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0. 13:49ㆍ여행/남프랑스
론 강
프랑스 강들은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습니다.
아를에서 아비뇽은 버스로 1시간 거리입니다.
생베네제橋 (아비뇽橋)
12세기에 처음 건설된 이 다리는 아비뇽 전투 때 파괴되었으나 13세기에 길이 900미터, 아치 22개의 로마식 다리로 새로 지었다. 17세기에 홍수로 상당부분 유실되고 지금은 4개의 아치만 남아 있다.
왼편의 저 숲은 섬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보다시피 섬보다 다리가 훨씬 높아요. 우측편에도 보면 성벽보다 다리 교각이 높게 생겼어요.
그런데 홍수로 다리가 끊어졌다니..... 뭔 말인지......
성벽 안으로 들어와서 교황청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뇽 교황청 저 뒤에 황금빛 성모상이 보이는 곳은 노트르담 데 돔 대성당이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오기 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성당으로, 프랑스 혁명 때 심각하게 훼손되어 감옥으로 사용되다 19세기 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비뇽 교황청
거대한 요새처럼 보이는 견고한 석조건물로, 입구를 장식한 50M 높이의 뾰족한 첨탑이 돋보이는 성채다. 중세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구심점이 된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재위)를 비롯한 정식 교황 7명과 대립 교황 2명, 총 9명의 교황이 지낸 곳이다.
지금은 고딕양식의 궁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원래는 아주 작았다. 1차로 증축해서 구교황청, 2차로 증축한 부분을 신교황청이라 부른다, 외관은 비교적 14세기 모습이 남아있지만, 건물 내부의 예배당과 회랑, 방들은 장식이나 가구, 예술품들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다른 박물관으로 이전되어 과거의 영화를 엿볼 만한 유물은 거의 없다.
지금 「아프리카 미술작품전」을 하고 있다는 ─
교황청이고 나발이고, 저는 이것 본 것 만으로 본전 뽑았습니다.^^*
☆
와~ 멋지다 정말!
저건 진짜 계란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내전상황'을 그린 작품이겠죠. 아마도「인종청소」에 대한 ─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살상들은,, 아프리카라는 무지에서가 아니라 문명사회와 똑같은 탐욕과 위선, 왜곡과 변명, 자기 합리화,,...
이걸 보니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곤봉결투」,
어린 학생 같은 저 로컬 가이드가 노래(기도송)를 불러줍디다요.
로컬가이드가 그냥 대충 따라만 다니면 문책당하나 봐요.
'가이드 위에 인솔자가 있듯이', 로컬 가이드 체크하는 감시자가 있습니다요.
이 관람석은 임시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상설 무대용입니다.
오일이나 아크릴이라고도 안 써 있고, 포스트칼러 같지도 않고......
역시 한국어판은 없군.
아비뇽 시청
할인마트
극장
위엣 그림은 수채화일 줄 알았는데 유화더구만.
아비뇽 역
어휴~ 찌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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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 Avignonese Cap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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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13세기 초 초 교황권은 정점에 달했으나 13세기 동안 유럽의 세속군주들은 영토의 확장과 관료제의 확립을 통해 13세기 후반에는 실권상으로 교황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각국에서 관료제가 태동하고 영주들의 몰락이 확고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관료제와 세제의 확립으로 자연히 과세 대상인 인민의 파악도 활발해져 국경선의 중요성도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국경과 영지의 세력권 자체가 선이 아닌 점이었던 셈이었다.
