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2017. 11. 27. 13:53미술/미술 이야기 (책)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2011. 9

 

 

 

저자 : 김용익


저자 김용익은 1968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그만두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면서 미술에 입문하였으며, 자의적으로 선택한 미술이었기에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 온 자칭 “괴로운 타입”의 예술가이다. 1980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대학조교,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전문대학 교수 등을 거쳐 현재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살아 온 경험을 진지하게 들려주는 미술 교육자이다. 1970년대 이후 물질과 이미지의 대립 관계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개진한 일련의 천 작업, 모더니즘의 인증된 이미지 권력에 흠집을 내고자 시도한 〈가까이… 더 가까이…〉라는 제목의 캔버스 작업, 이전의 캔버스 작업 위에 물감을 덧칠함으로써 지워버리는 〈절망의 완수〉 시리즈 작업 등을 선보였다. 또한1998년 광주비엔날레 정상화를 위한 범미술위원회 위원장 활동에 이어 대안공간 풀 설립(1999년)과 미술인회의 창립(2003년) 등에 관여하였으며, 문화관광부에서 주관한 공공미술 추진위원회 위원장(2006년~2008년)으로 활동하는 등 미술 안에서만 미술을 사고하기보다는 문화 안에서의 미술을 사고하며 실천해 온 공공미술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지난 3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써온 수많은 글을 통해 자신의 작업과 전시는 물론 한국 현대미술, 모더니즘, 공공미술, 미술제도, 미술교육, 더 나아가 한 상식적 지식인으로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개인 블로그에 축적된 글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책머리에

 

 

김용익이라는 작가는 미술이 성립되는 기초 전체, 즉 천이건 나무판이건 '물질'이라는 것과 '이미지'라는 것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팽팽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미술'이라는 명제 자체의 성립 근간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김용익의 글과 작품에서 77편의 글과 100장의 이미지만을 골라 수록한 그의 '온몸 미학'의 일부분일 뿐이다.

 



1. 프롤로그


나를 소개한다

 

 

돌이켜보면 저는 미술을 나의 숙명처럼 받아드렸다기보다는 지극히 자의적으로 미술을 선택하였고, 나의 이러한 경험과 선택은 미술과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미술, 작업, 작품에 무반성적으로 투신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나는 왜 그리나? 무엇을 그리나? 누구를 위해 그리나? 이런 의문을 품어보고 골똘히 생각하는 그런 (괴로운) 타입의 미술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점차 미술을 '미술 그 자체 안'에서 사고하기보다는 '문화 안에서의 미술'로 사고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활'과 '사회' 안에서의 미술을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모더니즘 미술보다는 공공미술에 더 끌리게 되고 작업실에서의 창작 못지않게 제도의 개혁과 비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술'은 미술시장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대중에 교태부리는 미술이 아닌 '미술', 도구적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성공신화, 능력주의로부터 밀려난 것들을 보듬는 '미술'은 무정한 자본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미션입니다.) 이 보호의 주체가 미술가 개인이 되기에는 너무 버겁습니다. 미술을 위협하는 힘이 너무 강해ㅑ졌고 미술가 개인의 힘은 상대적으로 더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보호의 주체는 그 어떤 공공의 힘이 되어야겠죠.  제가 공공의 장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잇습니다.

 

 

 


2. 논리와 순리


논리와 순리
상식, 감수성 또는 예감
나의 최근작
물질과 이미지 간의 화해
평면 오브제
개념을 통한 개념의 극복


3. 가까이... 더 가까이...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내로우 베이스드 스페셜리스트의 노트1
내로우 베이스도 스페셜리스트의 노트2
다이얼로그, 모놀로그
인증된 모더니즘과 비판적 모더니즘
좋은 작품의 기준


4. 절망의 완수


얼룩들
무능력의 천민 집단, 여성
예술과 돈
한국에서 정치미술이 약한 것은 가족주의 때문이다


5. 미술민주화의 지평을 열기 위하여


순수성에 나타난 예슬과 인생의 분리
나의 전제
개념주의로 본 현대미술
(좌담)미술민주화의 지평을 열기 위해
풍경, 곰팡, 여름... 그리고 절망 또는 종생기
비엔날레와 대안공간
대안은 모더니즘의 퇴행에서부터
정치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의 연결을 보여주기


