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2018. 11. 21. 20:18미술/미술 이야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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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현재 대학로에서 문화예술공간인 "아트 꼴라쥬 JANG"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의 프로그램들을 직접 기획하여 강의하고 있다. 저자는 프로그램ㅇ,ㅡㄹ 만들 때 하나의 문화예술보다는 여러 분야들의 콜라보 기획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현재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을 콜라보한 행사를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 행사는 화가의 생애와 일화, 화가를 소재로 한 영화 소개 그리고 화가의 생애/작품세계와 연관이 있는 곡들을 직접 선곡하여 배경음악으로 작품들과 함께 감상한다. 2016년부터 한 달에 한 명의 화가를 선정하여 행사를 진행하였는데, 현재 진행한 화가들은 모딜리아니, 모네, 반 고흐, 고갱, 피카소, 클림트, 달리, 뭉크, 르누아르, 세잔, 마티스, 마르크 샤갈, 이렇게 총 1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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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느를 사랑한 영원한 보헤미안 화가 모딜리아니(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1)

쟌느를 사랑한 영원한 보헤미안 화가 모딜리아니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1)
 화가와 함께 떠나는 즐거운 미술과 영화, 음악 여행
 

저자

 저자 장승용은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아버지 덕에 태어나서부터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여러 분야의 음악들을 찾아 듣고 공부하고 음반 모으다 보니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다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도 관심이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미술 분야였고 그렇게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관련분야 전공을 못하고 공학도로서 서울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Texas A&M 대학교에서 석유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한국가스공사 연구개발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일하였으며 그 후 에너지 컨설팅 회사인 ㈜카프나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공학 공부를 하면서도 문화예술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으로 문화예술 분야를 계속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2014년에 대학로에 복합 문화예술 공간인 “아트 꼴라쥬 JANG”을 설립하여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을 직접 기획하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는 링크드인 등 다양한 SNS 매체들을 통하여 1만여 명이 넘는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으며 이러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이번 시리즈의 영문판을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 출판도 기획하고 있다. 또한 해외의 많은 작가, 화가, 갤러리와 문화예술 관계자 등과 교류하면서 국내의 화가들을 외국에 소개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준비 중에 있다.


목차

1. 개요 13
2. 생애 14
3. 재미있는 모딜리아니의 이야기 51
4. 모딜리아니의 연인들 57
5. 저자 한 마디 77
6. 모딜리아니에 관한 영화 그리고 함께 하면 좋은 음악들 85
7. ‘모딜리아니’와 ‘피카소’ 이야기 93
8. 작품 갤러리 99



책 속으로

개요
아메데오 클레멘테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는 1884년 7월 12일에 출생하여 1920년 1월 24일에 사망한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길쭉한 얼굴과 인물로 특화된 초상화와 누드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1906년에 파리로 이주할 때까지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공부하였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은 유화와 데생이 대부분이지만 1909년부터 1914년까지는 조각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35세에 결핵 수막염으로 파리에서 사망하였으며, 생전에 성공하지 못했으나 죽은 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4) 파리로 이주


1906년, 모딜리아니는 아방가르드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가 파리에 도착할 당시 그와 거의 동시에 파리로 온 두 명의 외국인 예술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지노 세베리니와 후안 그리스였다.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사는 세탁선에 정착하였고, 콜랭쿠르 거리에 작업실을 얻었다. 이 지역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지만,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한때 부자였던 가정의 아들임을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외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파리 도착 1년 후, 그는 말쑥한 학자적 예술가에서 방랑자의 왕자로 자신을 변화시켰고, 이미 알코올중독과 마약 중독자였다. 술과 마약에 대한 그의 의존은 1914년부터 더욱 심해졌고,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결핵 증상이 더욱 악화된 시기였다. 그는 잦은 애정행각을 벌이고 압생트를 폭음하였으며 하시시를 복용하였다. 파리 이주 초기, 모딜리아니는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였고, 하루에 백장 이상의 데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파괴하였고 잦은 이사로 작품 상당수가 버려졌으며 그림을 받은 여자친구들은 그림들을 보관하지 않아 아쉽게도 당시 그의 작품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에 영향을 받았으나, 1907년 무렵에는 폴 세잔의 그림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정 사조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특정 사조가 아닌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하였다. 1910년, 그의 나이 26세 때 그의 인생에서 첫 번째 진실한 사랑인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를 만났다. 21세의 안나는 최근에 결혼한 유부녀였지만 그들은 같은 건물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고 사랑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이상형이었고 둘은 서로 사랑하였으나, 1년 후에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갔다.