경제적으로도 12세기 이후 활발해진 영토의 개간으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져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왕의 권위는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영토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뚜렷하게 성장하던 군주들 중에서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당대의 막강한 군주 중에서 가히 원탑급이었다. 필리프 4세는 시대의 여세를 몰아 프랑스 내 군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으나, 군비가 부족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건립, 제3계급에 대한 과세 확장을 시도하는 한편 교회에 대한 과세를 시도했다. 이는 서임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카놋사의 굴욕 당시의 상황이나 교회 인사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토마스 베켓과 대립한 헨리 2세의 상황과 달리 현실 그 자체인 경제권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이유는 어렵지 않은데 백성들을 아무리 족친다고 한들 나오는 돈은 별로 없었고 영주들에게서는 이미 뜯을 대로 다 뜯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은 곳은 교회 뿐. 게다가 이미 힘 빠진 영주들에게 힘들여서 빼앗는 것보다 교회를 한 번 건드려서 나오는 돈이 훨씬 많았다. 이 때의 교회는 독자적인 교회 조직에 속해 있었으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고, 십일조는 봉건 영지든 왕의 영지든 상관 없이 거두어지는 교회 최대의 수입원이었다. 또한 기부를 통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주, 국왕, 부호들의 헌납금도 막대했다. 교회만 굴복시키면 돈이 왕창 쏟아지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러나 아직 교회의 권위는 건재한 상황이었고, 너 파문을 통해 실현되는 교회의 권위는 하인리히 4세(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의 당사자)와 존왕의 사례를 통해 증명된 바 있었다. 결과는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필리프 4세는 과감히 성직자 과세를 밀어붙였다.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전개
이에 프랑스 교회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은 "감히 일개 세속군주 따위가 신성한 교회에 세금을 매기다니!"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면서 자신들의 수장인 로마 교황에게 이를 알렸다. 당연히 격노한 교황 보나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와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며 교권의 세속권에 대한 우위를 주장했으니, 1302년 발표한 <우남 상크탐(Unam Sanctam)>이 이를 가장 잘 집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필리프 4세도 삼부회를 소집해 교황을 비난하면서 성직자 과세를 고착시키려 하였다. 분노한 교황은 파문을 준비했지만 필리프 4세는 선수를 쳐서 교황에게 역으로 이단의 혐의를 걸고, 기습적으로 기욤 드 노가레가 지휘하는 병력을 파견해 로마 남동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인 아나니로 가서 교황을 납치, 재판에 회부했다. 이것이 아나니 사건. 이 과정에서 80세를 넘긴 고령이었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기욤 드 노가레에게 뺨을 맞았고, 학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이탈리아의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교황을 구출했으나 보나파시오 8세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 안 가 선종하였다.
그 직후 프랑스는 교황 선출에 강한 압력을 가해 프랑스 보르도 지방 출신의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했고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 곳은 당시 신성로마제국領이었지만 강 하나를 건너서 프랑스領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프랑스의 입김이 매우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었다.
클레멘스 5세 이후 추기경은 절대 다수가 프랑스인으로 뽑혔고, 자연히 교황도 전원이 프랑스인이었다. 로마에서는 계속 교황의 귀환을 요청했으나, 이미 조직 자체가 휘청거리게 된 교황령의 힘은 프랑스의 힘에 미치지 못했다. 이 시기 교황은 철저히 프랑스의 눈치를 살피며 활동해야 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한결같이 교황이 한 번 뻘짓하기를 기다렸고 기껏 어렵게 교황이 반항했다 하면 프랑스의 국왕 입장에선 새로 교황을 뽑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근 70년 만에 그레고리 11세는 교황령의 수호를 빌미로 로마로 돌아갈 명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그레고리 11세 자신은 사제 출신이 아니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추기경 - 교황으로 올라간 경우였다. 고작 1370년부터 8년 재위했으나 여하간 그레고리오 11세는 해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로 돌아간 지 1년 만인 1378년 선종했다. 향년 49세.
이 직후 로마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뽑도록 압력을 넣었고, 결국 로마 출신 바르톨로메오 대주교가 추기경들의 투표로 우르바노 6세로 선출되었다.
서방 교회의 대분열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 추기경 13명은 4개월 뒤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에서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는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 추기경인 제네바의 로베르(로베르트) 추기경을 선출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했다. 이것을 서방 교회 대분열(The Great Schism)라고 부른다. 두 교황은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칭하며 극렬하게 대립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백년전쟁 시기(...) 말그대로 전 유럽이 프랑스 교황 세력(친프랑스 반영국) vs 로마 교황 세력(반프랑스 친영국)의 두 패로 갈라졌다!
