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ENGLAND ─ 솔즈베리,「스톤헨지」

2019. 8. 21. 20:36여행/영국


















 



“에이~ 고인돌이네 뭘~! 아무것도 아니네!”






 



 







 





세계 고인돌의 70%가 우리나라에 있다더라.

고인돌을 북방식 남방식으로 나누는 것도 우리나라의 고인돌 모양을 기준으로 나눈단다.

한국사람은 일부러 스톤헨지 보러 갈 필요 없다.

봄엔 유채꽃이 핀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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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은 모자 하나 샀당... (^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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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갈비 요리 기술이 우리보다 낫더라.

쪽갈비가 원래 맛난 음식은 아니지만서두.


 























펌글)))



글쓴이 : (필명) 해변의 묘지




운주사
먼 옛날.. 그곳에는....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천불 천탑이 모두 세워지는 날....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거라 믿었다

 

그러나....
마지막 천번째 불상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전설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운주사.....

운주사에는 정말 천불 천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거대한 유물들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언제나.. 내 삶속 깊숙히 신비한 미스테리를 가득 심어주었던 그곳....
운주사.... .

 

오늘은 내가 알고 있는 운주사의 이야기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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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주사와의 만남.

 

운주사는 불과 수십 년전만 해도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은 절이었다.
이런 운주사가 일약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부터 여러 소설의 무대로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대단원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 .
소설은 천민 장길산을 비롯한 민중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문순태의 단편 '운주사 가는 길'
성낙주의 '아수라의 눈물' 등등.... .

 

소설속의 운주사는....
민중들이 새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 했던 혁명의 땅으로 나오기도 하고
또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갔던 지족선사가
도력으로 천불천탑을 새기며 수양을 쌓는 장소로도 묘사돼 있다.

 

이 소설들이 세간에 관심을 끌게 되면서
운주사는 엄청난 주목을 받는 절로 일순간에 탈바꿈하게 된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준 책은 따로 존재했다.
오래 전.. 당시 우연히 PC통신으로 접하게된 아주 특별한 책이 있었는데
운주사에 매료된 한 독일인이 사진과 함께 쓴 책이었다.

 

그의 이름은 '요헨 힐트만' 이었고

그의 사진과 글은 내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 오래전 힐트만이 보여준 운주사의 설경 >

 

 
우리나라에 있는 절 하나에 대해서

이처럼 외국인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책을 낸 경우는

그때도 지금까지도 없었다.

 

대체.. 운주사의 어떤 점이 이토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또 내 나라 내 조국에 이토록 미스테리한 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 건너 저 멀리.. 피라미드나 스톤 헨지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일그러지고 무지한 유물과 문화관에

스스로 자책하고 자성하는 기회로서 운주사는 내게 더없이 각별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현재까지 운주사는 누가.. 언제.. 왜.. 이곳에 절을 세웠으며

또 그 많은 탑과 불상을 만든 것인지 정확히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제....
내가 알고 있는 운주사의 미스테리들....
아니 운주사의 특별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말해 보고자 한다.

 

 

 

2. 파격의 가람배치

 

전남 광주의 무등산 끝자락 조그만 계곡....
바로 운주사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절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일반사찰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아주 낯선 풍경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 2010년 운주사의 겨울 > 

 

 

사진에서 보듯....

지그재그로 늘어선 십여기의 탑들....
그리고 계곡을 등받이 삼아 기대 서 있는 다양한 불상들이

먼저 눈에 띄일 것이다.

 

그중.. 쌍배불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이 쌍배불감이다.

 

 

< 2005년 운주사 쌍배불감 > 

 

 

경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 돌집 안에는

두분의 부처가 모셔져 있다.

 

각각 남쪽과 북쪽을 바라보며 등을 맞대고 앉은 모습으로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특이한 불상이다.

 

쌍배불감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탑들 역시.....
매우 독특한 모습들이다.

 

이같은 생김새와 의미 때문에 각각의 탑에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있다.

