는 사과,
쪼아먹히는 사과,
잡아떼이는 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다.
썩는 사과다.
씨앗의 사과,
싹트는 사과.
사과라 부를 필요도 없는 사과다.
사과가 아니어도 되는 사과,
사과이어도 되는 사과,
사과이어도 사과가 아니어도 상관없이 단 하나의 사과는 모든 사과.
_p.34 [사과에 대한 고집]에서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명사가 물에 잠기고
형용사가 썩고
조사가 흐슬부슬 떨어지고
접속사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었다
사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인에게까지 미쳤다
느닷없이 의자 다리가 부러졌으며
이어서 키보드가 녹아버린 데다
머리칼도 타올랐다
아내는 그것을 보자마자 집을 나가고
맏아들의 야뇨증이 재발했다
맏딸은 입을 다물고
이름이 다로太郞인 개가 에스페란토로 짖기 시작했다
애마 ‘라이프’의 내비게이션도 고장났다
_p.90 [2페이지 둘째 줄부터]에서
이십일 세기 첫번째 날 아침, 하늘을 나는 소리개를 향해 소뼈를 던져주었다.
뼈는 헛되이 떨어져 내 왼쪽 발등을 때렸다.
아팠다.
푸른 하늘에 태양이 눈부셨다.
과학자는 진공도 비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동시에 시간도 공간도 없는 ‘무’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써봤자 소용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게 재미있어죽겠다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 있어 이십 세기 최대의 사건은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십일 세기 최대의 사건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되지 않을까.
밤에 해양심층수로 잘못 알고 냉장고에 있던 워커를 병째 마셔버렸다.
덕택에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_p.125 [이십일 세기 첫째 날]에서
출판사서평
일상에서 리듬을 짓고 사소한 틈새로 우주를 길어올리는 일본의 ‘국민시인’ 다니카와 순타로
1952-2015, 시력詩歷 63년 기념 선집
언제부터인가 이름 앞에 으레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애칭이 따라붙는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력 63년을 맞아 기념 선집 《사과에 대한 고집》이 출간되었다. 1952년 강렬한 첫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세상에 선보인 이래, 반세기가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시세계를 변화하고 확장해온 것은 물론, 때로는 원체험으로 회귀하여 다시 출발하는 겸손한 詩作 인생을 걸어온 다니카와 순타로.
데뷔 시집의 [슬픔]에서부터 최신작 [2페이지 둘째 줄부터] [강가의 돌멩이], 그리고 [바람구멍을 뚫다] 등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사과에 대한 고집》에는 그의 폭넓은 문학적 여정을 아우르는 육십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권말에는 老시인이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소박한 인사도 수록했다.
차례 그대로 발표순으로 읽어도 좋고, 유영하듯 자유롭게 즐겨도 좋을 것이다.
시인 신경림의 추천사처럼 “말이 다른 나라의 시가 이토록 재미있고 친근하게 읽히는 경우는 여간해 없을 것”이므로. 한국 독자들 역시 《사과에 대한 고집》을 펼치는 순간 “아무래도 다니카와 순타로가 시인이 되는 것은 지난 생에 이미 결정되었던 일이 아닐까”라던 중국의 문학평론가 티안유안의 찬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의 글
다니카와 순타로 시인의 시세계는 한두 마디로는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이 넓다.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읽으면서 더없이 편하고 재미있다. 말이 다른 나라의 시가 이토록 재미있고 친근하게 읽히는 경우는 여간해 없을 것이다. 시인의 순수한 삶과 거짓 없는 글쓰기를 엿보게 하는 산문들도 감동적이다.
_ 신경림(시인)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를 더 넓은 공간으로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꾸준히 해왔다. 티셔츠에 프린트하기 위해 쓴 시도 있는데, 그 상품설명에는 ‘시는 몸에 걸치는 것으로 더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2010년에는 프레파라트에 문자를 인쇄해서 현미경으로 읽는 시를 간행(?)했다. 2011년에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다니카와谷川’를 출시했는데, 이것은 계곡에 흐르는 강물(즉 다니카와)에 낚싯대를 넣고 시를 낚는 게임이다. 이것들은 다 죽어가는 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지만, 도대체 여든을 넘은 노인의 발상이 아니다. 시인 다니카와 순타로는 마치 끝없이 새로운 장난거리를 탐하는 어린아이처럼 유연하다. 그런데 장난도 참 진지하게 친다.