우르바노 6세 편 : 잉글랜드, 프랑드르, 북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 헝가리, 폴란드, 스웨덴, 교황령 등
클레멘스 7세 편 : 프랑스, 스코틀랜드, 부르고뉴, 나폴리왕국, 아라곤, 카스티야, 사보이, 포르투갈 등
여기에 동방정교회가 우르바노의 공격적 신학보다는 클레멘스 쪽을 더 선호한 것도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현실에 대한 냉소에 빠져들었다. 존 위클리프의 롤라드파나 얀 후스 등 아예 교황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나타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때문에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우선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는 공의회수의파(Conciliarism)가 등장했고, 1409년 이에 힘입어 추기경들만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에 반발한 대주교 이하의 신분의 사제들이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을 모두 폐위시킨다고 전제하고 피사 공의회, 바젤 공의회 등에서 알렉산더 5세(간디아의 페드로)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 교황들이 사퇴를 하지 않았고 결국 교황은 셋이 되었다. 게다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1423년 졸)를 끝으로 전쟁 통에 아비뇽 교황마저도 분열되었다.(이제 교황은 넷이 되었다.) 심지어는 아예 베네딕토 14세라는 이름을 가진 대립교황이 2명이나 세워지기도 했다. 결국 그레고리 12세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공인받았으나 이런 막장 시추에이션 작렬은 멈추지 않았다.
이 개판에서 지기스문트 황제는 대분열의 종식을 위해 발로 뛰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고 얀 후스를 처형했으나 여전히 복수의 교황이 존재했고, 후스를 처형하자 후스파에 경도되어 독일과 성직자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던 보헤미아의 농민들이 전투마차까지 동원한 후스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분열 70년 만이자 아비뇽 유수로부터 140년 만인 1449년이 되어서야 니콜라오 5세는 당시 대립교황이던 펠릭스 5세를 추기경으로 서임함으로서 분열을 봉합할 수 있었다.
결과
이런 막장 사건의 여파로, 결국 교황의 선출은 콘클라베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교황령의 산하에 있던 소국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 벗어나게 되는데, 페라라, 우르비노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러한 현실로 교권을 벗어나 인문주의에 기우는 사람도 늘어났고(페트라르카, 로렌초 발라 등) 이탈리아인들의 대륙 문화(스콜라 철학이 대표적)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이탈리아만의 독자적인 문화에 대한 추구가 심화되었다.
신곡, 데카메론 등의 속어 문학이 그 전조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의 심장부였던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르네상스는 그 절정이었다. 이 때 교황청 산하에서 벗어났던 소국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아비뇽은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까지 교황령에 소속되었다.
한편 교황은 교권으로서는 더 이상 자신들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세속적인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한편으로는 교권이 아닌 세속적인 물리력으로 교황의 위세 회복을 꾀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을 불러 교회 미술을 흥하게 한 것이나 알렉산더 6세와 그 사생아 체자레 보르지아의 잦은 전쟁 참여, '전사 교황' 율리오 2세의 전쟁 활동 등이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는 교황이 철저한 세속 군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한편 정치적인 압도의 필요성을 더욱 끌어높였고, 결국 물리적으로는 서코 디 로마, 종교적으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이 더욱 처절하게 몰락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대이교가 끝난 1449년은 오스만 제국에 포위당해 위기에 몰려 있던 동로마의 황제(콘스탄티노스 11세)가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 해이다. 즉, 명목상으로나마 교회는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메메드 2세에 의해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리스가 함락당하며 멸망했고, 같은 해 백년전쟁도 끝났다(1453년). 중세를 상징하던 교황권과 봉건영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모두 동시대에 망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 이 때문에 흔히 중세와 근세의 분기점을 1453년으로 잡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아비뇽 유수는 훗날에 벌어지는 사코 디 로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또한 일단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왕은 자국 내 카톨릭 교회에 대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갈리아주의"의 시작으로 프랑스 교구 내에서 걷히는 헌금은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성직자의 임명에도 프랑스 왕의 영향력이 커져서 교회 조직에도 교황의 영향력이 별로 미치지 않게 되었다.
1348년 아비뇽의 영주인 프로방스 여공작(나폴리 여왕) 조안나가 클레멘스 6세에게 아비뇽 시를 매각했다. 이 때문에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게 몰수될 때까지 아비뇽은 교황령의 영토가 된다.