군왕이 날 명당에 터를 잡고 있다해서 명당탑
실을 감아두는 실패처럼 생겼다해서 실패탑
물동이를 겹쳐놓은 듯 보이는 항아리탑

그리고 옥개석과 탑신이 모두 원반형인 일명 호떡탑도 있다.

 

현재 운주사 경내에만 20여기의 탑이 남아 있는데

그중 어느것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경내는 물론이고 주변 골짜기에도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있는 곳엔 어김없이 석탑과 석불들이 있다.

 

 

<2005년 겨울 운주사> 

 

 

이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듯한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운주사는 절이라기 보다는

마치 야외조각전시장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 골짜기와 능선을 불문하고
거대한 석불과 석탑이 규모있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처럼 크고 많은 석불, 석탑을 배치한 예는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형식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운주사에는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최초의 기록은 15세기 문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의문과 궁금증들을 풀기위해

학부시절부터 나름 많은 공과 시간을 들였지만

부족한 전문지식 그리고 한정된 국내외 자료로는 언제나 답보 상태에 머물렀었다.

 

뿐만아니라 대학시절....
내겐 종교와도 같았던 김지하와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던 누운 돌부처에 침을 뱉던

'거역의 예리한 칼날'이 내 기억 깊숙히 각인되면서

운주사와 천불 천탑의 미스테리는 언제나 내 삶의 일부로서

진하게 자리매김 했던 것이다.

 

그러던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민관 합동 조사단에 의해 드디어 운주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새롭게 실시됐다.

 

그 결과....
중요한 몇가지 사실들이 밝혀졌다.

 

운주사가 창건된 것은 고려초....
그러나 12세기와 15세기 두차례에 걸쳐 중건됐음이 확인됐다.

또한.. 탑과 불상이 12세기에 만들어졌음을 확인한 것도 큰 성과였다.

 

그런데.. 발굴을 통해 알게된 정작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가람의 배치였다.

 

법당은 계곡 입구에 있고 탑과 불상은 뒤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배치....
과거든 현재든 우리 불교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배치였다.

전에 없던..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치였다.


사실.. 그때까지 엉뚱한 자리에 눌러앉은 새로운 법당은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정부관계자와 욕심 많은 몇몇 스님들에 의해

운주사가 지닌 가치나 의미도 모른 채 새로 지은 것이고

그런 유치찬란한 가짜 절 저편에 옛 절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래지 않은 과거....
절터가 남아 있는 그곳에서 각종 무속인들에 의해 신앙행위가 있었고

그 옆 골짜기로도 많은 불상등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마치 야외에 부처님을 모신 듯한 이런 예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람배치는

1탑 1금당 혹은 2탑 1금당으로

탑을 금당 앞에 하나 내지는 두 개 정도 세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런데.. 운주사는 탑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물론이고

금당과 탑이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천불천탑과 운주사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배치와 특이함....
그리고 민간에서부터 자생한 각종 전설과 설화들....
게다가 여러 문학 작품들을 통해 증폭되어진 신비....
그렇게 그동안 운주사는 수수께끼를 간직한 절로

오래도록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3. 운주사의 로제타석 '칠성바위'

 

불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도

운주사의 풍경은 확실히 다른 일반적인 절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이러한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 그리고 가람의 배치에 대해

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금까지 특별한 질서가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리하여 무정형의 아름다움, 무질서의 정연함이라고 억지로 풀이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많은 석불과 석탑들이

아무 의미없이 그렇게 흩어져 있던 것일까?

거기서부터 내 의문은 하나하나 풀려가기 시작했다.

 

 

<운주사 칠성바위 2003년 여름>

 

 

운주사 서편 산중턱....
이렇게 커다랗고 평평한 바윗돌이 여럿 놓여있다.

 

탑도 불상도 아닌 커다랗고 평평한 바윗돌....
거대한 돌을 다듬은 것도 엄청난 공을 들였겠지만

경사진 이곳까지 옮긴 일 또한 말할 수 없는 공력이 들어간 일이다.

 

모두 일곱개의 커다란 바윗돌....

사람들은 이것을 '칠성 바위' 라고 부른다.