그럼, 다니카와 상, 앞으로도 지구... 곳곳을 다니면서 시를 퍼뜨려주세요.
_ 요시카와 나기(옮긴이) : 한국 독자에게 [시인에 대하여]에서
대개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누구에게 내어줄 때 떠들썩하게 광고하며 줍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을 따져보지요. 어떤 이는 받는 사람이 자기가 주는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헤아려보고 줍니다. 반면 사과나무나 우주나 신은 늘 아무 조건 없이 줍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도 생명의 본성을 깊이 이해한다면 나무나 신처럼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우주만물의 사랑에 감전된 듯 시인은 자신이 선물로 받은 기쁨과 환희를, 실제로 자기 삶 속에서 나누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양로원에서 그는 치매 걸린 노인들을 섬기는 생활을 한다는군요. 치매노인들을 위해, 그들이 먹고 싶어하는 요리를 주문받아 만들기도 한답니다. 이런 요리 체험에서 영혼의 ‘맛있는’ 부분이라는 아름다운 시구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다니카와 순타로는 ‘영혼의 요리사’란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시인이 아닐까 합니다.
_ 고진하(시인) :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에 대하여
출판사 책소개
경이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현재진행형의 노래
[우주소년 아톰][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작사가로도 친근한
거장 다니카와 순타로! 긴 시력을 망라하는 기념비적 작품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구덩이뿐인 한겨울’ 같은 어둠침침한 사회 분위기와 함께 맵고 날카로운 현실주의 시가 주류를 이루던 일본 시문단에 청년 다니카와 순타로의 등장은 한 줄기 새로운 바람이었다. 1952년 데뷔 시집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발표한 이래 시인 다니카와는 섬세한 감수성과 담박하고 분명한 어휘로, [방귀 노래](p.39)와 같이 맑은 동심을 그린 시에서부터 [(어디)2 교합](p.36-8) [미래의아이](p.94-5) 등 철학적 고뇌 혹은 실험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시정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목욕하며 뽀
남 몰래 스
당황해서 뿌
둘이 같이 뽕
_[방귀 노래]에서
침엽수와의 교합은 몇 번 경험해봤지만 양치식물과의 교합은 처음이었다.
이름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습한 땅 위에서 희미한 바람을 받아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언어를 가지지 않는 생물에게도 어떤 자기표현이 있음을 깨달았다.
_[(어디)2 교합]에서
다니카와 순타로 ≠ ‘근면’형 혹은 ‘노력’형 시인 ≠ ‘단명’형 시인 ≠ ‘조로’형 시인
다니카와 순타로 = (천재 + 근면) × 시인
문학평론가이자 중국 대륙에 다니카와를 처음 알린 번역가이기도 한 티안유안은 시인을 가리켜 다시 없을 찬사를 연발한 바 있다. “다니카와 순타로의 창작활동은 작품 수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근면’형 혹은 ‘노력’형 시인이 아닌 것이다. 또 순간의 재기가 반짝하자 이내 사그라지는 ‘단명’형 시인도 아니다. 쓰면 쓸수록 文才가 닳아없어지는 ‘소진’형 시인도 아니다. 다니카와 순타로가 십대 후반에 동인지 등 잡지에 작품을 게재하고 스무 살에는 정식으로 단행본 시집을 출간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금은 신비주의적 해석일지 모르지만, 그가 시인이 된 것은 어쩌면 지난 생애에 이미 정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1931년 출생, 1952년 첫 시집 출간. 시인의 나이는 차치하고 시력으로만 따져도 환갑이 넘었다. 돌아보면 그간 백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포함해 수천 편의 시를 썼다. 그림책, 번역서까지 포함하면 저서는 이백 여권에 이른다. 하지만 시인 다니카와는 오늘도 온종일 지척에 그리고 잠자리 머리맡에까지 시상이 떠오를 때를 대비해 메모지를 준비해둔다. 즉 천생시인이 근면의 미덕까지 갖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다니카와 순타로의 노래를 여전한 현재진행형으로 누리고 있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지극히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언어를 선호한다. 어쩌면 시를 ‘짓기’보다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깊은 철학성과 가없는 시적 상상력을 선사한다. 특히 방부처리라도 한 듯 시인만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명력은 일본현대시사詩史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한국 독자 여러분, 이웃 시인으로 맞아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_다니카와 순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어깨에 힘을 주기는커녕 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것이 바로 여든이 훌쩍 넘어서도 변함없는 감수성을 가진, ‘젊은 시인’으로서 싱그러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원천이 아닌가 한다.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공구 같은 게 싫지 않습니다