5) 파리 몽파르나스


1909년, 모딜리아니는 병들고 지친 몸으로 리보르노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곧 다시 파리로 돌아와 몽파르나스에 작업실을 얻었다. 그는 원래 화가보다는 조각가를 꿈꾸었는데 화상인 폴 기욤이 그를 조각가인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소개하여 1년 동안 브랑쿠시의 제자로 일하였다.
1912년 가을 살롱전에 모딜리아니의 조각 연작이 전시되었지만, 1914년 전쟁의 발발로 적절한 조...각 재료를 얻기 힘들었고 건강 상의 문제도 겹쳐 그는 조각을 포기하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2010년 6월, 여인의 머리 조각상의 시금석이 된 모딜리아니의 은 현재까지 세 번째로 비싸게 팔린 조각품이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에서 샤임 수틴, 모이즈 키슬링, 파블로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콥, 블레즈 상드라르와 장 콕토 등 동료 화가들과 친구들의 초상화 연작을 그렸다.

6)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와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모딜리아니는 군대에 입대하려 하였으나 건강 상태로 거부당했다. 많은 파리 사람들에게 그는 ‘모디(Modi)’로 알려졌지만(프랑스어로 ‘저주받은 사람’을 의미)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를 ‘데도(Dedo)’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는 핸섬한 남자여서 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를 만날 때까지 많은 여인들이 그를 거쳐갔다. 헤이스팅스는 거의 2년 동안 그의 곁에서 머물렀으며,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모델로 하여 등 몇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1916년,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상인 ‘레오폴드 즈보로브스키’와 그의 아내인 ‘안나’와 친구가 되었다. 이후 즈보로브스키는 모딜리아니가 죽을 때까지 그의 최고의 화상이자 친구였고 1917년 파리에서 그의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해바라기를 사랑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2)

해바라기를 사랑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2)
 
 

책 속으로

개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는 1853년 3월 30일에 출생하여 1890년 7월 29일에 사망한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약 860점의 유화를 포함하여 2,100점 이상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초상화, 자화상, 풍경, 정물,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밀밭과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상징적인 색상과 극적이고 충동적이며 표현적인 방식이 특징이다. 그는 생애 동안 단지 한 작품만을 팔았고 가난과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가 37세에 자살하였다. 광인과 인생의 실패자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천재로 평가 받게 되었다. 그의 광범위한 상업적, 대중적 성공은 20세기 초기 독일의 표현주의자들과 야수파가 그의 작품을 사용하면서 시작되었고, 그의 명성은 20세기 동안 꾸준히 성장하였다.

<중 략>

2) 구필 화랑


1869년 7월(17세), 빈센트의 삼촌인 “센트”는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의 화상 일을 그에게 구해 주었다. 그 후 1873년(21세)에 빈센트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았고, 스톡웰의 핵포드 거리 87번가에 하숙집을 얻었다. 그는 일에서 성공하였고 이 시절은 빈센트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당시 그는 하숙집 주인의 딸인 ‘유제니 로이어 ’에게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다가 그녀에게 거절당했는데, 이미 그녀는 이전 하숙인과 비밀리에 약혼한 사이였다. 빈센트는 절망하였고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구필화랑 파리 지점으로 그의 발령을 주선하였지만 미술을 돈벌이에만 이용하는 현실에 분노하였고 결국 그는 구필 화랑에서 해고되었다.

3) 종교의 갈망과 보리나쥬


그 후, 그는 램스게이트에 있는 작은 기숙학교에 무보수 교사로 취직되어 영국으로 갔다가, 감리교 목사의 조수가 되기 위하여 그 일을 그만 두었다. 한편 그의 부모는 에텐으로 이사하였으며, 1876년 크리스마스 때 빈센트는 집으로 돌아가 6개월 간 머무르면서 도르드레흐트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낙서를 하거나 영어,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더 종교에 빠져 들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전도사가 되려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하여, 1877년에 그의 가족은 빈센트가 삼촌의 집에 머물면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그를 암스텔담으로 보냈다. 빈센트는 그의 삼촌이자 존경 받는 신학자인 ‘요하네스 스트리커’의 집에서 입학시험을 준비하였으나 시험에 낙방하여 1878년 7월에 삼촌 집을 떠났다.