6. 당신들의 낙원에서 우리들의 낙원으로


선망의 정치학에서 누림의 정치학으로
공공미술은 어려워
공공미술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이 시대에 공공미술이 왜 필요합니까?
예술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2009년 11월, 북아현동으로의 추억 여행
이시무레 미치코와 메이플소프의 환상과 전복적 비판성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 불온한 꿈
체제 안의 우군과 연합하라
정처없는 글쓰기


7. 왜 제가 이럴 수 밖에 없는지


홍씨 상가
우리의 위기의식은 허위가 아닌가
C선생님께
전시회를 열며...
개인전을 마치며
이 지적 사기극을 고발한다
대지의 복수
원 나이트 스탠드
캡션을 수정해주마
경기도지사님께
P에게


8.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레슨 3
레슨 4
나는 소극적 전략을 믿는다
부모님 전 상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미술 전공해도 먹고 살 수는 있으니 오히려 미술을 걱정해


9. 무통문명에 소심하게 저항하기


무극보양 뜸
쏘 쿨한 글
성배의 진실
The Holy Grail
인도 기행
다크 마운틴 프로젝트의 여덟 개의 비문명 강령
나는 국가을 믿지 않는다
4대강에 대한 사적 대화
무통문명에 소심하게 저항하기 1
무통문명에 소심하게 저항하기 2
나는 오래된 미래를 준비한다


10. 에필로그


쑥개떡에 부쳐

 


참고문헌

 

 

 

 

 

 

 

 

 

 

 

 

 

 

 

 

 

 

 

아, 독후감을 이렇게 성의 있게 잘 쓰는 사람도 있구나!

 

 

좋아하는 동시대 화가를 꼽으라면 내 그림 취향에 딱 들어맞는 몇몇 화가 이름을 떠올린다.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미술 분야를 파고들수록 취향은 까다로워지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명확해진다. 때문에 순간적인 호감이 아닌 '뇌리에 남는' 미술가의 이름을 떠올리는데에는 열 손가락을 넘는 경우가 없다. 최근 내 리스트에 한 명이 추가되었는데 바로 김용익 작가다.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하는데 솔직히 난 그가 누군지 몰랐다. 아마 그의 이름을 듣거나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한들 쉽게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그의 작품은 내 취향과 거리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내가 미술 전시장에서 마주쳤을 때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가 내 리스트에 올라갔을까? 답을 공개하기 전에 조금 더 그의 작품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김용익 작가의 작품은 커다란 천을 군데군데 접어서 전시장 벽에 걸어놓거나, 캔버스에 동그라미를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넣는 소위 땡땡이 그림이거나, 포장박스를 쌓아놓는 식이다. 만약 우연히 들어간 미술관에서 이런 작품을 보았다면 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이런 것좀 제발 그만! 옛날 모더니즘 작가들의 철 지난 권력이 아직도 전시장에서 근엄하게 작동하고 있구나!" ... 한국 화단을 지금까지 일궈온 까마득한 선배들의 노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시하는, 머리에 피도 안마른 젊은 작가의 배은망덕한 생각이라고 비난한다면 마땅히 대응할 말은 없다. 그런데 김용익 작가의 저서를 읽어보니 작품 의도를 오히려 '인증된 모더니즘 이미지 권력에 흠집내기'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짐짓 당황스러웠다. 논리적-개념적으로는 그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내 눈에는 그의 작품들 역시 '인증된 모더니즘 권력'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근엄한 권력으로 비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해서 간단한 내 견해를 밝히자면, 그 당시에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겠지만 지금에는 대부분 '기념비적 가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예컨대 회화의 평면성이라고 해 보자. 모더니즘 당시에 평면성은 회화에서 누구나 꼭 집고 넘어야 할 숙제이며 그 자체가 커다란 화두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구태여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술에 있어서 평면성이라는 것은 더이상 이론적으로 극복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시각적으로(문화적으로) 이미 대부분 획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평면성 자체를 화두로 삼고 있는 미술 형식을 마주칠 때면 약간의 고리타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김용익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모더니즘 권력에 흠집내기'가 그의 목표라고 한들, 모더니즘 형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당연히 그의 전략이지만)은 세심하지 않은 내 시각에서는 "결국 그게 그거 아님?"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김용익 작가를 포함한 모더니즘 미술이나 권력에 대한 글을 쓰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이 즈음에서 그만 하기로 한다.