또 작은 것도 포함해서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것들의 명칭을 외우는 일은 서투릅니다
저는 지나간 날짜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권위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_[자기소개]에서
《사과에 대한 고집》은 예순 해가 넘는 긴 시력을 망라해 시인의 깊은 문학적 성취와 높은 열의를 밀도 있게 압축하여 한데 엮은 매혹적인 작품집이다. 방대한 양의 작품을 검토하고 선별하는 데에는 평소 다니카와 순타로의 오랜 팬이자 한일/일한 번역가인 요시카와 나기의 공이 컸다. 가식 없이 소박한 언어의 조합이 얼마나 진한 여운을 남기는지, 그리고 “장소는 다 지구 위의 어느 한 점이고 사람은 다 인류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다니카와 순타로의 시세계가 시대에 따라 우주와 지구를 넘나들며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좇아가보는 것도 이 책을 만나는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또 일도하면서
가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한다
화성인들이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을지도)
하지만 가끔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만유인력은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
우주는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무심코 재채기를 했다
슬픔
(1952)
저 파란 하늘 속 물결 소리 들리는 곳에
뭔가 엄청남 물건을
내가 빠뜨리고 온 것 같다
투명한 과거의 전철역
유실물센터 앞에서
나는 더욱 슬펐다
네로 - 사랑받은 작은 개에게
(1952)
곧 여름이 온다
네 혀
네 눈
네가 낮잠 자는 모습이
지금 내 앞에 뚜렷이 살아난다
너는 여름을 두 번밖에 알지 못했지만
나는 벌써 열여덟 번의 여름을 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여름이나 내 것이 아닌 여름들을 상기하고 있다
메종라피트의 여름
요도淀의 여름 * 淀 얕은 물 정
윌리어스버그 다리의 여름
오랑의 여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인간은 지금까지 몇 번의 여름을 알고 왔는지 하고
네로
곧 다시 여름이 온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있던 여름이 아니라
또 다른 여름
전혀 다른 여름이다
새 여름이 오고
나는 새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것 추악한 것 나에게 힘이 될 것 날 슬프게 만들 것
그리고 나는 물어볼 것이다
무엇일까
왜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네로
너는 죽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먼 곳에 가서
네 목소리
네 감촉
네 마음까지
지금 내 앞에 뚜렷이 살아난다
그러나 네로
곧 다시 여름이 온다
새롭고 한없이 넓은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
새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맞이하고
봄을 맞이하고 더 새로운 여름을 기대하면서
모든 새것을 알기 위해
그리고 내 모든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이것이 제 상냥함입니다
(1968)
창밖의 새잎에 대해 생각해도 돼요?
그 배경에 있는 푸른 하늘에 대해 생각해도?
영원과 허무에 대해 생각해도 될까요?
당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당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당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과 멀리멀리 떨어져
살아 있는 애인에 대해 생각해도?
그게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믿어도 돼요?
그렇게 강해져도 될까요?
당신 덕분에
아침 릴레이
(1968)
캄차카의 젊은이가
꿈에 기린을 보고 있을 때
멕시코 아가씨는
아침 안개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뉴욕에서 잠든 소녀가
미소지으며 몸을 뒤칠 때
로마의 소년은
기둥머리를 물들이는 아침해에 윙크한다
이 지구에서는
늘 어디선가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아침 릴레이한다
경도經度에서 경도로
교대로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잠들기 전 잠시 귀를 기울여보면
멀리서 우는 자명종 소리
그것은 당신이 보낸 아침을
누군가 단단히 받았다는 증거다
오찬 午餐
(1972)
그리고 구름 많은 하늘 아래에도 다시 그 즐거운 점심이 돌아온다.
