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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20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 쿠툼상에서 골푸번장(2130M) 가는 길의 풍경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여덟 번 째 날



어제의 사납던 날씨를 보상이라도 하듯 아침에 눈을 뜨니 파랗게 개인 하늘이 활짝 펼쳐져 있었어.

기분이 얼마나 상쾌하던지, 사람의 기분이 이렇게 날씨에 좌우될 수도 있구나 싶네.

서둘러 뒷산에 올라가 동쪽 히말라야의 능선들을 감상하고 내려와 아침을 먹고 7시부터 걷기 시작했어.

타레파티에서 마긴고트(3220m)까지 가는 길은 꼭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지리산 능선길을 연상케 해.

어디를 둘러봐도 장쾌하게 펼쳐진 산등성이들과 넓지도 좁지도 않게 알맞게 어여쁜 능선길….

새들의 부산스러운 몸짓과 나뭇가지 위의 눈뭉치들이 햇살에 녹아 툭툭 떨어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아침숲을 천천히 걸었어.

마긴고트에서 쿠툼상(Kutumsang 2470m)까지는 계속 내리막이었는데 이 길 전체가 또 랄리구라스 숲이야.

지금까지의 ‘꽃터널’과는 정말 규모가 다른 거대한 숲이었지.

지나가는 트레커들마다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느라 속도가 느려지곤 했어.

쿠툼상에 도착하니 12시.

더 갈까 여기서 머무를까 망설이다 결국 나마스떼 호텔에 짐을 풀었어.

어제 만난 홀란드 친구들이 이 호텔의 ‘핫 샤워’는 정말 뜨겁다고 강조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어.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씻는 즐거움을 맛 봤으니까.

그동안 밀린 빨래까지 다 해서 널어놓고, 테라스에 나와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지금.

어디선가 마을 아낙네들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햇살에 달구어진 뺨을 식혀주는 오후.

문득 살아있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고 감사한 순간이야.

내 얼굴로 달려드는 이 파리떼들만 없다면 감동의 깊이가 달라질 텐데….

아, 졸려서 안 되겠다. 한숨 자고 와서 또 쓸게.

그 사이 숙소에 미국인 한 사람이 들었어. 낮잠 자다가 이 사람 코 고는 소리 때문에 깼어!

지난 석 달간 네팔에서 처음 만난 미국인이야.

미국정부가 네팔을 ‘여행 위험 국가’로 분류해 놓아서 이곳에선 미국인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





▲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의 다정한 오후. 치소파니(2215M)  

ⓒ 김남희



이 친구 다니엘은 올해 마흔 두 살인데, 생긴 모습으로 일단 사람을 위협해.

덩치는 산만해서 머리와 수염은 되는대로 기른 장발이지,

옷차림도 ‘프론티어’ 정신을 그대로 구현한 데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선한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거든.

인상 험악한 사람을 보면 움츠러들기부터 하는 나인지라 당연히 고개만 까딱하고 말을 걸지 못했어.

다니엘이 내게 말을 걸어온 건 내 책의 표지를 봤을 때였어.

“이거 ‘운디드니에 나를 묻어주오’ 맞지?” 하며 묻는 거야.

“맞아. 너도 읽었니?”라고 물으니

“그럼, 몇 번을 읽었어. 정말 좋은 책이지.”라고 답하는 거야.

그렇게 다니엘과의 대화가 시작됐어.

다니엘은 92년부터 97년까지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강사를 했대.

 한국말은 못 하지만 한국에 관해서도 꽤 알고, 한국음식도 사랑해서 네팔에 온 후 벌써 한국식당을 세 군데나 찾아갔대.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친구가 지난 25년간 피워오던 담배를 6개월 전에 끊었고,

20년 가까이 애용해 온 마리화나 역시 3개월 전에 끊고, 지금은 술을 끊으려고 하는 중이라는 거야.

 “난 내 몸을 정화하러 네팔에 왔어”라며.

그토록 애용해온 담배와 약과 술을 이 친구가 어떻게 끊을 결심을 했는지 알아?