 

눈치챘겠지만 '좋아하는 화가 리스트'에 김용익 작가가 올라간 것은 작품과 작품론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저서,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를 읽어본 뒤 그에게 매료되었다. 김용익 작가의 글은 이전에 미술과 관련해 접했던 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글이었다. 이미 한국미술 역사의 일부를 대표했고, 이제 70을 바라보는 '미대 교수님'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글과도 거리가 멀었다. 확신에 찬 어조로 영광스런 지난 날들을 회상하고 곧이어 젊은 작가들에게 "이렇게 해봐!" 라고 훈계하는 식의 '꼰대'가 될 자격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정 반대의 모습을 글에서 보여주었다. 어떤 문장을 자신있게 쓰고, 곧바로 뒷 문장에서 "정말 그럴까?" 라고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회의하고 점검해보는, 그리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글쓰기의 태도에서 나는 '진정한 작가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작가로서 스스로의 내적 흔들림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공개적인 글쓰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사유하는 방식은 기존의 미술 잡지나 평론 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흔들림을 고백하는 글의 강력함이 뭔지 알게 되었다.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아! 이렇게 접근하면 되는구나." 라는, 미술에 있어서 일종의 '방법론'을 배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게 사실 그가 전파하고 있는 '개념 미술'이 아닐까?)


 

특히 군사독재 시대에 불어온 '현실 참여형' 민중미술의 광풍을 속으로는 동경했지만 자신과 맞지 않은 미술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미술-사회와의 관계를 여태껏 구축해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모더니즘의 상징이었던 인습적인 화이트큐브 미술을 탈피하고자 공공미술 활동을 전개하지만 한편으로 '예술가 신화'가 살아있는 개인 작업실과 갤러리 공간의 달콤함을 그리워하는 장면도 재미있게 읽었다.  또 좀 부숴지거나 더럽혀져도 괜찮고 누구나 만들 수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그의 기준도 신선하다. 종합해보면 김용익 작가의 작품보다는 작가로서 그의 태도에 매료된 셈이다.  하지만 과거에 완성된 작품에 반복적인 검은 붓질을 가하는 그의 최근작 <절망의 완수>시리즈는 작품으로서도 마음에 든다. 그는 블로그에서 <절망의 완수> 시리즈를 '시각적 예쁨을 유보한 개념적' 인 것이라 스스로 정의내렸지만, 나는 개념(자기반성적인, 마치 그의 글쓰기와 같은,)도 흥미로울뿐더러 그 작품의 '시각적 예쁨'이 나를 사로잡았다. 언젠가 실제로 보고 싶은 작품이다.


 

흔히 미술을 시각예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미술을 너무 좁은 틀 속에 가둬버리는 것은 아닐까. 왠지 모르겠지만 김용익의 글쓰기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엄연한 '미술 행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의 글들은, 단지 작품과 별개로 떨어진 작가노트를 엿본 느낌이 아니라 마치 미술 작품을 감상한 듯한 느낌이다. 이것도 미술이다.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작가
김용익
출판
현실문화연구
발매
2011.09.06
평점

리뷰보기


 


36

내가 나의 작품을 짐짓 함부로 다루는 것도 이러한 배려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천을 끊어 쓸 때도 일부로 대충 적당한 길이로 죽죽 잡아 째고, 전시실에 걸 때도 맘에 들지 않게 걸리기라도 하면 휙 잡아 낚아채 떼어냈다가 다시 걸기도 한다. 전시가 끝나면 빨래 걷듯이 걷어서 되는대로 개켜서 옆구리에 끼고 오면 그만이다. 나는 작품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서 상당히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상식의 차원을 깨뜨리는 데서 오는 쾌감이 분명한데, 요즘 나는 이 쾌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다.


45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시각화하려는 명제가 무엇이며 그 명제가 얼마나 명료하게 전달되고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만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관점은 곧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낳게 마련이었다. 즉 명제를 가장 순수한 상태로 전달하기를 갈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비물질 언어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미술작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67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모더니즘의 의미는 마이너스 방향으로 잡혀 있다. 그것은 복잡보다는 단순, 확대보다는 축소, 성장보다는 감소, 외향적이기보다는 내향적, 생명보다는 죽음의 방향으로 잡혀져 있다. 이 마이너스 방향의 의미와 가치가 모더니즘이 남긴 돌멩이다. 그리고 이것이 플러스적 가치가 지배하기 마련인 이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모더니즘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71