불행을 견디고 불안을 견디면서 많은 가정이 다시 그 즐거운 점심식사를 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가련하게 즐거운 점심이다.
이혼하는 날의, 태어나는 날의, 졸업하는 날의, 그리고 죽는 날의 낮의 식사다.
멸망할 거라고 알면서 우리가 가련하게 즐기는 시간이다.
어디선가 낮의 왈츠가 들려온다.
흰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는, 그것은 가련하게 즐거운 시간이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여동생도 그리고 잃어진 사람이나 잃어질 시간도 다함께 점심식사를 한다.
나비가 난다. 폭격기가 난다. 어떤 가로수길을 걸었는지.
냉정하게 일하는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도,
병을 앓아 星雲 생각만 하는 사람도 점심식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나도 함께 식탁에 앉으면서 생각한다. 그것은 확실히 점심이라고.
가련하게 즐거운 대낮의 식사라고.
아버지는
(1974)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너와 함께
나는 죽고 싶을 때가 있었다
왜 그러는지
영문도 모르면서
태어난 순간부터
너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너를 동반할 어떤 권리도
나에게는 없었는데
나는 불행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어리석고 그렇게 혼란스럽고
그렇게 방자하고 그렇게 유약하다
내가 강해지는 것은 어린 네가
나를 완전히 믿어주기 때문이다
네가 늘 나를 큰 소리로 부르기 때문이다
사과에 대한 고집
(1975)
빨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이 아니라 사과다,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양이 아니라 사과다, 신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맛이 아니라 사과다, 비싼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값이 아니라 사과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가 아니라 사과다, 분류 할 수는 없다, 식물이
아니라 , 사과니까.
꽃피는 사과다, 열리는 사과, 가지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사과다, 비를 맞는 사과, 쪼아 먹히는 사과, 잡아 떼이는
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다, 썩는 사과다, 씨앗의 사과,
싹트는 사과, 사과라고 부를 필요도 없는 사과다,사과가
아니어도 되는 사과, 사과 이어도 되는 사과, 사과이어도
사과가 아니어도 상관 없이 단 하나의 사과는 모든 사과.
홍옥이다, 국광이다, 오린이다, 이와이다, 기사키가케다,
베니사키기케다* 한 개의 사과다, 세 개의 다섯 개의 한
다스의 7킬로그램이 12톤의 사과다, 200만톤의 사과다,
생산되는 사과, 운반 되는 사과다, 계량되고 포장되고
거래되는 사과다, 소화되는 사과다,
소비되는 사과다, 소멸되는 사과 입니다 사과인거야!
사과인가?
그것, 거기 있는 그것, 그 그것이다, 거기의 그것,바구니 속의
그것, 식탁에서 떨어지는 그것, 캔버스에 그려지는 그것,
오븐으로 구워지는 그것이다,아이는 그것을 손에 잡고
그것을 베어 먹는, 그 그것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아무리
썩어도 잇다라 가지가지에 열려 반짝이면서 얼마든지
가게에 넘치는 그것,무엇이 레플리카? 어느 시대의
레플리카?
대답 할 수는 없다, 사과다, 물어 볼 수는 없다, 사과다, 말 할 수는
없다, 결국 사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 홍옥, 국광, 오린, 이와이, 가사키가케,베니사니가케 모두 사과의 품종
(어디) 2 _ 교합
(1980)
침엽수와의 교합은 몇 번 경험해봤지만 양치식물과의 교합은 처음이었다.
이름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습한 땅 위에서 희미한 바람을 받아 고개를 흔드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언어를 가지지 않은 생물에게도 어떤 자기 표현이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 같은 마음은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뚜렷한 모습으로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양치의 '자기자신'이 아닐까.
다른 어떤 식물이나 동물과도 형태가 달라, 양치는 더없이 외로워 보였다.