 

실제로 놓여진 모양 또한.....
정말 북두칠성의 국자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바윗돌 또한 다른 그 어떤 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하며 특별한 것이다.

 

바로 이 일곱 개의 바윗돌....
이것이 운주사의 비밀을 풀어주는 단서가 되었다.

이른바.. '로제타 석' 이 되었던 것이다.

 
발굴팀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계곡 서편.. 깍아지른 절벽위에 있는 이 거대한 일곱 개의 바윗돌은

평균 두께 45센티.. 무게는 작은 것이 12톤 가장 큰 것은 20톤으로

평균 18톤에 육박한다.

 

땅위에 얹혀져 있는 상태로 볼 때

어디선가 옮겨온 것이 분명한 이 바위들....
대체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오래 전.. 이정도의 엄청난 중량을 산 밑에서 가져오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바위 윗쪽 그 어디에도 큰 바위를 채석할 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엄청난 공력을 들여 밑에서 가져왔던 것이다.

 

이렇게 무거운 돌들을 이곳까지 옮겨 놓은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져 이 바위들이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기리기 위해서 였다고 짐작만 할뿐

막연한 추정을 확신하며 아무 일도 아무 증거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조상에게 물려 받은 유물과 문화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또 소홀했는가를 여기서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난관을 뚫고 헤치는 일은

언제나 관에서가 아니라 민에서 출발하고 시도되어진다.
운주사.. 이 칠성바위 또한 그랫다.


8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칠성바위에 관심을 지닌 한 천문학도의 끈질기고 집요한 제안으로

결국.. 칠성바위에 대한 정밀 조사가 실시됐고

과학계와 문화계 모두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대단히 흥미로운 결과를 얻게 된다.


그동안 단순한 상징일거라 생각했던 커다란 바위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바위들은 밤하늘 북두칠성의 자리와 그대로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각 광도의 밝기에 따라

바위들은 크고 작고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밝은 별은 크게 흐린 별은 작게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이다.

 

운주사의 비밀을 푸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천문학도 박종철씨....
지금은 천문학 박사로 후학을 양성하시는 교수님이신 그분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__*)


하지만....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뒤이어 운주사에 대한 연구는 활기를 띄게 되었고

여러 논문들이 줄이어 발표 되어진다.

그리고 하나같이 놀라운 결과들이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내용은....
그동안 무질서하다고 여겼던 운주사의 탑과 불상들....
그리하여 무질서와 무정형이라 치부했던 그것들....

사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무의미하게 흩어진 것이라 생각한 그 불상과 탑들이

사실은.. 저 밤하늘 1등성과 2등성 등등....
그 밝기와 크기에 비례한 크기로 정연히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 백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겨우 그 의미와 까닭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발길이 닿기도 힘든 가파른 능선 또는 계곡 깊은곳에

그토록 공력을 들인 까닭이 거기 있었다.

 

접근하기도 힘든 위치에 구태여 탑과 불상을 세운데는

뭔가 특별한 목적이 있을거라는 의문을 단 한번만 진지하게 품었어도

우리는 우리의 이 위대하고 놀라운 문화유산을

이렇듯 허술하게 방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발견은

운주사가 간직한 많은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다음의 이야기도 하려한다.

 

 

 

4. 북극성, 치성광여래 그리고 와불.

 

그 옛날....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은

이렇듯 운주사 터에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재현한

매우 독특하고 각별한 천문도를 이루어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대단한 발견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별을 탑으로 나타낸 것일까?
도대체 불교와 밤하늘의 별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천문과 불교가

실제로는 매우 오랜 전통을 지니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는 초기....
발달한 인도와 서역의 천문학이 불교 경전과 함께 유입된다.
불교가 동양 천문학 전파의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별과 불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된 중요한 탱화들이 아직도 여러 절들에 남아있음을

나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 냈다.

 

두륜산 대흥사에도....
부석사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탱화다.

 

 

< 칠성탱화 >

 

 

상단.. 좌측에 3분.. 우측에 4분....
모두 일곱분들의 머리 뒤에 둘러진 후광.... .

