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25. 18:53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책 편집이 이상하군요. 아니 교정을 대충 봤는지
어디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줘와서 생각 없이 짜깁기를 한 것처럼
같은 내용, 같은 표현이 중복 게재 되어 있는 게 눈에 많이 띕니다.
어쨌거나 처음 들어보는 디테일한 내용들이 꽤 있는데,
과연 사실일런지...... (진짜 같긴 합니다.)
껀수별로 고흐에 대해서와 고갱에 대해서를 대비해 가며 썼습니다.
책은 재밌습니다.
2018. 6. 30
책소개
20개의 키워드로 비교한 고흐와 고갱의 시선과 관점
고흐와 고갱은 왜 탈진하도록 싸웠는가?
반 고흐와 폴 고갱의 공동 작업을 중심으로 두 화가가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친 책.
1세대 큐레이터 박우찬 미술평론가는 신작 《고흐의 눈 고갱의 눈》을 통해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양 미술사에 크고도 강렬한 변화를 일으킨 반 고흐와 폴 고갱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한다.
저자는 전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반 고흐와 증권 브로커 출신의 폴 고갱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반대로 대립하는 지점에 주목했다. 반 고흐와 폴 고갱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천사와 악마의 그것처럼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자신도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면서도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도움을 주던 반 고흐와 세계 대공황이 닥치기 전까지 증권 브로커로 활동하면서 세속적이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폴 고갱의 대립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게 달랐던 두 예술가는 시시각각 충돌했고 매 순간 대립했다.
이 책은 가난한 무명 화가 두 명의 삶 전체와 주변 인물들까지 조망하면서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유명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또한 책 후반에는 반 고흐와 폴 고갱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된 모더니즘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게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박우찬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중앙대학교대학원에서 문화정책 전공. 예술의전당 큐레이터, 대구시립미술관건립전담관, 안산문화예술의전당 학예연구사 등 역임. 경기대, 용인대, 서울산업대, 수원대, 한성대, 중앙대, 계원조형대, 성신여대 등 강사역임. 현재,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저서 '서양미술사 속에는 서양미술이 있다', '전시 이렇게 만든다', '머리로 보는 그림 가슴으로 느끼는 그림', '한국미술사 속에는 한국미술이 있다', '전시연출 이렇게 한다', '미술은 이렇게 세상을 본다', '한 권으로 읽는 청소년 서양미술사', '재미있게 읽는 어린이 서양미술사', '달리와 이상한 미술', '피카소의 세계로', '서양미술의 장르', '사과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해주겠다' 등.
주요 기획 전시로 예술의전당미술관 개관기념전, 열정의화가 김흥수전, 칸딘스키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교과서 미술전, 밤의 풍경전, 마이크로 월드, 헤르만 헤세전, 거장의 숨결전 등이 있다.
목차
서문
_ 고흐의 눈 · 고갱의 눈, 그들은 왜 탈진하도록 싸웠나?
제1부 만남과 이별
1. 아마추어 화가
2. 뒷골목의 화가
3. 첫 만남
1887년 11월 고흐와 고갱은 파리의 한 화랑에서 만났다. 고흐는 고갱의 시적인 그림에 깊이 매료되었고 고갱도 고흐에게 관심을 표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갱은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관심이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그림을 교환했다. 고흐는 파리에서 그린 두 점의 해바라기를 고갱에게 주었고,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풍경화 한 점을 주었다.
4. 재회
5. 갈등
6. 이별
제2부 고흐의 눈, 고갱의 눈
1. 거리의 여인 vs 유한마담
2.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vs 버림받은 아이
3. 검은 옷의 여인 vs 부정한 여인
4. 수도승 vs 장 발장
5. 단골 술집 vs 악의 소굴
6. 아를의 여인 vs 뚜쟁이 여인
7. 흡혈귀 vs 돈벌레
8. 소크라테스 vs 술주정꾼
9. 마리아 vs 촌 아낙네
10. 시인 vs 사티로스
11. 고대 로마의 유적지 vs 더러운 남부의 구덩이
12. 붉은 포도밭 VS 인간의 고뇌
13. 미치광이 vs 음모가
14. 해바라기의 화가 vs 해바라기 그리는 고갱
15. 일본화 같이 그리고 싶다 vs 페루에서 온 일본인
16. 로맨티스트 vs 호색한
17 노동자화가 vs 귀족화가
18. 귀를 자른 고흐 vs 머리를 자른 고갱
19. 고흐의 무덤 vs 고갱의 무덤
20. 닥터 가셰 vs 타히티 여인들
제3부 모방과 표현
1. 모방에서 표현으로
2. 고흐와 고갱에서 추상미술까지
부 록
반 고흐 연표, 폴 고갱 연표
책 속으로
흔히들 사람들은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이라는 말로 고흐와 고갱을 부른다. 선한 고흐, 악한 고갱은 1888년 11월, 고갱이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담 삼아 한 말인데, 그 말이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고흐와 고갱을 구분할 때 사용하게 될 줄은 고갱도 몰랐을 것이다.