나는 그 잎을 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감촉은 나에게 아무런 연상도 일으키지 않았다.
잎을 만져봐도 나에게 어떤 묘사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때 나는 그것 이외에는 무엇도 하지 않았으며,
내 기관이 내가 아닌 다른 개체의 기관과 접촉하고 있다는 의식 이외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편안함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분명한 감각이 손끝에서 전해졌다.
그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양치 잎에 손가락을 댄 채 위를 향해 땅에 누웠다.
그 일대에 두껍게 깔려 있는 낙엽과 그것에 닿은 내 옷을 통해
토양의 온기와 습기가 내 엉덩이 피부에 전해졌다.
순간 손끝의 감각이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내 몸 깊은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 흐름은 손끝에서 어깨를 거쳐 목구멍에 닿은 후 척수를 따라 아래로 가고
거기서 소용돌이치듯 고였다가 엉덩이 피부를 통해 땅으로 빠져나갔다.
그후 양치는 그 흐름을 자신의 뿌리로 빨아올려 잎 끝에서 내 손가락으로 돌려주었다.
양치와 나 사이에 하나의 회로가 형성된 것이다.
감각의 흐름은 원을 이루고 정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차츰 빨라지고 있었다.
그 가속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나의 그리고 양치의 욕망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내 몸속에 있는 내가 아닌 존재가 '더, 더'하고 소리 없이 외쳤다.
나는 양치 잎에 손가락을 댄 채 어색하게 초조해서 아랫도리를 벗었다.
벌거벗은 엉덩이가 낙엽에 닿자마자 양치와 나를 연결하는 감각의 흐름은 어지러울 만큼 속도를 올렸다.
이재 손가락을 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위도리를 걷어부치고 엎드려서 벌거벗은 가슴으로 양치 위를 덮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질어질한 감각의 흐름은 없었다.
몸을 일으키니 아랫배에 낙엽이 찰싹 달라붙었다.
내 양치가 내 몸 바탕에 뭉개져 초록이 그전보다 훨씬 진하고 또 탁했다.
잎 가장자리의 톱니는 무디어지고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똑깉은 생명체인데도 우리는 다른 종인 것이다.
가슴 피부에 불쾌한 가려움증이 퍼졌다.
당신이 거기에
(1990)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 지루한듯이
오른손엔 담배 왼손에 화이트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들고
방에는 사람이 삼백 명이나 있었는데
지구에는 오십억 명이나 있는데
거기에 당신이 있었다 혼자서
그날 그 순간 내 눈 앞에
당신의 이름을 알고 직업을 알고
그리고 무 요리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이차방정식을 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그것을 웃어넘기고
같이 노래방에 가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친구가 되었다
당신은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아주었다
내 자랑을 들어주었다 세월이 가고
당신은 내 딸 생일에 오르골을 보내주고
나는 당신의 남편이 키핑한 위스키를 마시고
내 아내는 늘 당신에게 질투했다
우리는 친구였다
진정한 만남에 헤어짐은 없다
당신은 여전히 거기 있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면서 나에게 되풀이해서 말을 건다
당신과의 추억이 나를 살린다
너무 이른 당신의 죽음조차 나를 살린다
처음 당신을 본 날부터 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
(1990)
하느님이 땅과 물과 햇빛을 주고
땅과 물과 햇빛이 사과나무를 주고
사과나무가 빨갛게 익은 열매를 주고
그 사과를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부드러운 두 손으로 감싸서
마치 세계의 기원 같은
아침 햇살과 함께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당신은 나에게 오늘을 주고
잃어지지 않을 시간을 주고
사과를 가꾼 사람들의 웃음과 노래를 주었다
어쩌면 슬픔까지도
우리 위에 펼쳐진 푸른 하늘에 숨은
그 정처 없는 것을 거슬러서
당신은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나에게 주었다
장딴지
(1991)
내가 그저께 죽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였다
놀랍게도 내가 생전에 전화받기도 싫었던 그 놈이
새하얀 벤츠를 타고 와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다
내가 그저께 죽었는데도
세계는 망할 기미조차 없다
중의 가사가 겨울 햇살에 반짝이며
이웃집 초등학교 5학년 녀석은 내 PC로 놀고 있다
어, 선향 냄새가 이렇게 좋았나
나는 그저께 죽었으니
이제 오늘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덕택에 의미가 아닌 것을 잘 알 것 같다
좀 더 집요하게 반길 걸
그 사람의 장딴지를
안녕
(2007)
내 간장이여 안녕
신장 췌장도 이제 이별이다
나는 지금 죽을 건데
곁에 아무도 없으니
너희에게 인사한다
오랫동안 나를 위해 일해주었지만
너희는 이제 자유다
어디든 떠나라