 

그렇다.

운주사의 칠성 바위를 그대로 닮아 있다.

분명.. 의심할바 없는 북두칠성이다.
이른바 '칠성탱화도상'.... .


이렇게 북두칠성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동양에서는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
그것을 불교가 이미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두칠성.. 그것은 숭배의 신앙이었다.
개개인의 운명은 각각의 별자리가 주관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북두칠성은 한 나라 혹은 한 지역의 운명, 병고, 등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그럼으로서 민간에 널리 퍼져있었던 신앙인 것이다.
그것이 불교가 대중화되며 자연스레 포섭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별자리가 기록된 몇몇 귀중한 우리나라의 탱화들에서

가장 중요한.. 그러니까 기준이 되는 별자리가 있는데

바로..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 다.


그렇다면....
하늘의 천문을 옮긴 운주사에서도
당연히 북극성이 있어야 할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열쇠는 바로 북두칠성에 있다.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찾기 위해선 우선 북두칠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북두칠성 제일 끝에 있는 두별의 중심을 연결하면

그것은 정북방향을 가리킨다.
그 방향과 일직선상에 북극성이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운주사에서 북극성을 찾아보면

놀랍게도 그곳에는.....
거대한 와불이 있다.

 

운주사의 북극성....
그것은 바로.. 이 거대한 와불이었던 것이다.

 

 

< 운주사 와불 2005년 겨울 >


 

이렇게 운주사의 탑들은

그동안 우리의 무관심 무성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질서와 사상 체계속에서 정연히 배치되어 있었다.

 

북극성을 상징하는 와불과 칠성바위를 중심으로

각각의 탑들은 하늘의 중요한 별자리를 상징하며

그곳에 무수한 염원을 담고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5. 와불의 전설.


운주사에 대한 대부분의 전설은

바로 이 와불인 돌부처에 관련 되어있다.


전설의 내용이나 배경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바로 이 돌부처가 일어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계곡 서편....
산정상에 있는 와불.... .

길이는 대략 12미터, 무게 150톤 정도....
사진에서 보듯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이다.
사진 아랫쪽에 있는 부처가 12미터로 윗쪽 부처보다 1미터 가량 더 크다.

 

돌부처가 새겨진 바위는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는데

사진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특이하게 머리가 다리보다 더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말하자면 아래쪽을 향해 거꾸로 누워 있는 형태인 것이다.

 

이부분에 대해 석공 장인들의 견해를 포함한 발굴조사서에 의하면

이것은 바위 아랫쪽이 더 좁기 때문에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했을 것이라 한다.
자연적인 바위를 최대한 활용하려했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나 역시 읽는 이의 편리를 위해 와불로 표기했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교의 와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돌아가신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정확히는 측면을 조형한 측와상이다.
즉.. 옆으로 누운 모습을 조형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운주사의 와불을 다시 보자.

 

 

< 2006년 겨울 운주사 와불 >

 

 

그렇다.
운주사의 와불로 알고 있던 이 돌부처상은

분명 서 계신 모습이다.
와불이 아니었던 것이다.
분명.. 서 계신 좌상이다.

좌상 입상을 자연 암반에 조각하고

마침내 일으켜 세우려다 채 일으켜 세우지 못한

미완성 상태의 불상이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자연 바위에 두 분 부처를 조각하고

그 바위의 결에 충격을 조급씩 가해 원래 바위결의 켜에 조그만 균열을 만들고

그 틈 사이로 버팀목을 조금씩 밀어넣으면

결국 바위는 떨어져 나오게 된다.

 

실제 돌부처가 조각된 바위의 석질을 보면

윗돌과 아랫돌의 성질이 조금 달라 그러한 돌 떼어내기가 가능하다고

석공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위 옆면으로 이어져 있는 균열을 이용하면

쉽게 떼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위의 성질을 잘 활용한 것으로

이것은 자연균열을 이용해 두 분 부처를 미리나눠 새긴 것에서도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두 부처의 옆에는....
지금도 실제로 바위의 일부를 떼어낸 흔적이 남아 있다.