내가 정해놓은 좋은 작품의 기준은, 첫째는 만드는 데 힘(노동력)이 적게 드는 작품이어야 하며, 둘째로 만드는 데 히 돈(재료)이 적게 드는 작품이어야 하며, 셋째는 만드는 기술이 특별한 것이 아니어서 누구나 나와 똑같이, 똑같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넷째는 운반하기 쉽고 편리한 작품이어야 하며, 다섯째로 좀 찢어진다든가 더렵혀진다든가 약간 부서져도 괜찮은 작품이어야 하는데, 요즘 나의 작품들이 대체로 이 기준에 맞아 들어간다. 좋은 작품의 이 기준을 저엔트로피 미술이며 개념적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77

나는 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해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교육받은 미술 대중을 상대로 게임하기를 원했다. 


87

나는 어디까지나 작가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작가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전략, 작품이면서도 작품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바, 이것은 김수영이 말하는 '고독하고 비겁한 원군'의 전략이라고 믿는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이상주의자가 아니며, 나아가 우리는 이상주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모든 사태를 단칼에 재단하여 답을 얻으려는 이상주의의 관성에 젖어 이러한 전략을 비겁하다고 보기에 김수용은 고독을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119

화가로서의 남은 과제를 이전의 캔버스 작업 모두를 하나하나 검은색으로 덮어가는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더 이상 덮을 게 없을 때 화가로서의 나의 과업은 끝난다. 검게 덧칠한다고 해서, 금은 회화라 해서 말레비치나 라인하르트의 표면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내 것은 붓자국이 보이고 희끗희끗 비백이 보이고 중간중간 칠하다 만 부분도 보이고 무어라 중얼중얼 써놓은 글도 보인다. 물론 원래 그렸던 그림도 검은 색 사이로 보인다. 작품이 작업을 은폐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작품이 내 삶을 가리우는 것을 피하고 싶다는 제스처로 그렇게 해봤다.


180

퇘행. 나는 모더니즘의 대안을 수행하려면 모종의 퇴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모종의 퇴행.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승리의 역사 속에 떠오르는 예술의 자율성, 개인적 독창성, 고립적 천재성 등의 개념으로부터 물러난다는 의미에서의 퇴행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더니즘 미학으로 탄탄히 무장한 학교, 화랑, 언론매체 등을 아우르는 제도권적인 미술 제도로부터의 퇴행이자 그것에 대한 '조용한 혁명'을 포함한다. 


240

이 '소외 지역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철저히 체제 순응적이다. 소외 지역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접근은 외면하고, 소외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모순적 차이를 예술로 덮으려 한다. 물론 예술가에게 사회학자나 빈민운동가의 위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의 이름으로 이러한 모순된 현장을 분칠하는 역할은 하지 말아야 한다.


292

나는 결코 학생들의 작품을 칭찬할 수 없다. 그들의 재능을 칭찬해줄 수 없다. 가치와 당위가 무너지 시대, 패러다임이 깨진 미술계, 그리하여 사기의 가능성이, 아니 사기가 횡행하는 미술계를 앞에 두고 순진하게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재능 있다는 소리만 믿고 화가의 꿈을 키워오고 있느 그들을 나는 무책임하게 칭찬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출처] 김용익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_ 반성의 강력함|작성자 오쟁

 

 

 

 

 

 

 

 

 

 

 

 

김용익, '평면 오브제', 1977, 천 위에 에어브러쉬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익, '평면 오브제', 1977, 천 위에 에어브러쉬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나는 74년 이후 일련의 천으로 된 작품을 해오면서 <평면 오브제>란 제목을 붙여왔었다. 천이 갖고 있는 2차원적 회화 공간으로서의 평면성과 3차원적 물질성에 동시에 주목함으로써 현대회화가 추구해 마지 않았던 '일루전과 재현의 거부'란 명제를 내 나름대로 깔끔하게 소화하고 있음을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젠 <평면 오브제>란 제목이 한정해주는 평면성과 입체성의 동일화 문제에만 만족할 수는 없게 됐다. 회화란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의 해석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명제의 해석, 아이디어의 실현만을 명쾌하게 해내려고 하면서도 그것과는 관게없이 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재료의 표정 등에 상당한 배려를 해왔던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되었다.

작품이 작품으로 나타난 양상, 내가 작품을 만들어 내보이는 수법, 이것은 결국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평범한 얘기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다. 내 작품의 명제는 <물질과 이미지의 대립관계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개진이다>라고 한다면 제일 깔끔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내가 문제 삼고 있었던 것은 새로운 명제가 아니라 한 명제의 다각적 해석과 연습이었다.

