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인문학』

2016. 5. 16. 11:26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여행자의 인문학  글 문갑식 / 사진 이서현  (2016. 1발행)

 

 

 

 

 

 

 

글을 시작하며


이 책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말하는 명작의 고장을 찾는 기행 형식이지만, 그 안에는 명작이 나올 당시의 역사와 문화와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약 1년 동안 진행된 이 여행을 위해 저는 영국 전역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이탈리아, 독일을 자동차로3만 8000킬로를 누볐습니다.

 

 


1. 폭풍의 언덕에서 브론테 자매를 찾다

2. ‘사랑학’의 원조 제인 오스틴

 

 

"왜 지금의 행복을 잡지 못하는가?

우리가 미래에 올지도 모를 행복을 준비하느라

눈앞의 행복을 얼마나 많이 망쳐버렸는가."

 

 


3. 호수에 드리워진 위대한 사랑의 밀어, 워즈워스


 

 

여기 적힌 먹빛이 히미해질수록

그대를 향한 마은 희미해진다면

이 먹빛이 하얗게 마르는 날

나는 그대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세월을 찾으소서……

 

 

1961년 만들어진 영화 <초원의 빛>에 등장하는 시입니다.

시 제목 역시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이지요.

이 시는 영국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즈가 쓴 원문과는 다릅니다.

조병화 시인이 영화에 나오는 시를 번역했다고 하는데,

원문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서정적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문학에서 의역이 창작이 되는 사례라고 봅니다.

 

 

 

 


4. 해리포터의 원조 베아트릭스 포터

5. 셜록 홈스가 있는 런던 베이커 가 221B번지를 찾아서

6. 크리스마스가 되면 생각나는 찰스 디킨스

7. 루이스 캐럴이 사랑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8. ‘반지의 제왕’ 톨킨을 찾아 옥스퍼드 골목으로

9. 인도와도 안 바꾼 셰익스피어의 자취를 찾아

10. 영원한 자유인 오스카 와일드의 더블린

11. 팩션의 대가 댄 브라운과 로슬린 예배당

 


12. 아를, 프로방스의 햇빛과 고흐의 해바라기

 

프로방스

 

옛 프로방스 지방과 거의 일치하고, 오늘날의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계획지방과도 같다. BC 6세기초 이 지역에 그리스의 식민지가 건설되면서(지금의 마르세유인 마실리아도 여기에 해당됨) 프로방스는 처음으로 지중해 문화에 동화되었다. BC 125년 마실리아인들은 인접한 켈트족과 리구리아족의 연합에 대항하여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이 두 부족의 연합군을 격퇴시킨 후 계속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BC 2세기말경 프로방스는 알프스 산맥 너머에 최초로 세워진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트란살피나의 일부가 되었고,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4세기경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로마 장관은 상인들의 집결지였던 아를을 소재지로 삼았고, 마르세유는 그리스 학문의 주요중심지가 되었다. 5세기말 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프로방스는 계속해서 서고트족· 부르고뉴인· 동고트족의 침공을 받았다. 536년경 프랑크족의 지배하에 놓였다가 곧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에 통합되지는 않았다. 카롤링거 왕조의 위대한 통치자들은 프로방스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가 몰락한 뒤 프로방스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연속적으로 세워졌던 여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프로방스의 제1왕국은 855~863년, 제2왕국은 879~934년 지속되었다. 그후 아를의 왕국인 부르고뉴-프로방스가 1032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10세기말 지방 왕조(이슬람교도의 침공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했음)가 이 지역을 지배했고, 프로방스 백작 칭호를 얻었다. 1113년 이 왕조의 몰락과 함께 바르셀로나 가문이 대신 칭호를 획득하여 프로방스는 1세기 이상을 카탈루냐 출신의 스페인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세기에 프로방스의 도시들은 레반트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고, 집정정부라 불리는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바로 이즈음에 프로방스의 문화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라틴어와 유사한 프로방스어가 사용되었으며, 음유시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들 등 뛰어난 문화업적이 이루어졌다. 13세기초에 일어난 알비파의 종교운동은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가 남부 프랑스에 형성된 카타리파를 진압하는 것으로 끝났다(→ 알비 십자군). 프로방스는 카타리파의 근거지가 아니었던 까닭에 재난을 피할 수 있었지만 교황권과 북부 프랑스의 영향력이 전파되었다.

 

교황은 13세기초 프로방스 북부에 론 강을 끼고 있는 콩타브네생을 차지했고 1309~77년 아비뇽에 거주했다. 프로방스는 1246년에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왕가의 샤를에게로 넘어가면서 북부 프랑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폴리의 왕족이자 프로방스를 통치한 이탈리아계 앙주 백작가의 지배력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지배하에서 독특한 정치제도들을 많이 발전시켰다(→ 앙주 왕조). 그 대표격인 의회는 14세기말에 세제를 인가하는 힘과 불안정한 상황에서 지역의 치안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481년 프로방스는 합병을 원하는 프랑스 왕의 뜻에 따라 계속 행정적인 자치체로 남아 있는다는 조건하에 프랑스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6~18세기에 왕의 통치권이 계속 확대되었다. 1673년 엑스 제네랄리테(행정지역의 하나)가 지방행정장관(왕실의 장관)의 소재지로 설립되었으나 프로방스의 의회는 1639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787년까지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프로방스는 독특한 정치제도들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1790년에 부슈뒤론·바르·바스잘프(지금의 알프드오트프로방스) 주들로 분할되었다. 보클뤼즈 주가 1791년 콩타브네생의 합병 후에 프로방스에 병합되었고, 1860년 니스 지역과 함께 알프마리팀 주가 합병되었다.