-p.4 ‘서문’ 중에서
전도사직을 박탈당한 고흐는 평생의 희망이 좌절된 충격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집과의 연락을 끊은 고흐는 탄광촌에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그를 짓누르는 가장 큰 고통은 “뭔가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도사 일을 빼앗긴 지금 도대체 무슨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불현듯 고흐의 뇌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에게 화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림으로 그려 전하는 사람이었다. 1880년(27세), 보리나주 탄광촌에서 고흐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p.18~19 ‘아마추어 화가’ 중에서
고흐는 행여 고갱이 노란 집에 실망해 빨리 떠날까 봐 노란 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라마르틴 광장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고갱의 방을 배정하고, 바닥에는 고갱이 좋아할 고급스런 카펫을 깔았다. 최대한 그의 취향을 고려하여 고갱의 방을 장식하였다.
-p.45 ‘재회’ 중에서
어린 시절, 고갱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옷 수선 일을 하며 어린 고갱과 마리를 양육했다. 어려운 경제 환경과 생활환경으로 그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다. 고갱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지만 포기하고 선원이 되었다.
-p.87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VS 버림받은 아이’ 중에서
사람의 특성을 꿰뚫는 고갱의 예리한 눈은 지누가 숨기고자 하는 그의 정체를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지누가 이런 표정으로 고갱의 모델을 서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누의 이 표정은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 첫날, 지누에게서 받은 인상이었을 것이다.
-p.134 ‘흡혈귀 VS 돈벌레’ 중에서
출판사서평
가난한 두 명의 무명화가, 세계 미술사를 바꾸다!
- 고흐와 고갱의 비슷한 꿈, 다른 생각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무명의 가난한 아마추어 화가였던 두 사람이 각각 꿈꾸고 있던 ‘화가 공동체’에서 출발했다. 고흐의 화가 공동체는 화가들이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여 팔고, 그 수입금을 공동생활과 작업에 다시 사용하는 방법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반면, 고갱은 후원자로부터 기금을 후원받아 화랑을 세운 후, 화가들에게 작품을 기증받고, 기증한 작가는 무료로 화랑에서 전시 판매하는 상업적인 형태의 예술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이처럼 출발 지점부터 서로 달랐던 고흐와 고갱의 ‘화가 공동체’에 대한 꿈은 서로의 각기 다른 필요성 때문에 아를에서의 동거를 시작했다. 고흐에게는 자신의 꿈에 동참해줄 동지이자 동료인 고갱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러나 여관비를 내지 못해서 작품까지 압류당한 처지였던 고갱은 고흐 형제가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자신의 작품까지 팔아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마지못해 고흐의 제안을 수락했을 뿐이었다.
고갱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고흐는 행여 고갱이 노란집에 실망해 빨리 떠날까 봐 노란집의 내부를 장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라마르틴 광장이 보이는 전망 좋은 방으로 고갱의 방을 배정하고, 바닥에는 고갱이 좋아할 고급스런 카펫을 깔았다.
고갱을 고상한 시인이라고 생각한 고흐는 [시인의 정원 the Poet’s garden(1888)] 연작과 [해바라기] 그림들로 고갱의 방을 장식했다.
- 60일간의 동거, 파국으로 끝을 맺다
이런 고흐의 애정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고갱은 아를에 도착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아서 고흐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과 예술관으로 격렬하게 다투기 시작하였다. 공동생활이 2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두 사람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1888년 12월, 고갱이 머지않아 아를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고흐는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고흐의 정신분열증 증세가 나날이 악화되는 가운데 고흐와 같이 지내는 일은 고갱에게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운명의 12월 23일, 고흐와 고갱이 공동 작업을 시작한 지 꼭 두 달째가 되던 날 밤, 고갱과 다툼이 있고 난 뒤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잘라냈다. 사건 다음 날, 고갱은 간단한 경찰의 조사를 받은 후 도망치듯 아를을 떠났고 고흐는 아를의 시립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고흐와 고갱의 이별의 의미는 서로 달랐다. 고갱에게 고흐와의 이별은 단순한 헤어짐에 불과했다. 반면 고흐에게 고갱과의 이별은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예술 공동체라는 꿈의 종말이었다.
고흐가 정신분열증 속에서 자신의 귀까지 자른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견디기 힘들었던 고갱과의 이별이 자리하...고 있었다.
-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고흐의 ‘눈’ vs 고갱의 ‘눈’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 파국을 맞은 가장 큰 이유는 전혀 다른 성장 배경에 의해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벽하게 달랐던 두 사람의 성격과 세계관의 차이에 있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고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리의 여성 시엔과 사랑에 빠지고 그를 돌보았다.