1879년 1월(27세), 그는 벨기에 보리나쥬의 탄광 마을인 ‘프티 바스메스’에서 전도사 직업을 얻었다. 가난한 신도들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빈센트는 편안한 숙소를 포기하고 짚으로 만든 작은 오두막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교회 당국은 그의 지저분한 생활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 하였다.

그 후 그는 브뤼셀로 갔다가 그의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돌아 갔다. 1880년 3월(28세)까지 집에서 머물다가 보리나쥬의 퀘스메스로 돌아와 10월까지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풍경을 그려 당시 생활 모습을 기록하였다.

4) 키 보스 스트리커


1881년 4월(29세), 빈센트는 그의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해 8월에 얼마 전 미망인이 된 사촌인 ‘키 보스 스트리커 (Kee Vos-Stricker)’를 만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언니인 빌라미나와 요하네스 스트리커의 딸이었다. ‘키’는 빈센트보다 7년 연상이었고 여덟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빈센트는 그녀에게 청혼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안돼, 그게 아니라 절대로”라고 말하면서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키가 암스텔담으로 돌아간 후, 빈센트는 그녀를 만나러 암스텔담으로 갔으나 그녀는 빈센트를 만나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그는 “그녀를 볼 때까지 램프에서 이 손을 빼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왼쪽 손을 램프 불에 넣기까지 하였다. 키의 아버지는 딸이 거절하였고 빈센트가 자신 조차도 부양할 능력이 없으므로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빈센트는 암스텔담에서 헤이그로 가서 마우베에게 자신을 학생으로 받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우베는 빈센트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하여 그를 집으로 데려갈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해 크리스마스에 빈센트가 교회에 가는 것을 거절하여 아버지와 다툰 후 1882년 1월(30세) 다시 헤이그로 갔다. 마우베는 그에게 유화로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었고 작업실을 만들도록 돈도 빌려주었다.

알려진 것처럼 빈센트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섰으며, 37세로 사망하기까지 화가로서는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거의 900점에 가까운 그림들과 종이에 그린 1,300 점 정도의 스케치를 작업한 다작 화가로도 유명하다.
빈센트의 다작은 이러한 하이퍼그라피아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이퍼그라피아”란 끊임없이 글을 씀으로서 안정감을 찾는 일종의 정신 질환이자만 빈센트에게는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있다. 


5) 시엔 후닉

1882년 1월 말(30세), 빈센트는 다섯 살의 딸이 있고 임신 중인 알코올 중독자이자 매춘부인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후닉(Clasina Maria “Sien” Hoornik)”을 만났다. 그녀는 이전에 이미 죽은 두 아이를 낳았지만 빈센트는 이 사실을 몰랐고, 7월 2일에 그녀는 아들인 빌렘을 낳았다. 빈센트의 아버지가 그들의 관계를 알았을 때 그는 시엔과 그녀의 두 아이를 포기하라고 빈센트에게 압력을 넣었다. 빈센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지만 1883년 말 그는 시엔과 아이들을 떠났다. 그 후 시엔은 자신의 딸을 어머니에게 주었고 아들 빌렘은 오빠에게 주었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북부의 드렌테 지역으로 이사하였고 그 해 12월에 외로움에 못 이겨 브라반트 북쪽의 누에넨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렀다.

6) 누에넨과 마고 베게만

누에넨에서, 빈센트는 그림과 데생에 전념하였고, 몇 점의 ‘베짜는 사람’과 그들의 시골 집을 스케치와 유화로 그렸다. 1884년 말(32세), 이웃집에 살던 빈센트보다 12년 연상인 마고 베게만 (Margot Begemann)은 종종 빈센트가 그림을 그릴 때 함께 하였다. 그녀는 빈센트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도 약속하였지만 두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결과, 베게만은 자살하려고 스트리크닌을 과다 복용했으나, 빈센트가 그녀를 인근 병원으로 신속히 옮겨 살아났다.
 1885년 5월(33세)...,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 (Potato Eaters)>이라는 최초의 주요 작품을 완성하였고 그 해 8월에 그의 작품은 헤이그의 물감 판매점인 <러스(Leurs)>에 최초로 전시되었다. 누에넨에서 머무는 2년 동안, 빈센트는 많은 데생과 수채화 그리고 거의 2백 점에 가까운 유화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의 그림은 어두운 갈색을 주로 사용하여 음울한 느낌을 가지며 그의 후기 작품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빈센트는 그의 동생인 테오가 파리에서 자신의 그림을 파는데 노력하지 않는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테오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형의 그림들이 너무 어두워 현재 유행하고 있는 밝은 느낌의 그림들과 맞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7) 앤트워프