 

프로방스 지방은 프랑스 남동부의 지중해 해안선 지대와 이에 바로 접해 있는 내륙지역(대부분이 구릉지대이거나 산악지대)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민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도이지만 마르세유 주변과 보클뤼즈 주의 루르마랭 및 메랭돌 주변에는 많은 수의 개신교도들이 살고 있다. 북아프리카로부터 본국으로 송환되는 이주민들로 인해 유대인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콩타브네생에서는 지금도 프로방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13. 엑상프로방스, 세잔의 아틀리에에서

 

엑상프로방스

 

마르세유 북쪽에 위치한다. 서고트족·프랑크족·롬바르드족에게 차례로 약탈당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침략 당했다.
중세시대에는 프로방스의 주도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1409년 설립된 대학교는 지금은 엑스마르세유 제3대학교가 되었다. 1486년 프로방스가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으며, 엑스에 의회가 들어섰다.
신경통과 혈관 질병의 치료를 위해 이용되는 섹스티우스 온천장이 유명하다. 농업 중심지로서, 특히 세잔이 화폭에 담았던 프로방스의 올리브와 아몬드가 유명하다. 세잔의 화실은 이곳에 있는 여러 시립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보존되어 있다.

 

 

 


14. 샤갈의 마을엔 진짜 눈이 내린다

 

<생폴드방스>는 칸에서 니스로 가는 도로에서 벗어나 산으로 향하는 곳에 있습니다.

지척에 샤갈과 함께 파블로 피카소가 살던 <앙티브>가 있습니다.

샤갈은 1977년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생존화가로서 루브르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는 영광도 맛보았습니다.

그는 1985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20년을 생폴드방스에서 살았습니다.

 

 


15. 피카소는 앙티브의 파도를 사랑했다

 

'아를의 고흐',  '지베르니의 모네',  ''루르마랭의 카뮈',  '프로방스의 세잔',  '생폴드방스의 샤갈'처럼 앙티브의 상징이 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습니다.

피카소의 아버지 호세 루이지 브라스코는 미술교사였으며 한 때 말라가 미술관의 큐레이터이자 실내장식 전문가였습니다. 그 영향인지 피카소는 말을 배울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습니다. 말하기나 글쓰기는 낙제에 가까웠습니다.

 

열 살 때 피카소는 아버지가 재직하는 학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데생을 중요하게 여겨 죽은 비둘기를 고정시켜 세밀하게 그리거나 사람 손을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 그리게 했습니다. 이 기초작업이 완성되지 않으면 물감에 손도 못 대게 했는데, 아들이 그린 비둘기가 얼마나 생생했던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물감과 팔레트 등 화구 일체를 물려주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능과 어머니의 용기를 물려받은 피카소는 14세 때 바로셀로나 론잔 미술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6세 때 첫 작업실을 열면서 스페인의 모든 미술대회를 휩씁니다. 다시 바로셀로나에 있는 라론하 미술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입학시험을 치르면서 또 한번 명성을 자랑합니다. 고전미술에 집착하였던 학교 측은 '고전미술, 자연, 조형, 유화'를 괴제로 냈는데, 보통 학생들은 한 달을 주고 그려오라고 했던 것은ㄹ 피카소는 하루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작품이었다니 시험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겠지요.

 

그해 피카소는 마드리드 박람회에 제출한 <과학과 자비>가 특선으로 뽑혀 산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수업을 듣는 대신 미술관, 카페, 사창가를 배회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했습니다. 1900년 10월 피카소는 파리로 옵니다. <임종의 순간>이라는 작품이 그해 파리 박람회 마드리드관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파리에서 ㄷ그는 색채를 발견하ㅣ면서 몽마르트에 작업실을 열고 세잔과 드가의 작품을 접합니다.

 

그는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 판화 3만점 등 평생 남긴 작품이 모두 5만여점이나 됩니다.

 

 

 


16. 카뮈가 살았던 루르마랭의 골목을 찾아

17. 괴도 뤼팽과 모파상의 전설은 노르망디의 파도에서 시작됐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가운데 하나인 디에프-르아브르 구간은 노르망디의 백미라고 할 만합니다. 길이 103키로미터인 이곳은 '코트 알바트로(백색대리석해안)'라고 불립니다. 프랑스 칼레에서 노르망디의 출발점 에트르타까지는 자동차로 약 3시간 걸립니다. 에트르다의 중심에 '기 드 모파상'거리가 있고, 거리의 작은 교차로에서 50미터쯤 가면 모리스 르블랑의 집이 보입니다.  모리스 르블랑은 홈즈의 라이벌 뤼팽을 탄생시켰습니다.

 

 


18. 마을 이름까지 바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 수련의 화가 모네의 지베르니

20.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찾아 루앙으로


글을 마치며

 

 

 

 

 

 

 

잉글랜드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Life in UK/Tours in/around UK 2016.02.19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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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생활 마치고 귀국한 지가 벌써 3개월 가량 되어가는 것 같다. 컴퓨터 안에 쌓여 있는 여러 영국 여행 사진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리 못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 온다. 조금씩이나마 시간 날 때 사진들을 정리해 보자. 이제 시간이 너무 지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그닥 없다. 다만, 에딘버러에서 내려오는 길에 Kirkstone Pass를 따라 내려왔던 기억 정도. 여하간 이곳에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아름다운 사진을 공유해 보자.  

 






































2016년 2월 19일

신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