반면 아버지 없이 페루에서 자랐던 고갱은 후견인의 도움으로 베르탕 은행에 취직한 뒤 중산층 출신 덴마크 여성 소피 가트와 결혼해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같은 출신 성분과 자라난 환경, 타고난 성격의 차이로 인해서 고흐와 고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동작업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고흐에게 유일한 친구인 조셉 룰랭과 술을 즐겨 마시던 아를의 ‘밤의 카페’는 자신이 쉴 수 있는 단골 카페였다. 그러나 고갱의 눈에 비친 ‘밤의 카페’는 술꾼과 접대부들로 가득한 ‘악의 소굴’에 불과했다.
밤의 카페를 운영하는 지누 부인은 고흐에게는 지혜롭고 교양있는 중년 여인으로 보였지만 고갱에게는 술꾼들의 피를 빠는 뚜쟁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아를 역에서 근무하던 집배원으로 고흐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조셉 룰랭에 대한 평가도 극명하게 달랐다.
고흐에겐 자신을 포함해 가족 전부가 기꺼이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조셉 룰랭은 책임감 있는 이상적인 아버지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었다. 반면 고갱의 눈에 비친 룰랭은 카페에서 밤새 술이나 마시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했다.
생활방식도 두 사람은 확연하게 달랐다. 수도승처럼 검소했던 고흐는 거울이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물건일 정도로 늘 가난하게 살았다. 최고의 사치가 담배였고 군화 같은 작업용 신발만을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고흐는 늘 농민 화가를 꿈꿨으며 자신을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흐의 취미는 독서, 편지쓰기, 논쟁, 산보였다. 그러나 “예술은 원래 귀족주의일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고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실직하기 전까지 부유한 중산층으로 살았던 고갱의 취미는 악기 연주, 펜싱, 시 낭송과 같은 귀족적인 것들이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눈’을 가진 고흐와 고갱의 작품은 당시 기성의 미술 화풍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 서로가 서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다
고흐와 고갱의 공동 작업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지만, 둘의 예술세계와 그들의 작품 이라는 세계 미술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고갱은 그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작업을 하였다. 우리는 분명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고흐는 고갱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고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 [시인의 정원]과 같은 걸작들을 그려냈다.
고흐는 고갱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그렸고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또 고흐는 고갱의 영향으로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고갱은 애써 고흐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고흐에게서 감정을 담아 강렬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하였으며, 자신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굳건히 다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아울러 이들의 공동 작업은 19세기 후반, 사진의 출현으로 위기에 빠진 미술을 구하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길을 닦는데도 영향을 미친다. 고흐와 고갱의 예술은 1905년 야수파(Fauvism), 1910년 표현주의( expressionism), 1916년 다다이즘(Dadaism), 1925년 초현실주의(Surrealism), 그리고 최종적으로 비기하학적 추상미술(Non Geometrical Abstract Art)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탄생에 기여했다.
고흐, <두 개의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188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움 소장
고갱은 고흐의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고흐의 작품과 교환하기로 했다. 고흐는 최근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 두 점을,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풍경화 한 점을 서로 교환하였다. 2대 1로 바꾸었지만 고흐는 고갱 같은 위대한 화가와 작품을 맞바꾼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었다.
고갱, 자화상 -「레 미제라블」1888년 반 고흐 미술관
고흐, 「폴 고갱에게 헌정한 불교적 자화상」 1888년 매사추세츠 포그미술관
1888년 8월, 고흐는 고갱으로부터 10월에 아를에 오겠다는 확실한 답변을 들었다. 10월까지 기다리기에 조급증이 났던 고흐는 고갱에게 각자의 자화상을 그려 교환하자고 하였다. 수도승과 장발장은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폴 고갱의 '밤의 카페'(1888, 캔버스에 유채, 72×92㎝,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1888,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고갱에게 지누 부인은 시골 술집을 운영하는 뚜쟁이에 불과했다. 처음 고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드러내놓고 표현은 않았지만 고흐는 지누부인을 이렇게 표현한 것에 분개하였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이후 고흐와 고갱의 갈등이 심해졌다.
고갱은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포착하는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단 감추고 싶은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보는 사람을 기분나쁘게 한다는 점이다.
고흐는 고갱이 남기고 간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 그림을 그려서 고갱에게 보냈다. 1890년 5월, 그림을 전달받은 고갱은 이 그림을 칭찬했는데, 그림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고흐의 떡칠하듯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고갱이 강조하는 규칙적인 붓질로 농도를 얇게 칠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떼문이었다.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나는 고귀함, 아름다움, 고상한 취향, 지나간 그 시대가 앞세웠던 고결한 의미를 사랑한다. 나는 예의범절, 정중함, 심지어는 루이 14세조차 사랑한다. 나는 귀족주의자다. 예술은 원래 소수의 귀족주의일 수밖에 없다." -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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