1885년 11월에 빈센트는 앤트워프로 이사하여 이마제 거리에 있는 물감 판매가게 위층에 작은 방을 얻었다. 그는 테오가 보낸 돈으로 미술재료와 모델을 구하였으며, 가난 속에 어렵게 생활하였다. 앤트워프에서 그는 색상 이론의 연구에 전념하였고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피터 폴 루벤스’의 작품들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림에 암적색, 코발트 블루, 에머랄드 그린 등의 색상을 추가하였고, 부둣가에서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를 샀는데 그 스타일은 훗날 그의 작품 일부의 배경이 되었다.










영원한 유토피아를 꿈꾼 원시주의 화가 폴 고갱(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3)

영원한 유토피아를 꿈꾼 원시주의 화가 폴 고갱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3)
 

책 속으로

1. 개요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에 출생하여 1903년 5월 8일에 사망한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이다. 그는 인상주의와는 명백히 다른 색상과 스타일을 실험하였고,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후 유명해졌고, 그의 많은 작품들은 러시아 수집가인 세르게이 쉬슈킨이 보유하고 있다. 그는 화가, 조각가, 판화 제작가, 도예가와 작가로 상징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2. 생애


1) 유년 시절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저널리스트인 클로비 고갱과 페루 출신인 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 사회주의 리더였던 플로라 트리스탄의 딸인 알리나 마리아 샤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850년 당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하여 고갱의 가족은 파리를 떠나 페루로 갔다. 여행 도중 아버지는 18개월 된 고갱과 어머니 그리고 고갱의 누이동생을 남겨 두고 사망하였다. 그들은 4년 동안 페루 리마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며, 이때 고갱이 경험한 페루의 이미지는 훗날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7세 때, 고갱과 그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친할아버지가 사는 올레앙으로 이사하였고, 그 곳에서 채소와 청과물을 판매하였다. 고갱의 뜻은 “호두나무 재배자”이다.

2) 군 복무와 파리 증권 거래소
14세 때 고갱은 리세 잔느 다르크에서 올레앙으로 돌아오기 전, 파리의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인스티튀트에 입학하였고 3년 후 해군에 입대하여 2년간 근무하였다. 1867년 7월 7일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였을 때, 그의 누이인 마리예가 쓴 편지가 인도에 있던 고갱에게 도착할 때까지 고갱은 몇 달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있었다.
1871년,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주식 거래 중개인 직업을 얻었는데, 이 직업은 어머니의 친구였던 구스타프 아로자가 ‘파리 증권거래소’의 일을 그에게 주선한 것이다. 그는 이 일로 파리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이후 11년 간 계속 그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고갱의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그는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3) 결혼
1873년, 그는 덴마크 출신의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하였다. 이후 10년 간, 그들은 에밀, 알린, 클로비, 장 르네와 폴 로롱 등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1884년, 고갱은 그의 가족과 함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여기에서 방수포 판매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사업에 실패하였다.
고갱이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결혼 11년 만에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그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은 고갱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고 그는 1885년에 파리로 돌아갔다. 그들과 고갱의 마지막 만남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출판사서평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인 폴고갱은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으로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증권거래소에서 일을 하다가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전업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문명을 벗어나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예술을 추구한 그는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로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4) 전업화가로의 길