와불을 지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일명 머슴부처가 그것이다.

 

이런 모든 정황으로 볼때....
와불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이 돌부처님들은

처음부터 세우려고 했던 것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왜?
시위불인 머슴부처까지 떼어내고 난 다음에도

정작 북극성에 해당하는 이 부처님들은 떼어내 세우지 않았던 것일까?

 
그 또한 발굴에 동참했던 석공 장인들의 견해로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었다.

대역사를 이루던 우리의 애뜻한 선조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돌부처의 머리 부분이 있는 바위 아랫쪽....
거기서부터 석질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주변의 모든 부분은 위와 아래의 결이 얇게 분포되어 있어서

쉽게 떼어낼 수 있었고 바위 모두가 그러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바위 중간쯤엔 조사를 하기 위해 일부를 절단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거기까지도 석질은 균등히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점점 아래로 내려오면서 상층부가 두꺼워지고....
급기야 머리 부분에 이르러서는 상하가 구별이 되지 않을만큼

석질은 하나로 붙어 버린 것이다.

 

전문가들의 표현으로는....
"주윗돌은 같은 두께를 유지하는데 머리로 가서는 짬이 없이 붙어버렸다" ..라고....
표현될만큼 석질이 완연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운명이었을까?

 

그렇게.. 애초에 일으켜 세우려 했던 돌부처는

어깨부분부터 커다란 암석덩이로 이루어져 있었고

돌의 속성상 자연켜가 없는 상태에서 떼어내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 지금의 공법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인 것이다.

 

자칫 억지로 분리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할시엔

틀림없이 큰 공을 들인 돌부처가 깨어질 것이고

돌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선조 장인들은

결국.. 모험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두 부처님은....
누운 채 남겨지게 되었고....
이를 둘러싸고 세월이 흐르며....
무수한 전설과 설화가 피어났던 것이다.

 

만약.. 이 돌부처님이 세워졌더라면....
돌로 만든 부처중에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의 크기와 공력이 들어간 돌부처님인 것이다.


돌부처를 다 새겨놓고도 결국 일으켜 세우지 못했으니

당시 사람들의 실망은 대단히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런 실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또 다른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이 누운 부처에게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현재는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 나아질 거라고 믿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 와불 아닌 와불이 일어나는 날....
틀림없이 새세상이 올거라는 전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바램은 극히 최근까지도 이어져 있었다.
지난 80년대초....
암울한 시대 상황을 와불에 대비시켜

한때.. 운주사가 민주화의 염원을 상징하는 성지처럼 여겨졌었다.
역사속의 와불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대비해

재해석했던 것이다.

 

 

 

6. 운주사의 훼손과 폐사.

 

그런데....
나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와불은 북극성을 그리고 큰 탑들은 각각 별자리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분명 기록에서는 운주사에 천불천탑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 많은 탑과 불상들을 어떻게..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현재 운주사 경내에 남아있는 불상과 탑은

모두 합해 대략 100여 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파손된 석탑재와 석불조각들이 경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과거엔 훨씬 더 많은 탑과 불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2010년 운주사 파손된 불상과 탑의 잔해들 >

 

 

어렵게 '조선고적도감'을 비롯한 여러 책자를 찾아보았으나

운주사 탑과 불상의 수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었다.

그나마 1940년대초 한 연구가의 조사에 따르면

그때까지 운주사에는 200 여 기의 탑과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불과 40~50여년의 그 짧은 세월동안....
우리는 무려 100 여 기 이상의 탑과 불상을 소실시켜버린

못난 후손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유적유물들이 낱낱이 조사되어진 자료에 의하면

원구형 탑의 경우 사진상으로 분명 7층 석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제는 상층부 3단이 소실되어....
4층 석탑이 되었다.

 

이렇듯 창건후 8~900년의 세월이 흐르며....
곳곳의 탑과 불상들이 훼손되고 소실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마도 창건 초기인 고려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탑과 불상이 존재했을 것이라 짐작되어 진다.