http://cafe.daum.net/monol4/9Jf1/1935
최진용의 남프랑스 예술기행 (14) 아비뇽과 뤼베룽의 문화산책(上)
아비뇽은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의 중심도시로 인구 10만 여명 정도의 중소도시다. 파리에서 677km 떨어져 있고 론 강 좌안(左岸)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중세도시다. 거대한 요새모양의 교황청은 로마에서 피신해온 교황 클레멘스 5세를 비롯하여 1309~1377년까지 68년간 7명의 교황이 체제(體制)했고, 1791년 프랑스에 병합되기 전까지 이곳은 교황령(Comtat)이었다. 교황청 기념품점은 지하에 있는데 규모도 크고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특히 이곳 교황청 기념품 매장에는 특별히 여러 형태의 와인이 대량 전시, 판매되고 있는데 14세기 초부터 교황청에서 직영하던 교황청 전용의 와인너리인 사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가 있어 최고의 와인 산지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지금도 프로방스 와인 명가로 프로방스 와인을 대표하는 전통 때문에 교황청 기념품 가게에서도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 작고 예쁜 선물상자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와인 샘플 모음집 몇 개를 구입하고 저녁 무렵에는 교황청 북쪽으로 10여km 떨어진 사토네프 뒤 파프를 다녀왔다. 그야말로 교황의, 교황에 의한, 교황을 위한 와인너리였다. 유서 깊은 와인 산지(産地)를 다녀 온 것이다. 이곳 와인은 강하고 진한 향과 맛을 자랑하는 프로방스의 자연이 듬뿍 담긴 매력적인 포도주로 알코올 농도가 보통 포도주 보다 1~2도 높다. 아비뇽에서 꼭 보아야 할 명소로 성 베네제 다리(Pont St-Benezet)가 있다. 흔히 아비뇽 다리라고 부르는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258 x 390cm의 대작(大作)으로 극도로 단순화된 푸른 하늘과 초록색 언덕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추는 생명력이 넘치는 춤동작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원초적인 생명의 힘과 리듬을 시각화한 뛰어난 작품으로 단지 3가지 색채만 사용한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고 풍부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마티스 자신도 가장 아끼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아비뇽이 세계적으로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아비뇽 연극페스티벌(Festival d'avignon dramatigue)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미숙발레단 등이 참여해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외신을 접할 수 있었다. 축제 기간 동안 시립극장, 오페라극장은 물론 2000석의 대형 야외무대인 옛 교황청 궁정마당을 비롯해 광장과 거리, 교회, 수도원 등 크고 작은 20여개의 무대에서 공연과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온 도시가 공연장이요, 활력이 넘치는 무대이며, 창조적인 축제의 현장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공연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며 프랑스의 광대극, 모던댄스, 발레. 재즈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 퍼포먼스 등 다양한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아비뇽을 비롯한 프로방스 지역은 문학적으로 12세기부터 트루바두(유랑 음유시인, Troubadour)의 전통과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지역이다. 13세기부터는 문학이 크게 쇠퇴했지만 프로방스의 문학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꽃을 피웠다. <신곡>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인 단테(Alighiere Dante(1265~1321)에 의해 이어졌다. 이후 15세기에는 다시 프로방스 출신의 프란시스코 페트라르크(Francesco Petrorch)에 의해 아비뇽은 문학적 전통을 되살려냈다. 자연과 사랑을 찬미한 르네상스 최초의 휴머니스트인 페트라르크는 아비뇽에서 아름다운 처녀 로드(Laure de Noves)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삶을 살다간 가장 프로방스적인 시인이었다. 프로방스의 영광과 아름다운 전통 그리고 아비뇽의 후손들에게 프로방스의 열정을 불어넣은 시인 프레데릭 미스트랄(Frederic Mistral)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농민출신으로 아비뇽왕립대학출신이다. 지금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프레데릭 미스트랄로 학교 명칭을 바꿀 만큼 프로방스의 위대한 시인으로 19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평생 프로방스의 언어인 오크어(Langue d’Oc) 부흥운동(펠리브리주 운동, Felibrige 운동)에 힘썼고 오크어 사전 편찬, 오크어 표기법 표준안 제정 등을 통해 프로방스 문예부흥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여행 중에 루이 14세, 프레데릭 미스트랄, 발자크가 즐겨 마셨던 이 지역의 와인 타벨을 마셔본다면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아비뇽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인물은 위대한 곤충학자인 앙리 파브르(Jean Henri Fabre 1823~1915)이다. 일반인들은 파브르를 단지 유명한 곤충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파브르는 위대한 저술가이자 명문장가요, 식물학자였다. 곤충의 시인이라고 불린 앙리 파브르는 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아비뇽에서 약간 떨어진 북쪽에 있는 작은 동네 세리냥(Serignan du Comat)의 아르미스(Harmas)에 연구실을 열고 91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직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집중했다. 28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파브르의 곤충기 10권을 완성했다.
