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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8. 20:19산행기 & 국내여행/여행정보 & 여행기 펌.





트레킹 열 일곱째 날



그곳 베이스 캠프의 날씨는 요즘 어떤지 궁금해. 이곳의 날씨는 영 엉망이거든.

그동안은 오전 9-10시까지는 날씨가 그나마 괜찮더니, 오늘은 아예 아침부터 잔뜩 구름이 끼었어.

아침은 뜨거운 우유 한 잔으로 대신하고, 7시부터 걷기 시작했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배낭을 메고 타레파티(Tarepati) 가는 길로 들어섰을 때

숲은 고요했고, 길 위에는 나 혼자였어.

비 그친 후의 맑은 공기가 숲을 떠돌고, 젖은 낙엽들과 흙에서는 싱싱하고도 비릿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지.

그리고, 붉은 등을 매단 초록 나무들의 사열식.

아, 난 그 아침 숲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꽃 핀 나무들과 만난 거야.

어쩔 줄 모르고 숲길을 서성이다 마침내는 배낭을 내려놓고 오솔길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오래도록 꽃들을 바라봤어.

그리고 꿈을 꾸었지. 그리운 이들 모두를 이곳으로 불러모아 저 꽃이 다 질 때까지 함께 머물렀으면 하는 모진 꿈을.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피어나는 4월,

랑탕의 트레일은 ‘천상의 화원’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이 길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상상을 넘어서.

‘전생에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이번 생에 이토록 자주 만나다니.’

이런 생각을 하며 그 고요한 아침 숲에서 나 혼자 꽃들과 함께 머물렀어.

먹구름만 몰려오지 않았어도 더 오래 숲에 머물렀을 텐데….

꽃길을 빠져 나와 한 시간 반에 걸친 오르막을 올라 타레파티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또 우박이 쏟아져.

결국 오늘은 두 시간 걷고 배낭 풀었어.

숙소도 마음에 들고, 이곳에서 보는 동쪽 히말라야 전망도 좋다기에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보려구.

주인 아저씨가 담아다 준 한 양동이의 뜨거운 물로 머리 감고, 씻고, 빨래까지 다 해서 널고,

엽서 몇 장 쓰고, 책 읽으면서 오후를 보내고 있는 중이야.





▲ 라우레비나 가는 길에 돌아본 고사인 쿤드.  

ⓒ2004 김남희



▲ 해발 4380m의 호수 고사인 쿤드.  

ⓒ2004 김남희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미국 인디언 멸망사를 기록한 책이야.

카트만두에 돌아갈 때까지 이 책 하나로 버텨야 하는데 겨우 200쪽 남짓 남았을 뿐이어서 걱정이야.

(이 책 전체는 700쪽 분량의 제법 두꺼운 책이라 베개로 쓰기에도 좋아.)

이 트레킹을 시작할 때 책은 두 권 밖에 안 가져왔는데 한 권은 이미 랑탕에서 끝냈고,

하나 남은 이 책마저 끝나가니 이를 어쩐담.

할 수 없지 뭐. 다 읽고 나면 읽은 책 또 읽어야지.

머리 나쁜 사람들의 장점은 읽은 책을 다시 읽어도 늘 처음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지.

이 책을 읽다보면 미국의 ‘꿈과 희망’이라는 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설립 자체가,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의 살육 위에 이루어진 것인지 생생하게 깨닫게 돼.

인간이 피부색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이성이라는 게 얼마나 편협하고 자의적인 것인지를

솟구치는 분노와 함께 다시 생각해 보게 돼.

인류가 주창해 온 ‘진보와 문명’이라는 틀거리 역시 허구적이고 기만적으로 느껴져 새삼 회의가 들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수많은 의문과 의심, 분노와 체념 속을 넘나들게 되니까 진도가 느릴 수밖에 없어.

그동안 인디언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몇 권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이 책처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인디언 학살’을 다룬 책은 못 본 것 같아.

지금 막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세 명의 독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포터 및 가이드 4명을 이끌고 들어섰어.

이 분들은 신곰파에서부터 얼굴이 익은 분들인데

내가 “절대로 웃지 않는 사람들(Never smiling people)"이라고 별명까지 지은 사람들이야.

왜냐, 절대로 안 웃거든! 



  

▲ 네팔 국화인 랄리구라스.  

ⓒ2004 김남희



어쩌면 저렇게 화난 듯 무뚝뚝한 얼굴로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싶다니까.

 독일인들이 유럽인들 중에서 표정이 좀 딱딱한 편이긴 하지만, 이분들처럼 경직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아.

결국 나의 고즈넉한 평화도 깨어지고, 난로 독점도 끝났어.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제법 쌓였어. 그곳에도 이렇게 눈이 자주 오는지?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날씨가 나빠도 캠프 설치 작업은 계속되는지?

궁금한 건 많은데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고…. 조금 답답하다. 다들 건강한 지도 궁금하고.



덧붙이기.

드디어 ‘절대로 웃지 않는 사람들(Never smiling people)‘이 웃었어!

눈보라 속에서 걷느라 완전히 탈진이 되어 들어온 할머니께

계속 마사지를 해 드리고, 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추위를 녹이시라고 빌려드렸거든.

고맙다며 웃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뵈니 기분이 참 좋아.  



이 편지는 2004년 5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벽 중의 하나로 꼽히는 로체 남벽을 등반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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