 

수 많은 전설과 설화를 간직한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아직 정확히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절의 폐사와 함께

이렇게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운주사가 폐사된 것은 언제일까?
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세기에 등장한다.

 

결국.. 1530년까지 건재한 것으로 기록되던 운주사가

불과 100 여 년 남짓한 시간에 폐사되었다는 결론이다.

 

적어도 16세기 중반 이후에 폐사된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절터에서는 화재로 소실된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정유재란때 왜구의 침탈이 아주 많았다는 기록을 통해

그런 이유들이 운주사의 폐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그후....
지속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운주사는

오랜 기간동안 재건되지 않았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과 맞물려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동안 많은 탑과 불상들이 그렇게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이후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속에 이름만 남아있던 운주사....
그런 운주사는 80년대 들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뜻있는 몇몇 후원인들과 불자들에 의해 재건이 추진되고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었다.

운주사에는 틀림없이 천불천탑이 있었다고....
지금도 근처 아무곳이나 파보면 탑이고 부처고 부서진 유물들이 나온다고.... .

 

 

< 2010년 겨울 운주사 >
 

 

 

7. 천불 천탑을 만든 사람들.... .

 

불교에서 천이란 숫자는 무한히 많음을 뜻한다.
따라서 천개의 부처는 인간사의 모든 번뇌로부터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광의에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천불과 천탑을 을 만드는 것은

이같은 간절한 바램이나 희망을 이루려는 의지의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불교에서는 천불사상을 굉장히 중시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달아야 한다는

불교의 목적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보통 불전속에만 천불을 모시거나

나무나 청동등 비교적 가공하기 쉬운 소재를 사용한다.
크기 또한 매우 작아 탑이나 불전 안에 모시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운주사는 야외에 별도로 탑과 불상을 천개씩 모셨다.
운주사처럼 돌을 가지고 거대한 탑과 불상을 조성한 예는....
다른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당연히 여기엔 특별한 목적이 있다.

와불과 큰탑들이 하늘의 큰 별자리를 상징하고 있다면

천개의 탑과 천개의 불상들 그것은 당연히 밤하늘

또 다른 뭇별들을 상징했던 것이다.

 

지금의 천문학자들이 당시 별자리 배치와 상당부분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운주사는 하늘나라의 천불을 확실히 지상에 재연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운주사는 얼마나 중요한 유물이며 엄청난 유물인가?
파격적인 우주의 질서가 이 지상세계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운주사의 탑과 불상들은....
모두 하늘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이 탑과 불상들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왔다.

 

노비와 천민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심지어는 하늘에서 도공들이 내려와 천불천탑을 이뤘다는 설화도 있다.

 

그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바로 도선국사에 관한 이야기다.

 

 

도선국사는 신라말의 승려다.
바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비조로 알려진 인물.
그가 운주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그럴까?


오래 전 도선국사는....
당시 우리나라를 배의 형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큰 산맥이 있는 동쪽은 무겁고 서쪽이 가벼워서
동쪽으로 기울어질 염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둘 경우....
우리나라의 운세가 일본쪽으로

몽땅 흘러가 버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 도선은

이것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국토의 중심부에 불상과 석탑을 세워

무게중심을 잡으면 될거라고 생각한 것인데

풍수지리상 배의 중심 즉 배꼽에 해당하는 곳

그곳이 바로 이 운주계곡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도선이....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전적으로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엉뚱한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저 자신이 먹고 살 풍수지리에나 관심이 있었지

이 땅에 도도히 흐른 역사나 문화에는 무심하고 무지한 사람들 말이다.
 
간단히 증명할 수 있다.

도선국사가 살았던 시기는 8세기....
당연히 그때는 운주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무려 400년 이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또 후대 사람들은 진실처럼 믿게 되었고

그리고 정말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신라말의 승려인 도선국사가 고려중기까지 거론되는 것은

민중에 바탕을 둔 그의 불교사상 때문이었다.

 

당시.. 기존의 불교가 엄격한 화엄사상에 바탕을 둔 귀족중심의 불교였다면

원효이래 도선의 불교는 일반 민중들을 두루 포섭할 수 있는

대중적인 불교였다.