뤼베른의 여러 마을을 살펴본 후 세리냥에 있는 파브르의 연구실(지금은 기념관)을 찾았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 이미 문이 닫혀 있어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쉬움을 핑계 삼아 다시 아비뇽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아비뇽 주변은 유럽에서 가장 큰 과일과 야채의 생산지이다. 여기서 장황하게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아비뇽 부근의 뒤랑스(Durance) 계곡 주변의 여러 마을은 고급 멜론이나 아스파라거스, 상추, 시금치, 파, 딸기, 토마토, 사과, 배, 호박 등 과일과 채소류 생산지로 유명하며 프랑스 생산량의 반 이상을 맡고 있다. 특히 상치는 교황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종자로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아비뇽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아스파라거스는 20세기 서양요리의 황제로 일컫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아에 의해 이 지역에서 처음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이미 16세기에 관개시설, 배수시설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에서 생산된 신선한 과일과 야채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각 지역으로 공급된다. 대표적인 농산물 산지로는 아비뇽의 동남쪽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과일과 야채시장이 있는 샤또르나르(Chateaurenard), 아비뇽시 바로 남쪽에 인접한 멜론의 명산지 까바이용(Cavaillon), 미식가들로부터 사랑받는 아스파라거스의 최대 생산지 메랭돌(Merindol)과 로리(Lauris), 아비뇽 북쪽에 있는 야채와 과일의 명산지 까르팡(Carpentras) 등이다. 아비뇽 주변지역은 프랑스 국민의 식탁에 오르는 대부분의 채소를 생산하는 곳이다. |
최진용의 남프랑스 예술기행
(15) 아비뇽과 뤼베룽의 문화산책(下)
뤼베룽 지방 지도. 랜덤하우스코리아 발행, ‘세계를 간다’ 프랑스편 수록지도를 참조해 재작성 |
내가 당초 그냥 지나치려던 계획을 바꿔 뤼베룽(Luberon) 지방 자연 공원 속에 숨어있는 작은 마을을 찾게 된 것은 프로방스의 에피큐리언 (Epicurean) 피터 메일(Peter Mayle), 자연의 연출가 장 지오노(Jean Giono), 고향마을의 행복을 노래한 대시인(大詩人) 르네 샤르(René Char), ‘대나무’(bamboos)라는 소설을 발표해 프랑스 문학의 희망으로 떠오른 장 마르크 오베르 등 프로방스의 문화적 자산을 풍요롭게 가꾼 작가들의 문학적 향기와 이들 위대한 작가에 대한 끌림 때문이었다. 이들 모두는 프로방스의 자연을, 사람들을, 빛나는 태양과 바람을 평화롭고 서정적으로 표현한 탁월한 작가들이다.
이곳에서 내가 찾은 곳은 고르드(Gordes), 루시옹(Roussillon), 아프트(Apt), 메레르브(Merierbes), 라코스테(Lacoste), 보니외(Bonnieux) 등 10여개 마을이다. 이곳은 유명 예술인의 별장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영국 등 외국의 예술인 별장도 많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스와 오종(Francois ozon)이 감독한 영화 스위밍 풀(Swimming Pool)도 아름다운 숲속에 있는 영국 출판사 사장의 별장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그린 추리영화로 이곳 뤼베룽의 아름다운 풍경이 인상적이다.
효율적인 이동을 위해서 아비뇽에서 가이드와 렌트 카를 구했다. 이곳은 중국의 장가계, 원가계 처럼 웅장한 자연경관과 뛰어난 절경이 있는 곳은 아니다. 뤼베룽 산자락의 돌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자연 속의 작은 마을로 지역적으로는 척박한 산악 마을이다.
이곳 프로방스 작가인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의 배경처럼 바위투성이 마을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지형을 잘 살려 아름답게 뿌리내린 동네로 마을의 역사와 마을의 체취, 마을사람들의 모든 알파벳이 완전히 살아 숨 쉬는 정겨운 중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다.
내가 종종 가까운 후배나 친지들에게 선물하는 책이 장 지노오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법정스님의 수상집 ‘무소유’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짧은 소설이지만 따뜻하고 깊은 감동과 문학적 향기가 그윽이 풍기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알퐁스 도데의 ‘별’처럼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책 번역자의 말처럼 “생태학적 메시지가 강한, 앞으로 우리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는 현대를 위한 탁월한 우화” 와 같은 작품이다.