1873년, 그가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던 시절 고갱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살았던 브뤼에르 가 15번지 근처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카페들이 있었다. 고갱은 갤러리를 방문하면서 신진 화가들의 작품들도 구매하였다. 그는 카미유 피사로와 친구가 되어 매주 일요일에 그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에 고갱은 생활비가 적게 드는 보지라르로 이사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작업실이 딸린 집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그의 집 근처에 살았던 친한 친구였던 에밀 슈페네커도 이전에 주식 중개인이었고 그도 화가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고갱은 1881년과 1882년에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출품작 중 [보지라르의 시판용 채소밭 (The Market Gardens of Vaugirard, 1879)]과 같은 일부 작품은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당시 그의 그림들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1882년, 주식시장이 붕괴되었고 미술시장이 축소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요 화상인 폴 뒤랑 뤼엘은 특히 큰 영향을 받았고 일정 기간 고갱을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 구매를 중단하였다. 고갱의 수입은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후 2년 동안 그는 전업화가를 준비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여름을 지나는 동안, 고갱은 피사로 그리고 가끔씩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1883년 10월, 고갱은 전업화가를 결심한 후 다음 해 1월에 가족과 루앙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 해 말, 메트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갔고, 고갱도 그녀가 떠난 직후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그 곳에서의 생활은 어려웠고 그들의 결혼 생활도 악화되었다. 친정의 지원으로 생활하던 메트의 성화로, 고갱은 다음 해 파리로 돌아갔다.

5) 파리와 퐁타방


1885년 6월, 고갱은 여섯 살난 아들인 클로비와 파리로 돌아왔고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의 메트와 함께 남았다. 고갱은 파리에서 미술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힘들고 가난한 첫 겨울...을 보냈다. 클로비는 결국 병이 나서 기숙학교로 갔고, 고갱의 누이인 마리예가 학비를 댔다. 고갱은 1886년 5월에 열린 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 19점의 그림과 한 점의 목조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러한 그림 대부분은 루앙 또는 코펜하겐에서 그린 초기 작품들이었고 순환 모티브의 하나가 된 [목욕하는 여인들 (Women Bathing)]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는 파리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불리던 조르주 쇠라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 ‘점묘법’을 거부하였고, 이러한 관점 차이로 피사로와 결별하였다.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 있는 예술가들의 공동시설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고갱은 뛰어난 복싱선수이자 펜싱 선수였고, 그의 그림만큼이나 기이한 외모로도 유명하였다. 이때 만난 새로운 친구들 가운데, 샤를 라발이 있었는데, 그는 다음해 고갱과 함께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에 동행하였다. 그가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그린 [목욕하는 브르타뉴 소년들 (Young Breton Boys Bathing)]은 드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러한 스케치들은 후일 파리 작업실에서 다시 물감 작업을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브르타뉴의 네 여인 (Four Breton Women)]이었다. 인상주의에 실망한 고갱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미술에 매료되었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이었던 자포니즘에도 매료되었다.











큐비즘의 개척자 파블로 피카소(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4)

큐비즘의 개척자 파블로 피카소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4)
 

책 속으로


1. 개요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는 1881년 10월 25일 출생하여 1973년 4월 8일에 사망한 스페인의 화가, 조각가, 판화 제작가, 도예가, 무대 디자이너,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큐비즘 사조의 공동설립, 구성 조각의 발명, 꼴라쥬의 공동 발명 등으로 유명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큐비즘 시대를 연 〈아비뇽의 처녀들1907〉과 스페인 내전 중 스페인 정부의 명령을 받아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를 폭격한 모습을 그린 〈게르니카Guernica, 1937〉가 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시대로 분류되는데, 청색시대1901-1904, 장미 빛 시대1904-1906, 아프리카 영향시기1907-1909, 분석적 큐비즘1909-1912과 수정시대Crystal period로도 불리는 종합적 큐비즘1912-1919이다.