 

 

 

 

 

 

 

 

 

 

------------
오브제 objet
------------

본래 '오브제(objet)'는 물체, 대상, 객체 등의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이나 미술에서는 예술과 무관한 물건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하여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를 말한다. 오브제 사용의 대표적인 작가인 마르셀 뒤샹은 일상적인 물체를 선택한 뒤 그 위에 짧은 글을 새겨 넣거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일상용품을 예술품으로 변환시키는 '레디메이드'를 발명했는데, 이는 최초의 오브제 작품이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보는 사람에게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로 오브제를 사용하였다. 정크아트와 같은 폐품을 사용한 조각은 오브제의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
콜라주 collage
--------------

주로 그림 위에 붙여 병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19세기에 종이를 잘라 한데 붙여 장식적 구도를 만드는 '파피에 콜레'(papiers collés) 기법이 처음 생겨났다. 1912~13년경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이 이 기법을 확대하여 종이, 나무, 리놀륨, 신문지 조각을 유화 위에 덧붙여 미묘하고 재미있는 추상적 또는 반추상적 구도를 만들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 기법 개발은 분석적 입체파가 종합적 입체파로 바뀌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콜라주'라는 낱말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 특히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을 가리킬 때 처음 사용되었다. 에른스트의 콜라주는 오래된 판화와 인쇄물을 교묘하게 잘라 붙여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이미지를 만든 것이었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콜라주는 끈이나 넝마 조각, 나무토막, 철사, 못, 종이 따위를 활용했다. 앙리 마티스가 말년에 만든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는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콜라주 기법의 변형을 채택한 것이다. 미국의 조지프 코넬은 친밀감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유리 진열장에 콜라주 기법을 확대해 적용했다.

1960년대에 콜라주는 팝 아트의 주요형태로 절정을 이루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는 신문과 잡지 사진을 실크스크린 인쇄물과 결합하여 미국 역사와 대중문화를 혼합한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
일루전 illusion
--------------

착각이나 환상, 망상. 작품을 감상할 때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심적 과정(心的 過程)의 자기 착각.


--------
모더니즘
--------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
포스트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의 입장에 서서 문학과 철학사조의 관점에서 설명드립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비교는 아주 쉽습니다.

여기 사과가 있습니다. 모더니즘 적으로 사과를 바라보면, 이 사과는 빨갛게 잘 익은 부분과 시퍼리 둥둥하게 덜 익은 부분이 있다. 일부는 반들반들 윤이나고 일부는 벌레가 먹어 썩어있다.

이렇게 바라보고, 이중에 빨갛게 잘익은 부분과 반들반들 윤이나는 것만 취하고 시퍼리 둥둥한 덜익은 부분과 벌레가 먹은 부분은 배격합니다.

즉 모더니즘은 어떤 사물의 좋은 부분만 취합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이분법적 사고관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흑-백, 신-인간, 사람-동물, 주인-하인...
이런식의 이분법적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중 좋은 것만 택합니다. 백, 신, 사람,주인...

철학적인 사조로는 실증주의에 해당되며 대표인물로 꽁트가 유명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역시 이 모더니즘의 최악의 산물 입니다. 우등한 인자를 가진 사람(순수 게르만) VS 그외

모더니즘의 최후는 바로 전쟁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아까 얘기한 어떤 사물의 나쁜 부분 즉 이분법에서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배격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핵폭탄이 터지고 인류는 깨닫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가.. 하고요.

그래서 나온것이 post-mordernism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사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빨갛게 잘익은 부분과 시퍼리둥둥 덜익은 부분, 반들반들 윤이 나는 부분과 벌레 먹은 부분, 모든 것이 사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철학적으로는 야스퍼스,하이데거로 유명한 실존주의가 이에 해당합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나 노자 장자의 사상이 이에 해당합니다.

즉 모든 것의 존재함은 서로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함이다.. 이렇게 보는거죠.

예를 들어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있죠.
즉 Everything is Noting, Noting is Everything 입니다.
모든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모든 것이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구요?