 

이것은 아마도 통일 직후....
지방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이 최우선의 과제였던 고려 집권층에게는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사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초기는....
후삼국 통일후 모든 계층을 융합해야 할 필요성이 간절했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불교는

도선국사가 주장하는 민중의 불교였던 것이다.

 

그렇게 고려왕실은....
도선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그가 죽은 후에도 왕사 혹은 국사로 추앙하면서

그의 사상을 강력한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이용한다.

 

이러한 왕실의 태도는....
도선을 내세우면 절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많은 사찰에서 그의 이름을 사용하는 풍조를 낳게된 것이다.

 

결국.. 고려초기의 운주사 역시

당시의 행태와 맞물려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억지 전설을 연결지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전국지도에 해당하는

'동국여지지' 에는

운주사의 창건과 관련해

또 한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관촉사 은진미륵을 만든

'혜명스님' 일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훨씬 앞시대의 사람으로

도선의 경우처럼 이같은 억지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운주사 천불 천탑을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에 대해 여전히 여러가지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 어느것도 시원스런 정답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운주사의 탑을 통해 의문을 풀 수 있다는 새로운 의견이 제기됐다.
운주사의 독특한 탑양식....
그것은 중국남쪽 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탑은 불교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조형물의 하나다.
때문에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에 없는 이런 새로운 탑과 양식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른 곳으로부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그러니까 새로운 불교문화를 누군가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선 비슷한 유형의 중국 남쪽에서 새롭게 건너온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웹을 통해 옛고지도와 지금의 지도를 비교하며 뒤적거리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현재 운주사 앞은 호수로 가로막혀 있지만

댐으로 막히기 전까지 이곳엔 물길이 이어져 있었다.
 
목포 앞바다에서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가장 먼저 나주 회진을 지나게 된다.
고대로부터 남중국과의 교통로로 각광받던 곳이다.

여기서 다시 남평을 지나 상류를 향해 오르다보면

어느덧 물길은 둘로 갈라진다.

 

바로 그 사이에....
거짓말처럼 운주사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옆에는 세곡을 저장했던 창고가 있어서

이 지역이 수상교통의 요지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 중요한 수로의 중간지점에

거짓말처럼 운주사가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볼때....
중국을 통한 문화유입이 되는 가장 중요한 루트 중간지점이고

절묘하게 운주사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남중국쪽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시기가

운주사 탑과 불상이 세워진 때와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었다.

 

실제 고사료들을 검색해본 결과....
11,12세기에 무려 150회에 걸쳐 사람들이 건너 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개 절강성, 복건성을 출발해서 주산열도를 지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향해서 북상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시기 우리나라에 건너온 그 많은 사람들....
그들은 과연 누구알까?
 
이지역은 중국에서 주로 해상활동에 종사했던 사람들....
정확히는 백제유민들의 거주지역이었다.

고려의 건국을 계기로....
그동안 신라에 의해 봉쇄되어 왔던 해상로가 개방되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패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남방항로를 이용

대거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당시.. 능주읍으로 표기된 그 지역의 기록지인 '능주읍지' 기록을 통해서도

실제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상당수 정착해 살았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모든 상황을 꿰맞추어 추리해보면 이렇다.

 

고려 건국이후....
운주사를 중심으로한 나주 지역 호족들, 이지역 민중세력들....
뿐만 아니라 백제 유이민 세력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구심점으로서

운주사는 창건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특정 소수집단의 힘만으로는 결코 쉬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엔 지배층의 이념도 피지배층의 바램도

흐르는 세월만큼 깊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1000년의 세월동안....
계곡 골짜기 골짜기에서....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저 거대한 석불과 석탑들....
여전히 알 수 없는 수 많은 의문과 의미를 담고

오늘도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처음 운주사에 관심을 가졌던 80년대초부터 지금까지....
내겐 여전히 미스테리 투성이로 남아 있는 운주사.... .
단순히 미스테리를 풀고 의문점을 풀어가는 한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운주사 천불천탑의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서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 조사하고 또 찾아봤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무질서하다고만 여겼던 운주사 천불천탑이

바로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놓은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던 와불의 안타까운 사연 또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많다.
그럴싸한 짐작과 추론만 거듭할뿐....
운주사 천불천탑을 만든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명확히 밝혀내는 것 또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런 장대한 일은 전문가들의 몫일뿐....
나 같은 일개 관심인들은 그들의 연구와 발굴의 결과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운주사 천불천탑....
그것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았던 사람들이 눈물과 땀으로 빚어낸

소중하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이다.

