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2018. 11. 25. 19:02미술/미술 이야기 (책)




파블로 루이즈 이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 10. 25 - 1973. 4. 8


아버지 : 돈 호세 루이즈 이 블라스코 /

어머니 : 마리아 피카소 이 로페즈 /

피카소가 사용한 자신의 姓은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이다. 즉 원래는 아버지의 성을 따라 '파블로 루이즈'가 맞는 것이다. 왜 피카소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였을까?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미술계로 인도한 스승이지만, 피카소에 대한 큰 기대로 그를 단속하고 계속 관여하여, 다투는 과정 속에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이 생긴 것 같다. 





피카소 9세 때 작품

 

 


 

 

 

피카소 16세 때 그린 작품들






벨라스케즈의「시녀들」을 재해석







*




*







피카소의 女人들



피카소가 평생동안 사귀었던 여러 여자들에게 했던 행실·행적을 보면('바람둥이'는 제쳐놓고), 완전 개차반인 놈인데,

이렇게 사생활 & 인격과, 예술 & 학술적 성과물이 딴판인 경우,,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평가해야 할런지가‥ 참으로 딜레마입니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화가이자 모델이었다. 두 사람은 1904년 세탁선에 피카소가 정착할 무렵에 만났고, 피카소는 올리비에의 초산화 60점 이상 그렸다. 피카소는 페르낭드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유부녀였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들의 관걔는 피카소의 작품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고 '장비빛 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화가로서 성공할 무렵 피카소는 그녀에게 흥미를 잃고 결국 1902년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헤어진 후 20년 후에 그녀는 <피카소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동거할 때의 생활을 담은 화고록을 썼다. 





 



에바 구엘은 올리비에의 가까운 친구였다. 피카소가 올리비에와 관계를 청산하면서 그녀와 새로이 연애를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그녀를 그린 적은 없지만 "나의 어여쁜 여인"이란 말을 그림들에 남기면서 그녀에 대한 사란을 표현하였다.

그녀는 1916년에 결핵으로 사망하였고, 피카소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그녀를 떠났다.








 러시아의 발레 무용수이며 피카소의 첫번째 부인이자 그의 아들인 파올로의 엄마이다. 두 사람은 1917년에 만나 다음 해인 1918년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 아들 파울로를 낳았다. 그러나 1926년부터 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927년에 피카소는 17세의 마리 테레즈 발터와 연애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올가는 마리 테레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들과 한께 남프랑스로 떠났으며 피카소에게 이혼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이혼할 경우 프랑스 법에 따라 자신의 재산 절반을 주어야 하므로 피카소는 이혼을 거절하였다. 그기하여 올가는 죽을 때까지 피카소의 법적인 아내로 살면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1927년에 피카소와 만나 1935년까지 연인이었으며 아들도 하나 출산하였으나, 피카소가 도라 마르와사랑에 빠지면서 끝났다. 훗날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 발터와 도라 마르 가운데 한 명을 고르라고 했을 때 둘이 싸워서 결정하라고 말했으며 이 때 두 여인은 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피카소응 이것을 "자싱의 좋은 추억 중 하나"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언젠가는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 피카소가 죽고 4년 후인 1977년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





 



1936년 시인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도라와 피카소는 만났다. 사진작가이자 화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영원한 동료이자 연인이었다. 그녀는 피카소의「게르니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종종 슬픈 도라를 그렸고, 피카소는 그녀를 "나의 뮤즈" "눈물의 여인"이라 불렀다.

피카소 인생의 모든 여인들과 같이 도라는 피카소에게 감정적인 학대를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을 때 도라 마르는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 노력하면서 죽어가는 가난하고 외로운 여인이 되었다. 피카소는 또 다른 여인 프랑수아 질로 때문에 도나를 떠났다. 





 



피카소와 질로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질로는 종종 피카소의 법적인 아니엔 올가로부터 길거리에서 괴롭힘을 당했다. 피카소의 다른 여인들과 달리 질로는 그의 모욕적인 학대와 외도로 1953년에 피카소를 떠났다. 헤어지고 11년 후, 질로는 피카소가 출판을 중단시키려던 <피카소와 함께 한 삶>을 썼다. 그때부터 피카소는 둘 사이의 자녀들을 만나지 않았다.





 



1944년, 17세의 제네비에브 라포테는 학교 신문기사를 쓰기 위하여 피카소를 인터뷰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51년, 질로와 살고 있던 70세의 피카소는 24세의 그녀와 정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질로가 떠난 후 피카소는 라포테가 그의 집으로 오기를 원했으나 그녀는 거절하였다. 그녀는 동료인 파리 출신의 레지스탕스 전사와 결혼하였다.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의 두 번째 아내이며, 피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를 400전 이상 그렸다. 그녀가 27세였고 피카소가 72세인 1953년에 그가 도자기를 만들고 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던 마두라 도예작업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피카소가 오랜 구애 끝에 1955년 올가가 죽었을 때 그는 결혼할 수 있었다.

1973년 피카소가 죽은 후, 질로는 피카소의 재산 분배로 로크와 싸웠다. 피카소의 두번 째 결혼은 자신을 떠난 질로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다. (※ 질로는 아이들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피카소의 말을 믿고,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피카소와 결혼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피카소는 질로가 이혼한 후 자클린과 몰래 결혼하였다.)

자클린 로크는 59세인 1986년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