이런 겁니다.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볼때 1+1 = 2 입니다. 그외의 경우는 다 배격하죠.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적 관점에서 볼때 1+1= 반드시 2가 아닙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인정하죠.
예를 들면, 공기방울 하나 더하기 공기방울 하나는 공기방울 하나 입니다. 즉 1+1 = 1이지요.
남자 + 여자는 남자,여자,애기 입니다. 즉 1+1 = 3입니다.
이렇게 보면 1=2이고 1=3입니다. 1=4 일수도 있고 1=100 일수도 있습니다. 즉 100을 everything으로 보고 0을 Nothing으로 보면 이제 Everything is Nothing, Nothing is Everything을 이해하시겠죠.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또다른 예를 들어보면,
나비의 날개짓이 전 지구를 흔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가 날개짓 한것이 주변의 바람을 흔들리게 하고 그 흔들린 바람이 풀을 흔들리게 하고, 나무를, 빌딩을,땅을 흔들리게하고 전 지구를 흔들리게 하는거죠.
즉 모든 것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상은 적과 나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 그 존재를 다 인정합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문학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실주의 - 자연주의 -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연결 됩니다.

근대 문학사조에 보면 사실주의가 등장을 합니다.
사실주의의 무미건조함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것이 자연주의 입니다.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한국 작품.. 아시죠?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입니다.
그 후 자연주의의 사실에 대한 과대한 부풀림에 반발로 등장한 사조가 바로 모더니즘 입니다.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사조가 포스트 모더니즘 입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의 이유는 위에 설명 드렸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시조는 보통 자크 데리다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의견은 분분함)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이하게 중남미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옥타비오 빠스의 La Calle (거리에서)와 같은 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시 입니다. 노벨상도 탔지요.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은 어떤 특정한 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정일씨가 쓴 라디오란 시가 있습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라디오가 되었다." 후략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꽃만 라디오로 바꿔 쓴 것입니다. 모더니즘 적 관점에서 보면 이게 무슨 시냐고 할 수 있지만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런 장르도 다 수용합니다.

꽃이나 라디오나 그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꽃이라고 명명한 것이지 그것의 원래이름은 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요. 너무 어렵나요?

여하튼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어떤 호칭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La calle라는 시도 이거리에 걷는 발자국 소리를 저 거리에서 듣는다...이런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 썼듯이 모더니즘적 사고로 보면 1+1은 2입니다. 바꿔예기하면 이 사물은 꽃 입니다. 꽃 이외의 단어는 다 틀린거지요.
하지만 장정일씨는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라디오라고 불렀습니다. 왜?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꽃이라는 이름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른 것일 뿐이지요.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모든것을 수용하는 것) 1=2, 1=3, 꽃=라디오 입니다. 즉 모든것을 다 수용하고 accept하는 거죠.

포스트 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그것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이름이 꽃인지 라디오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꽃이란 사물의 이름은 우리가 지은 겁니다. 영어로는 Flower 스페인어로는 Flores 한국말로는 꽃 등등...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지, 그것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이 꽃이건 라디오건 중요치 않다고 말씀드린거구요. 그 본질 자체, 그 존재의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는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형식이나 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틀이나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참고로 탈구조주의, 다원주의,반권위주의등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입장입니다.



[출처] 포스트모더니즘 입장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비교|

 

 

 

 

 

 

 

 

 

 

 

 

 

 

 


---------------------------------
아방가르드 avant-garde , 前衛藝術
---------------------------------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원래 군사용어로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돌진하는 부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후 19세기초에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정당과 당원을 가리키는 정치용어로 사용되었고, 19세기 중반부터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지금까지의 예술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예술경향이나 그 운동을 뜻하는 예술용어로 정착되었다.

전위예술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미학적 자의식 또는 자기 반영성을 들 수 있다. 전위예술가들은 신비감을 주기 위해 작품을 장인적·귀족적으로 만들고 자신의 주관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시각적·언어적으로 꾸미게 된다. 둘째, 동시성을 들 수 있는데, 전위예술가들 가운데 특히 소설가는 작품 안에 연속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현재·미래를 응축시킨 심리적 시간을 중요하게 다룬다.

셋째, 역설·모호성·불확실성을 들 수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전위예술가들은 현실 속에서 극히 모호한 이미지와 서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소설가들은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니라 1인칭이거나 매우 제한된 시점을 사용했고, 작품의 결말을 독자가 작품 밖에서 판단하도록 미루거나 전망을 제시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주체의 붕괴 또는 비인간화를 들 수 있다.