 

언젠가 또 다시 새롭게 밝혀질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을 기다리며

나는 오래도록 운주사를 기억할 것이다.

 

 

 

8. 장길산과 김지하의 운주사.

 

어쩌면.. 세상 끝으로 밀려난 백성들이....
진정한 미륵의 시대를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고 만든 절일수도 있는 운주사.
 
이제.. 이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오면

일주문 옆길로 길게 개나리가 피어 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일주문을 버리고 개나리를 따라 걸을 것이다.

도선국사의 운주사를 버리고....
장길산의 운주사.. 김지하의 운주사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천민 장길산.. 힘없는 백성들....
세상 밖으로 밀려난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댄 운주사 천불천탑....
그것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 신앙은 고단한 입에서 고단한 입으로 전해오던 '미륵'이었다.
그 신앙은 더 이상 고단한 입을 찾아 떠도는...
미완의 신앙이 아니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협곡 속에 숨어 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을 다시 세우면....
수도가 그곳으로 옮겨온다는 새로운 희망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도읍지가 바뀌는 세상....
그래서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이루어 진다는 희망을 말이다.

 

장길산의 운주사를 몇자 적어두며....
이제 길고 긴 글을 갈무리 한다.

 

그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그래서 그들이 세운 절의 이름은 '운주사(運舟寺)'였다.

 

젊은 유민이 물었다.

"할아버지, 절 이름이 어째서 운주사요?"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새로운 우리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 게야.
 미륵님 세상이 배가 된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도량에는 봄에 피어야 할 꽃들이 모두 피어있었다.
벚꽃까지 머리를 내밀었고, 바위틈엔 듬성듬성 진달래까지 붙어있었다.
도량엔 꽃들이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천불천탑은 모두 다 남아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상이 있었고, 발길 머무는 곳마다 석탑이 있었다.
불상들의 얼굴엔 못 다한 이야기가 가득했고....
길어진 석탑들의 그림자 끝엔 돌을 쪼던 백성들의 손길이 묻어있었다.

 

불사바위로 오르는 길에 작은 불상이 숨은 그림처럼 붙어있었다.
아이의 모습이다.
아이는 미륵의 세상을 보지 못했다.
어린 미륵불은 멀리 와불이 누워있는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닭이 울었다!"

 

거짓말이었다.
누워있던 마지막 미륵을 밀어 올리려던 사람들도....
약속의 시간이 지나자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미륵상은 비탈 저 밑에 처박혀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미륵상이 되기 위해 우뚝우뚝 새까맣게 몰려오던 사방의 바위들도....
소문을 듣고는 그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그렇지만 넘어지면서도 머리는 계곡 쪽을 향하였으니....
먼 훗날에라도 와불이 바로 일어서면 다시 미륵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위들은 민병의 쓰러진 시체처럼....
들판과 야산의 곳곳에 넘어져서 오랜 비바람에 씻겼다.

 

그 뒤부터 운주사의 대문을 닫을 적마다....
서울 장안에서 우지끈대는 우렛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서울이 옮겨지지 않은 것을 한하여 그런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래서 대문을 떼어 영산강으로 떠나보냈다.

운주사는 그 뒤로부터....
운주사(雲住寺)가 되었으며....
이는 물이 차오르지 않아 세상이 머물러버렸던 까닭이라 하였다.


희망이 절실할 때는....
한 번쯤....
천불천탑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운주사를 찾아볼 일이다.

 

 

 

거기.. "나도 한때 당신들처럼 세상을 살았다오" ..라고 말하는....

가없는 부처들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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