이들 마을 중 고르도(Gordes), 메레르브(Merierbes)는 프랑스 정부가 작지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마을의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보 빌라쥬, L'un d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로 등록된 곳이다.
이곳의 풍광은 중세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곳으로 연전에 2주일간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슬로우 시티(SIow City) 움브리아(Umbria)주의 오르비에토(Orvieto), 스폴레토(Spoleto), 비테르보(Viterbo), 테르니(Terni) 등 중세 마을과 유사한 분위기였다.
먼저 아비뇽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마을인 일 쉬르 라 소르그 (L'lsle-sur-la-Sorgue)로 가보자. 이곳 출신의 르네 샤르(René Char)는 20대 때 파리에서 잠시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80여 년 간을 이곳에 살면서 이 지역의 자연과 마을을 노래한 큰 시인이다. 그 때문에 이 조그만 마을은 수많은 유명 예술인과 철학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피카소, 하이데커, 브라크, 자우키(Zao Wouki), 자코메티(Giacometti) 등이 그들이다. 특히 피카소는 이곳에 장기 체류하기도 했다.
르네 샤르는 뤼베룽의 아름다운 태양과 가까운 미래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마을의 서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르네 샤르와 아주 가깝게 지냈던 작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그의 아내 묘소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루르마렝(Lourmarin)의 작은 공동묘지에 있다. 이곳 르네 샤르의 마을은 소르그(Sorgue)강이 동네를 에워싸고 있어 경관도 뛰어나고 수량도 풍부해 물고기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산된 물고기는 인근에 있는 퐁텐느 드 보끌뤼즈의 샘(Fountaine-de-Vaucluse)에서 잡힌 물고기와 함께 맛있기로 소문이 나 아비뇽 교황청에 납품될 만큼 옛날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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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또 깨끗한 물로 유명한 관광지이며 뤼베룽 지방의 물을 공급하는 원천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깨끗한 물 때문에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붐빈다. 여기에는 이곳을 자주 찾았던 프로방스의 위대한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의 기념관이 있다.
다음은 고르도(Gordes)로 가보자. 이곳은 뤼베룽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마을로 피터 메일이 최초로 자리 잡았던 곳이다. 뤼베룽의 산허리에 위치해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옵아티스트 바사넬리(Victor Vasarely)의 전시관도 있고 마을이 아기자기해 산책을 해도 기분 좋을 뿐 아니라 내려다보는 전망 또한 아름답다. 서울의 성북동과 높이만 다를 뿐 산세와 지형이 비슷한 이 마을은 자연과 건축의 균형, 그리고 조화가 세련되게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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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레르브(Merierbes)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Menerba)에게 바쳐진 마을로 한 때 갈빈파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한 마을이다. 특히 이 마을은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더 풍요롭게 프로방스를 알리고 뤼베롱을 알린 피터 메일(Peter Mayle)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집 구경이라도 할까 했지만 전 세계인들이 이곳을 찾을 때 피터 메일의 집을 찾고 있어 피신 중이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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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메일은 ‘프로방스에서의 1년’(1996년), 속편 ‘언제나 프로방스’(Toujours provece, 1991년), ‘내안의 프로방스’(A Year In Provence, 1989년), ‘호텔 파스티스’(Hotel Pastis, 1993년), 추리소설 ‘세잔느를 찾아서’(Chasing C´ezanne, 1997년), ‘다시 한번 프로방스’(1999년), ‘어느 멋진 순간’(2004년,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영화화) 등 프로방스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며 뤼베룽 또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피터 메일의 작품으로 인해 프로방스 단체 여행 붐과 함께 수년 동안 이곳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가이드는 설명하면서 너무 극성스러워 탈이라며 입맛을 다셨다. 우리나라 여행객도 상당수는 피터 메일의 작품을 읽고 뤼베룽을 찾고 있을 만큼 피터 메일의 독자가 많다. 어째든 피터 메일은 이곳에서 여유로운 프로방스의 삶, 에피큐리언(Epicurean)의 행복을 찾았지만 유명세를 타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진정한 여유로움을 잃어 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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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라코스테(Lacoste)로 가보자. 화가 니꼴라 드 스딸이 한 때 살았던 곳이지만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으로 세계에 알려진 마을이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쾌락과 변태의 복음사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이 1771년 이곳에 정착해 30여 년 간 영주로 살았던 곳이다.