2. 생애


1) 유년 시절


피카소는 다양한 성직자들과 친척들의 이름을 사용하여 “Pablo Diego Jose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i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isima Trinidad Ruiz y Picasso”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루이즈 이 피카소”는 스페인 법에 따라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받은 것이다. 스페인 알달루시아 지역의 말라가에서 출생한 그는 돈 호세 루이즈 이 블라스코와 마리아 피카소 이 로페즈의 맏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제노아 지역의 이태리 혈통을 가졌고, 그의 아버지는 주로 새를 포함한 조류를 그리던 미술학교의 교수이자 현지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었고 7세부터 아버지로부터 인물 데생과 유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91년에 그의 가족은 아코루냐로 이사하여 약 4년간 살았으며 그 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미술학교의 교수로 재작하였다. 1895년, 당시 일곱 살이었던 피카소의 여동생인 콘치타가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였고, 그녀가 죽은 후, 그의 가족은 바르셀로나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미술학교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며 피카소가 상급반 입학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학교 담당자들을 설득하였다. 이 과정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한 달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피카소는 이것을 일주일 만에 완성하여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의 입학을 허가하였다. 피카소의 아버지와 삼촌은 스페인 최고의 미술학교인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로 피카소를 보냈으나 학교 교육에 실증을 느낀 피카소는 입학 후 곧 학교를 중퇴하였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들은 피카소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특히 엘 그레코의 그림은 훗날 피카소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청색시대 이전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현재 유명 화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장소의 하나인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1896년에 첫 대작인 〈첫 영성체 (The First Communion)〉를 완성하였고, “후안 에두아르도 설로트”가 극찬한 〈뻬빠 숙모의 초상 (Portrait of Aunt Pepa)〉을 그렸다. 1897년에 그는 풍경 연작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모더니스트 시대(1899-1900)가 그 뒤를 따랐다. 1900년에 피카소는 파리로 첫 여행을 하였고, 거기서 파리 출신의 친구인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인 막스 자콥을 만났다. 1901년 첫 5개월 동안 살았던 마드리드에서, 피카소와 그의 친구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솔레”는 〈아르테 호벤 (Young Art)〉 잡지사를 설립하여 총 5권을 출간하였다. 창간 호는 1901년 3월 31일에 발간되었고, 이 무렵부터 ‘파블로 루이즈 이 피카소’로 그림에 서명하던 것을 ‘피카소’로 서명하기 시작하였다.

3) 청색시대


청색시대(1901-1904)는, 1901년 초반에 스페인 또는 그 해 후반기에 파리에서 시작된 시대로 청색과 청녹색을 주로 이용하고 그 외의 색상은 드물게 사용한 우울한 그림들로 특정되는 시대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수척한 모습의 어머니를 그린 많은 그림들은 청색시대부터 시작된다. 또한 매춘부와 거지를 주요 소재로 하는 주제도 많은데 피카소는 스페인 전역의 여행 경험과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자살에 영향을 받았다. 현재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생 (La Vie, 1903)〉 외에 카사헤마스의 사후 그와 관련된 몇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유명한 에칭 작품인 〈검소한 식사 (The Frugal Repast, 1904)〉에도 유사한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는데, 초라한 식탁에 앉은 수척한 맹인과 여인을 그렸다. 맹인은 당시 피카소의 주요 소재였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맹인의 식사 (The Blindman’s Meal, 1903)〉와 〈셀레스티나 (Celestina, 1903)〉의 초상화에도 나타나 있다. 기타 청색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솔레의 초상 (Portrait of Soler)〉과 〈수잔 블�


출판사서평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난 파블로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을 한 입체파 화가로 르노아르, 툴루즈, 고갱, 고흐 등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 청색시대를 거쳐 조르쥬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한 20세기 최고의 거장이다. 광대, 곡예사가족, 아비뇽의 처녀들의 작품과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그려낸 세기의 작품 게르니카를 그렸으며,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과 평화 등의 대작을 발표하는 등 현대미술의 리더로서의 수장다운 활약을 하기도 했다.이 책은 미술사적 관점 뿐만 아니라 영화와 음악 등 3개 영역에서 작가를 조망한 책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 미술에 입문하려는 사람 뿐만 아니라 관심있는 일반인에게도 쉽게 읽혀지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썼던 작가들의 순탄치 않았던 생애와 예술세계를 통해 오늘날 현대인들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빛을 그린 인상주의 개척자 클로드 모네(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5)

빛을 그린 인상주의 개척자 클로드 모네
(미술과 영화 그리고 음악이 만나다 5)
 


