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2016. 6)

2017. 6. 14. 17:28책 · 펌글 · 자료/문학

 

 

 

 

최승자 최승자 시인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언어를 확립하며, 기존의 문학적 형식과 관념을 보란 듯이 위반하고 온몸으로 시대의 상처와 고통을 호소해온 시인이다. 1952년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수도여고와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했으며, 계간「문학과 지성」에 「이 시대의 사랑」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최승자는 현대 시인으로는 드문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함께 시의 시대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으며 2006년 이후로 요양하다 2010년, 등단 30주년 되는 해에 11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즐거운 일기』,『기억의 집』,『내 무덤 푸르고』,『연인들』등이 있고, ,

역서로 『굶기의 예술』,『상징의 비밀』,『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자살의 연구』,『자스민』,『침묵의 세계』,『죽음의 엘레지』,『워터멜론 슈가에서』,『혼자 산다는 것』『쓸쓸해서 머나먼』『빈 배처럼 텅 비어』 외 다수가 있다.

 

 

 

 

 

목차

 

시인의 말 7

빈 배처럼 텅 비어 9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10
살았능가 살았능가 11
나 여기 있으면 12
나는 있지만 13
한 세기를 넘어 14
세계의 끝에서 15
따듯한 풀빵 같은 16
앵앵이노 17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18
아득히 19
어느 날 나는 20
한 마리의 떠도는 부운몽 21
시간은 흐리멍덩 22
그것이 인류이다 23
죽은 하루하루가 24
어느 봄날 25
당분간 26
마음에 환한 빗물이 27
우연인 양 28
玄同 29
이 세상 속에 30
모든 사람들이 31
미래의 어느 뒤편에선가 32
虛 위에서 춤추는 33
무제 34
나 쓸쓸히 35
세계는 36
그림자 같은 남자 37
내 존재의 빈 감방 38
알았던 사람들만이 39
흰나비 꿈을 40
오늘도 새 한 마리 41
하루 종일 42
과거를 치렁치렁 43
오늘 하루 햇빛 빛나는구나 44
문명은 이젠 45
환갑 46
타임캡슐 속의 47
살다 보면 48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 49
나의 생존 증명서는 50
죽은 시계 51
삶이 후드득 52
詩는 53
육개장은 54
쓸쓸한 文明 55
얼마나 오랫동안 56
또 하루가 지나가고 57
TV를 보면서 58
세상 위 백지에다 59
가봐야 천국이다 60
그 언행도 61
우리는 62
가다 가다가 63
내 정신의 암울한 지도 64
꿈결 65
나는 항상 66
우거지 쌍통 같은 67
존재는 68
내 죽음 이후에도 69
아이는 얼마쯤 커야 할까 70
시시한 잠꼬대 71
이런 詩는 72
죽으면 영원히 73
영화에서 74
우리 조상님들이 75
너는 묻는다 76
꽃들이 파랗더라 77
나의 임시 거처 78
나 79
한 그루의 나무가 80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 81
나는 육십 년간 82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83
나는 깊은 산중으로 달아난다 84
죽음은 한때 85
그리하여 문득 86
내일의 유리창을 또 누가 닦을 것인가 87
군밤 88
아침이 밝아오니 89
비가 온다 90
오늘 하루 중에 91
부엉이 이야기 92
끓어 넘치는 93
문득 시간이 94
月은 술에 취해 흘러가고 95
또 하루가 열리고 96
숨죽인 깊은 밤 97
슬픔이 새어 나와 98
모국어 99
내 詩는 당분간 100

발문|우리 시대의 유일무이한 리얼리스트/김소연 101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나 여기 있으면

 

 

 

나 여기 있으면

어느 그림자가

거기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겠지

 

내가 여기서

책을 읽고 있으면

까부러져 잠들어야만 하는

어느 그림자가

내 대신 술을 마시고 있겠지

한 열흘 마시고 있겠지

 

 

 

 

 

 

 

 

세계의 끝에서

 

 

세계의 끝에서

슬픔 한 자락을 접는다

어느 먼 허공,

그 너머 허공에서

바람이 지고

하늘 虛 그 너머로 그 너머로

새 한 마리 건너 뛴다

 

 

 

 

 

 

 

아득히

 

 

아득히 먼 과거인지

아득히 먼 미래인지

내 始源痛은 어디에

매달려 있는지 몰라

하루 울고 이틀 울고

사흘 울어도 그것을

난 몰라 가이없게도

더욱더 깊이 침몰해가는

배 한 척이 있을 뿐

 

 

 

 

 

 

내 죽음 이후에도

 

 

내 죽음 이후에도 新生 햇빛이 비친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 그것이 始源病이다

不立文字 하나 일어선다

지나간 것들은 다 잊어버려라

세계라고 말하지 마라

세계 위에 또 세계인

하늘이 있다고만 말하라

 

 

 

 

 

 

 

어느 날 나는

 

 

어느 날 나는

마지막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환갑

 

 

제 나이도 모르던 아이가

환갑을 맞아 그걸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양이

더 아이 같다

 

(어느 날 죽음이 내 방 문을 노크한다 해도

읽던 책장을 황급리 덮지는 말자)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모국어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슬픔의 제사상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 최승자

  

                                                                                    

 1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한없이 흘러가다 보면
나는 밝은 별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별이 바라보는 지구의 불빛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떻게 하면 푸른콩으로 눈 떠 다시 푸른 숨을 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고질적인 꿈이 자유로운 꿈이 될 수 있을까

 

 

 2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은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3 

 

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
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
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
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 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4

 

자신이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육체는 아침마다 배고픈 시계 얼굴을 하고  

꺼내줘 어머니 세상의 어머니 안되면 개복수술이라도 해줘 말의 창자 속같은 미로를  

나는 걸어가고 너를 부르면 푸른이끼들이 고요히 떨어져 내리며 너는 이미떠났다고  

대답했다 좁고 캄캄한 길을 나는 기차화통처럼 달렸다 기차보다 앞서가는 기적처럼  

달렸다. 어떻게 하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달려야 항구가 있는 바다가 보일까  

어디까지 가야 푸른 하늘 베고 누운 바다가 있을까

 

< 이 時代의 사랑 >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 봅니다.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부분

 

 

 

 

 

내 심장에서 고요히,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을

나는 누워

비디오로 보고 싶다.

 

─ 「시인」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 「문명」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자가 나란히 눕는 일. 이것은 사랑의 진짜 장면이 아닌가. 한 남자가 실패를 하고서 누워 있을 때, 필사적이고도 계속적으로 실패를 거듭해온 한 여자가 곁에 가서 눕는 일. 최승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날 버렸지 / 이젠 헤어지자고 / 너는 날 버렸지"로 시작하여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를 거쳐서, "오 개새끼 / 못 잊어!로 끝을 맺은 「Y를 위하여」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낙태수술 장면이 시로 씌어졌다는 충격으로만, 버림받은 여자의 살의로 가득한 악담으로만 읽혀서는 안 되지 않을까.

내가 기억하는 최승자는 "어떻게하면 너를 만날수있을까 어떻게달려야 항구가있는 바다가보일까 어디까지가야 푸른하늘베고누운 바다가 있을까"를 알기 위하여 "나는 기차화통처럼달렸다"라고 말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기차화통처럼 달리는 까닭에, 끊어 읽어 마땅할 부분에서만 띄어쓰기를 해야 했을 정도로, 숨가빴던 호흡을 헉헉 뱉어냈던 시인이었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