너희와 헤어지면 나도 완전 가뿐해진다
영혼만 남은 맨 얼굴이다
심장이여 조마조마 두근두근 성가시게 했다
뇌수여 부질없는 일을 생각하게 했다
눈 귀 입도 자지도 고생 많이 시켰다
모두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너희 덕택에 살았던 거니까
그렇지만 너희 없는 미래는 밝다
이제 나는 나에게 미련이 없으니
서슴지 않고 나를 잊어
흙에 녹고 하늘로 사라져
말없는 것들과 한패가 될 것이다
나 태어났어요
(2009)
나 태어났어요
드디어 여기 왔어요
눈은 아직 안 보이고
귀도 들리지 않지만
난 알아요
여기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내가 웃는 것을 내가 우는 것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언젠가 내가
여기를 떠날 때를 생각해서
나는 지금 유언을 남길게요
산은 언제나 높았으면 좋겠어요
바다는 언제까지나 깊었으면 좋겠어요
하늘은 언제까지나 푸르고 맑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은 여기 왔던 날의 일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임사선(臨死船)
(2009)
모르는 사이에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었다
제법 붐빈다
늙은이가 많지만 젊은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아기의 모습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혼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남녀도 있다
저승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이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니 더없이
편하다
하고 생각했으나 왠지 허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른다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문득 위를 올려다봤더니 여기에도 하늘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가을 늦은 오후의 빛이다
바랜 청색을 아련한 주황색이 베일처럼 덮고 있다
깰 것 같으면서도 깨지 않는 꿈같다
배는 낮고 고풍스러운 기관음을 내며 달린다
저승이 아직 멀었나
옆에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게 저승과의 사이에 있는 강인가요?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바다 같군"
하긴 건너편 강기슭이 안 보인다
그런데 수평선도 안 보이는 것은
하늘과 물이 한 장의 천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 어디선지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여보!" 한다
울고 있는 모양이다
귀에 익은 소리다 싶더니 마누라 목소리였다
이상하게 요염해서
안고 싶어졌다 몸은 이제 없을텐데
두리번거려서 마누라를 찾았다
바로 옆에 있었지만 모습이 귀신처럼 희미하다
손을 잡아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대신 그녀의 마음은 손바닥을 보듯 환히 알겠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은 좋은데
생명보험이라는 타산이 작용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마누라 울음소리를 들어도 죽었다는 실감이 없고
살아 있었을 때의 연장 같다
하긴 생전에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그때부터 벌써 죽어가고 있었던 걸까?
뚜 하고 멍청한 소리로 기적이 울렸다
새 떼가 배 위에서 원형을 이루면서 춤춘다
그들은 아직 고이 잠들지 못하는 영혼이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
새가 되어버리면
먼저 죽은 친척이나 친구들과 이야기도 못하잖아
아니면 여기서 사람의 말은 쓸모가 없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나를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이 울려든다
다섯 살 때 죽은 동갑내기 이웃집 여자아이다
"엄머 아직 안 와
여기 꽃들은 전혀 안 죽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데
상대방이 다섯 살 때 그대로라 곤란하다
이 배는 어디로 가? 라고 해도
만날 뭐 해? 라고 해도
밤에는 별이 보여? 라고 해도
'몰라' 하는 마음이 어렴풋이 전해질 뿐
뒤늦게 공연히 슬퍼지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는 슬픔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과 헤어졌을 텐데
죽기 전까지는 괴롭고 힘겹던 단단한 응어리가
지금 차차 풀리고 있다
이게 끝인지 시작인지
향기 좋다 잊을 수 없는 향기가
마음속에 곧장 들어온다
예전에 바이올리니스트인 애인이 있었다
끝난 후에 눈 앞에서 연주해주었다 알몸으로
가늘게 구부러지는 마이올린 소리와 그녀의 향기가
한데 섞여 피부에 스며들었다
까닭도 모르게 그때
나에게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음을 느꼈다
돌연 스크루가 역전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멈추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다 먼지투성이의 야전복 차림이다
아직 수류탄을 손에 든 놈까지 있다
한 놈이 느닺없이 웃으며 묻는다
우리 죽은 겁니까?