책 속으로

1. 개요

본명은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로 1840년 11월 14일에 출생하여 1926년 12월 5일에 사망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이며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1883년부터 지베르니에서 그의 최고 걸작인 수련 연작을 시작하였다. 1926년 12월 5일 폐암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생애
1) 어린 시절
모네는 1840년 11월 14일, “클로드 아돌프 모네”와 “루이스 저스틴 오브레 모네”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1841년 5월 20일에 동네 교회에서 “오스카 클로드”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부모는 그를 항상 “오스카”로 불렀다. 1845년, 그의 가족은 노르망디의 ‘르아브르’로 이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업인 식료품 사업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가수였다.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1851년 4월 1일, 르아브르의 중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캐리커처를 즐겨 그렸고 동네 사람들의 캐리커쳐도 그려 동네에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모네의 예술적 재능을 싫어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화가보다는 가업인 식료품 사업을 이어 받기 원하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모네의 이러한 예술적 재능과 노력을 지지하였다.
모네는 “쟈크 루이 다비드”의 학생이었던 “쟈크 프랑수아 오샤르”로부터 최초의 그림 수업을 받았다. 1856년, 모네는 노르망디 해변에서 “외젠 부댕(Eug?ne Boudin)”을 만났다. 그는 모네의 재능을 알았고 그에게 유화를 가르쳤다. 모네는 부댕에게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기술 가운데, 특히 순간적으로 빛을 포착하는 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부댕의 영향은 모네가 후일 풍경화가로서 발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부댕과 모네 두 사람은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였다.

2) 알제리 군복무와 파리 유학 시절
1857년 1월 28일, 모네가 17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학교를 떠나 자식이 없는 부유한 미망인이었던 고모이자 초기 후원인이었던 “마리 쟌느 르카드르(Marie-Jeanne Lecadre)”와 함께 살았다. 19세인 1859년에 모네는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으나 1861년 3월에 아프리카 알제리의 경기병 1연대로 징집되어 군복무를 시작하였다. 모네는 알제리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북아프리카 성채의 모습을 그린 몇 점의 스케치, 한 점의 풍경화와 장교들의 초상화 몇 점을 그렸지만 현재 이 작품들은 모두 분실되었다. 군 입대 시 예정 복무 기간은 7년이었으나, 입대 1년 후 그는 불행하게도 장티푸스에 걸렸다. 모네의 고모는 그가 회복 후 미술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조건으로 제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군대 제대 후 몸이 회...복되자 1862년에 파리에 거주하던 스위스 화가인 “샤를 글레어”의 학생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전통미술에 대하여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레데릭 바지유”와 “알프레드 시슬레”를 만났다. 그들은 야외 빛의 효과를 효율적으로 포착하여 그리는 새로운 미술 접근 방식을 함께 토론하면서 훗날 인상주의라는 미술 사조를 구축하였다.
1865년 1월, 모네는 2년 전 마네의 작품인 <풀밭 위의 점심(Le d?jeuner sur l’herbe)> 출품을 거절한 파리 살롱전에서 개최하는 1866년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기 위하여 <풀밭 위의 점심> 습작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모네의 작품은 규모가 방대하여 출품 마감일까지 완성할 수 없었으므로, 이 작품 대신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를 모델로 한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The Woman in the Green Dress)>을 출품하여 살롱전에 전시되었다.
이 그림은 살롱전에서 모네의 존재를 인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가 이전까지 받아보지 못했던 큰 금액인 800 프랑에 그림이 팔려 모네의 재정적 어려움 해소에도 다소 도움을 주었다. 모네는 아내인 카미유를 모델로 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1866년 작품인 <정원의 여인들(Women in the Garden)>과 1868년 작품인 <센 베네쿠르 강변에서 (On the Bank of the Seine, Bennecourt)>도 아내 카미유를 모델로 그린 그림들이다.



출판사서평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난 클로드 모네는 르아브르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며 외젠부댕을 만나 외광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과 네델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로 부터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방법을 익혔으며, 이후 파리에서 피사로, 르노아르, 시슬레, 바지유등과 사귀며 공부를 했다. 이들의 우정은 새로운 생각과 열정이 반영된 미술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게 된다.
이후 1873년 인상주의의 모태가 된 무명예술가협회를 조직하고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 모네는 《인상, 일출》을 출품했는데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가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수련》연작은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만년에 살았던 지베르니(Giverny), 아르장퇴유(Argenteuil), 푸아시(Poissy) 그리고 베퇴유(V?theuil는 오늘날 모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례장소가 되고 있다.
이 책은 미술사적 관점 뿐만 아니라 영화와 음악 등 3개 영역에서 작가를 조망한 책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 미술에 입문하려는 사람 뿐만 아니라 관심있는 일반인에게도 쉽게
읽혀지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작가들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통해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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