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는 사드 후작의 성(Chateau du Marquis de Sade)이 있다. 최근에는 패션계의 거장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의 땅을 통째로 사 대대적으로 개발하려다가 지역주민과 마찰을 일으키는 등 심심치 않게 잡음이 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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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샤르가 우려했던 이 지역의 개발 붐과 그로 인한 마을과 자연의 파괴와 훼손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뤼베룽 사람들은 자연을 벗으로 삼고 가난하지만 진정한 부로 알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들은 자연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를(Arles) 개발계획을 지역주민의 힘과 지혜로 막았듯이 뤼베룽의 많은 주민들은 개발이익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를 접하면서 이 지역을 찾은 감회도 새롭다. 아름다운 전원과 옛 정취, 선조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인 마을은 물론 DMZ까지 개발계획을 세우는 우리나라의 개발만능주의 세태와 맞물려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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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작은 마을 중에서도 작은 마을인 보니외(Bonnieux)는 흥미롭고 볼 것도 많다. 12세기에 세워진 성당, 13세기에 축조된 성벽이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내려다보이는 압트 지역(pax's Apt)의 멋진 풍경도 일품이고, 석조 건물의 좁은 골목을 누비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흥미롭고 인기 있는 것은 아마 제빵 박물관(Musée de la Boulangerie)일 것이다. 관람하는데 10여분 밖에 안 걸리는 작은 박물관이지만 빵의 나라 프랑스에서 빵 박물관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관람 후 박물관 앞 살롱에서 프로방스식 길레트를 먹는 즐거움은 여행의 또 다른 맛이자 즐거움이다.
그 외에 뤼베룽에서 볼만한 곳으로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라벤더의 꽃밭으로 유명한 세냥크 수도원(Abbaye de Senanque)과 약간은 원색적 색채가 화려한 프로방스의 도자기와 맛있는 요리와 과일 등으로 유명한 교통의 요지 아프트(Apt)가 있다.
내친 김에 뤼베룽의 동쪽에 있는 장 지오노(Jean Giono)의 고향 마노스크(Manosque)까지 가보면 오뜨 프로방스(프로방스 내륙, Haute-Provence)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뤼르산(Montagne de Lure), 발랑솔 고원(Plateau de Valensole)을 지붕으로 삼고 뒤랑스 강(Durance R.) 북쪽 언덕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마노스크 구릉이 있고 거기에 안식의 섬이라고 불리는 평화로운 마을 마노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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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이 빅투아르산(Mont Sainte-Victoire)을 사랑했다면 장 지오노는 발랑솔 고원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그의 작품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나무를 심은 사람들’을 비롯해 ‘언덕’(1929년), ‘세상의 노래’(Le Chant Du Monde, 1934년), ‘지붕위의 기병’(1951년), ‘쉬즈의 붓꽃’(197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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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오노는 자연주의자이며 반전평화주의자로, 지적이고 기호학적인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언어로 프로방스의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교감과 신뢰를 노래했다. 그의 책 ‘세상의 노래’나 ‘영원한 기쁨’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에 대한 그의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노스크에는 장 지오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이곳엔 세계적인 자연주의 화장품 회사 록시땅(L'Occitane)이 있고 가장 프로방스적인 슬로우 라이프를 영위하고 있는 올리비에 보상(Olivier Baussan) 회장이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비뇽으로 돌아가기 전에 시간에 쫒기면서도 아비뇽 북쪽의 마을 그라냥(grignan)을 들러본 것이 좋은 추억과 뿌듯함을 갖게 해주었다. 연이은 포도밭과 오래된 성이 전부인 이 마을은 볼 것은 별로 없지만 지극히 아름답고 우아한 세비네 부인(Madame de Sevigne)을 만날 수 있다. 딸을 지극히 사랑했던 세비네 부인은 이 마을을 사랑했고 이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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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에 세비네 후작과 결혼해 25살에 미망인이 된 세비네 부인은 프로방스의 그라냥 백작에게 시집보낸 딸(Francoise Marguerite)에게 25년간 15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서간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독서와 감상, 일상생활의 성찰을 독특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뤼베룽 지역과 인근 마을은 마을마다 아기자기한 모습과 가장 프로방스적인 풍광, 독특한 자신만의 이야기와 풍부한 문화의 향기, 수많은 예술인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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