19세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에서 등장인물들은 구조화된 인격을 지니며 사회와 상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나 극작가는 행위나 심리상태의 묘사를 통해 종합적 인격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특징은 산업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가중되는 산업사회에서 예술가는 새로운 전문직, 문화의 시장 조달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술이 19세기 이후 기존의 후원자(patron) 체제가 쇠퇴하고 경쟁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이 되자 예술가는 자신의 상품을 잘 팔기 위해 독창성과 혁신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중산층은 물론 기업의 무관심 때문에 예술가들은 차츰 무기력해지고 또 산업화·도시화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기존의 예술가들의 정서적 영감이 되었던 자연의 의미가 변모되었다. 즉 주어진 환경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인간화는 C. 보들레르 이후 예술이 현실의 반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반영의 구성체로 변화된 것이다.

전위예술가들은 현실을 혼돈이라고 인식할 수 없으며 법칙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위예술은 경험세계와 관계 없이 비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의 감정토로를 반복할 뿐 총체적인 형상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사실주의 이론가들은 전위예술이 갖는 이러한 추상성은 역사의 진정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허구의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부정적인 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지양을 이루어낸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T. 아도르노는 전위예술에서 중요시하는 기교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제도와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집합체로 보았다.

전위예술에 대한 여러 이론 가운데, 먼저 W.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서로 관련이 없는 사물과 타락한 상품들, 파리라는 도시의 떠돌아다니는 군중에게서 발견되는 회의적인 경험에 도취한 상태로 굴복한 시인으로 보고 그가 역설적으로 도시에서의 인간성 해체를 고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W. 보링거나 H. E. 리드는 전위예술이 근대를 기반으로 한 예술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사의 순환적 흐름에서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추상과 감정이입의 특징 가운데 추상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또한 A. 하우저는 매너리즘과 전위예술의 공통점을 비교하면서 전위예술이 소외의 예술임을 강조했다. 문학에서의 전위예술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시인 보들레르, J. N. A. 랭보, P. M. 베를렌 등은 언어의 지시적·묘사적 기능을 가능한 배제하고 고도의 은유를 사용한 시를 썼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은 독자적 실제가 아니며 언어를 심리적·음악적으로 울리게 하는 자극제이고,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정신을 기초로 하는 고안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에 와서 표현주의 문학으로 정착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자신의 불안과 고뇌를 소외되고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기계·도시·가족·대중들에게 비추어 나타났다.

표현주의 문학가들은 자신의 절박한 심리를 도치된 문장이나 토막낸 언어, 단음절적 비명과 과장법을 사용해 표현해냈는데, 이런 기법들은 산업화·도시화·군국주의화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의 자아상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F. 카프카가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관료적 통제에 직면해 주체의 자율성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서의 전위예술은 입체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작품에 자연과 사회의 인간적 구성이라는 적극적 감정을 나타내게 되었다.

입체파들은 산업사회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자연의 기술정복을 인간적으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했고, 작품의 소재를 인간이 사는 현대 도시의 구성물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입체파의 그림은 원근법에 의해 3차원으로 꾸며져 있지 않고 2차원의 복합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 전위적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입체파의 뒤를 이어 최근에는 팝 아트, 하이퍼 리얼리즘, 비디오 아트와 같이 표현매체의 새로운 개발과 예술인식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 후기 산업사회의 성격을 수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음악에서의 전위예술은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가 대두될 수 있으나 연주의 경우 리듬이나 형식을 미리 설정하지 않고 연주자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연주하는 형태로 나타났다(서양음악사). 현대에 와서 전자음악이나 컴퓨터 음악, 혼합 미디어 등이 등장함에 따라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전 시대와 다른 예술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연극과 영화에도 전위예술이 도입되어 무대에서 자연주적인 소품이 없어지고 계단·입면체·아치 등의 구성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대중은 선동적인 암시에 의해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얼굴 없는 인간으로 묘사되었고, 격렬한 비난과 사랑, 형제애에 대한 호소가 자주 나타나며 관능적이고 격렬한 본능의 해방도 주장되었다.


 

 

 

 

 

 

 

 

 

 

 

 

 

 

 

'미술 > 미술 이야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술마을 인문여행』  (0) 2017.11.30
『그림의 힘 2』  (0) 2017.11.29
(양구) 《박수근미술관》- 2  (0) 2017.11.23
(양구) 《박수근미술관》- 1   (0) 2017.11.23
『돈이 되는 미술』  (0) 2017.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