왠지 바람이 몸속을 부는 것처럼 시원해요
그러면서 동료와 농담을 주고 받는데
그 웃음소리를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들은 것 같다
짙은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배는 다시 덜거덕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배가 내려다보이더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해서 얼굴이 되었다
창백하고 다박수염이 난 내 얼굴이다
거울에서 눈에 익은 얼굴인데 암만해도 남 같다
보고 있는 나도 진짜 나인지 분명치 않다
웃어넘기려고 하면 얼굴이 굳는다
내가 경험하는데도
남의 일 같은 이 느낌, 확실히 그 전에도 있었다
고등학샹 때 죽으려고 학교 옥상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앞으로 가면 나를 지워버릴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지울 수 있을까?
내가 만화의 조연처럼 느껴져서 계단을 내렸다
술을 마시면서 그런 것을 토론한 적도 있었다
다들 젊어서 죽음은 아직 농담 같았다
몸이 없어진 다음에 남는 '나'란 뭐냐?
미와가 말하자 오쿠무라가 의식이라고 대답하고
쇼지가 뇌가 없어지면 의식도 없겠지라고 말했고
데이는 어쨌든 죽으면 알 거라고 말했다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갑판 위에서 빨아냈다
그리고는 가슴이 죄어드는 것처럼 아팠다
강렬한 빛에 눈이 아찔했다 병원의 하얀 침대 위다
"여보, 여보!" 또 마누라다
내버려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싸구려 향수 냄새는 무척 반갑다
내가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전까지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는데
염라대왕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온몸이 비명을 내지른다
다시 몸속으로 돌아와버렸나
기쁜지 괴로운지 모르겠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산맥 능선 따라 느릿하게 흐르더니
누군가가 부친 소식처럼 여기까지 온다
심한 아픔 속에 음악이 물처럼 흘러온다
어릴 때 늘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아아 너무 미안했다
아무 맥락 없이 간절한 마음이 회오리바람처럼 생겼다
누구한테 무엇을 한 것이 기억난 게 아니지만
그저 몹시 사과하고 싶었다
사과하지 못하면 죽지 못함을 알았다
어떡하면 되는지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선율이 보이지 않는 실처럼 꿰매어 잇는 게
이승과 저승일까
여기가 어딘지 이제 모르겠다
어느덧 아픔이 가시고 외로움만이 남았다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음악에 의지하면서 걸어걸 수밖에
2페이지 둘째 줄부터
(2013)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명사가 물에 잠기고
형용사가 썩고
조사가 흐슬부슬 떨어지고
접속사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었다
사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시인에게까지 미쳤다
느닷없이 의자 다리가 부서졌으며
이어서 키보드가 녹아버린 데다
머리칼도 타올랐다
- 후략 -
시간
(2013)
긴 복도의 벽에 걸린 검은 구식 전화기
전화선은 거기서 지붕밑을 지나 처마 끝의 애자로
그리고 자갈길에 선 전봇대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흐느낌은 바다를 건너
황무지를 가로지르고 국경을 넘어 나에게 닿았다
이야기는 그때 이미 끝났던 것이다
후회의 괴로움은 대본에 없는데
그 사람이 있던 새너토리엄의
넓은 잔디와 바다로 이어지는 솔밭은
이야기를 버려두고 간 詩 속의 풍경
- 후략 -
책
(2006)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벌써 책이 되고 말았으니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려고
책은 자신을 읽어보았다
'솔직히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고
검은색 활자로 쓰여 있다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했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
책은 책으로 있는 게
조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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