지난 3년간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에티오피아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느날 이 친구가 그러더래. “넌 지난 20년간 술, 담배, 약을 하면서 살아왔으니 앞으로의 20년은 그것들 없이 살아보는 건 어때?

새로운 경험이잖아?”

다니엘에게는 이 한 마디가,

술, 담배, 약이 신체와 정신에 미치는 온갖 부정적인 영향을 논하면서 끊기를 요구하는 긴 말들보다 훨씬 명확하고 설득적이었대.

그래서 바로 끊은 거래.

“그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어때?”라고 물으니

“우선 그 새 몸무게가 10킬로그램 늘어서 좀 부담스러워.

그리고 아직은 솔직히 내가 이것들(술, 담배, 약) 없는 세상을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라며 웃어.

자기가 즐겼던 건 술, 담배, 약을 통해 얻는 위안이나 효과보다는

 그것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 문화 자체였는데,

이제 자기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잃는다 생각하니 좀 두렵기도 하대.





▲ 보름을 지나 이우는 달이 뜬 타레파티(3510M)의 새벽.  

ⓒ2004 김남희



마리화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니엘은 완전히 ‘약박사’야.

코카인, 헤로인, 아편, LSD, 하시시 안 해 본 약이 없고, 각각의 약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제조 과정부터, 원료, 효과와 증상 및 각각의 차이점과 부작용까지 일목요연하게 강의를 해 주는데,

그 깊이와 수준이 거의 감동적이야.

다니엘의 주장에 따르면 마리화나 같은 ‘소프트 드럭’이 불법인 건 여러 가지 사회, 정치적인 이유가 있대.

첫째는, 담배는 재배하기가 어렵지만

마리화나나 아편은 누구나 온도만 맞춰주고 씨만 뿌리면 쉽게 기르고 수확할 수 있어서

 담배제조업자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거지.

둘째는 아무래도 약을 사용하다 보면 불규칙한 생활을 하기 쉽고, 게을러지기가 쉽기 때문에

기업가들에게도 위협이 된대. 물론 사회, 정치적으로도!

셋째는 절제하지 않으면 자꾸 더 강한 효과의 약을 찾게 되는 중독성의 위험 때문인데, 이건 사소한 부분이래.

실제로 중독성만 따지고 들자면 담배나 술이 마리화나보다 더 강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

다니엘의 경우는 장기간에 걸친 마리화나의 복용으로 폐의 고통이 심해지고, 청력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기억력이 급격히 감퇴하더래.

어느 날부터 당구를 치면 자기 공이 무슨 색깔인지 헷갈리고,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할 땐 연장을 가지러 장비실에 들어갔다가 뭘 가지러 왔는지를 잊어버려 돌아 나오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 거야.

이러다가는 좋아하는 체스를 두다가 자기 말이 흰색인지 검정인지도 매번 물어야 하는 사태가 생길까 겁이 날 정도였대.

그럴 즈음에 여자친구의 한 마디가 그의 뇌리를 흔든 거지.

앞으로 술은 가끔씩 친구들과 할 지 몰라도 담배와 약만은 다시 안 할 거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다니엘은 다방면에 아는 것도 많고, 세상을 보는 눈도 꽤 날카롭고 비판적이야.

그러면서도 친구와 우정과 여행을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구.

이 친구 여행일지가 얼마나 예쁘게(직접 그린 그림과 오려붙인 사진들로 가득 차 있어) 만들어져 있는 지 보면 깜짝 놀랄 걸!





▲ 아침 산들을 바라보고 있는 다정한 연인. 마긴고트(3220M) 가는 길.  

ⓒ2004 김남희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미국이라는 나라와 제 3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미국인들-주로 내가 만난-은

왜 이렇게 주류사회에서 벗어난(자의로든 타의로든) ‘아웃사이더’들이 많은가 하는 거야.

이런 사람들 역시 사회 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미국 사회의 우경화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면 좋을 텐데….

아무튼 다니엘과 함께 한 저녁시간은 기대이상으로 즐거웠어.

아프리카와 미국 여행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고. 이만 자야겠다. 내일 또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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