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0. 12:35ㆍ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저는 희한하게도 남들이 중· 고교 시절에 다 읽었을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고리끼, 고골‥, 같은 러시아 대문호라는 이들의 소설을 여태 못 읽었습니다. 중학교는 시골서 다녔으니 그려려니 한다치고, 고딩 때는 소설 읽을 시간이 없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엄한 공부를 한답시고 문학작품 읽을 여유가 없었죠. 그나마 동서문화사, 을유문화사의 문고판 문학전집을 대략 읽긴 했습니다만, 낱권으로 한 권 한 권 읽는 것과 전집을 의무감으로 읽는 것과에는 차이가 있지요. 그래 그런지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나일 먹고나니까 이젠 소설책이 안 읽혀서 못 읽겠습니다. 살 날이 멀잖았다는 조급증 때문인지 소설을 읽으려면 답답해요. 오늘 낮에 치과엘 갔는데 책꽂이에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이란 책이 꽂혀 있더군요. 목차를 보니 제가 모르는 책제목이 허다해요. 충격 좀 받았죠. 문학전집을 다시 사야겠어요. 이젠 뭔 책을 읽어야 할 지가 막연하거든요. 묵혀 버린다 생각하고 일단은 책을 옆에 둬봐야겠습니다.
2015.09.22
저 표지 그림, 제가 좋아하는 일리아 레핀 작품이랍니다. ^^
《푸른들녘 인문교양》의 다섯 번째 이야기『내 친구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좋은 책 또는 고전이란 우리와 전혀 무관했던 나라에서 쓰인 책이 ‘지금 나에게’, 그리고 ‘평생을 두고 여러 번’, 언제나 ‘새롭게’ 읽히는 책을 말한다. 즉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읽히며, 개인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책,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책이다. (청소년 권장도서)
저자 박홍규
법학자이지만 여러 예술가들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작가이다. 195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법대, 영국 노팅엄 대학교 법대,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오사카 대학교, 고베 대학교, 리츠메이칸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전공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필요한 인문·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며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내 친구 빈센트』 그리고 풍자 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의 평전인 『오노레 도미에 - 만화의 아버지가 그린 근대의 풍경』 고야를 반권력의 화신으로 본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무엇이 정의인가?』(공저) 등이 있다. 또한 『아나키즘 이야기』, 『플라톤 다시 보기』,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세상을 바꾼 자본』 『리더의 철학』등의 책을 집필했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처음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간디 자서전』, 『자유론』, 『유토피아』,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 『예술과 기술』, 『인간의 전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아, 이 양반이 미술에 대해서도 좀 아는구나!
여는 글
톨스토이를 찾아서
흔히 '톨스토이는 인류의 교사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세상 어떤 학교보다 자유로운 학교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교사로서 평생을 보냈다. 출석도 부르지 않았고, 교과서도 없으며, 시험이나 성적표는 물론 조회도 종례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학교, 철저한 무경쟁의 학교였거든요. 가난한 농노의 자제들을 위해 자기 집 부근 과수원 안에다 세운 학교로, 학교를 세웠답시고 교장이니 하지도 않았고, 모든 선생들은 물론 학생들까지도 친구로 생활했습니다. 그의 교육관은 그의 인생관이자 세계관이고, 문학관이자 예술관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거대한 땅과 집을 소유하고, 하인을 여럿 거느리고 살았으면서 도덕군자인 체했다"고 하나, 톨스토이는 다른 농민들처럼 나물죽을 먹고, 스스로 신발을 만들어 신고,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살았습니다. '범세계적인 저작권료'까지도 포기하고 누구나 자기 책을 자유롭게 읽도록 한 사람입니다.
톨스토이는 평생을 시골 촌놈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연에 반하는 모든 것을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 싫어했어요. 국가, 교회, 학교, 기계, 문명, 폭력, 전쟁...... 톨스토이는 문자 그대로 자연인이자 자유인이었으며 자치인이었습니다. 평생을 아웃사이더이자 이방인으로서, 국외자이자 소외자로서, 그리고 반항인이자 거부자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본성에 어울리는 사람은 사막의 게릴라나 방황하는 집시들, 또는 순례하는 홈리스들이었어요.
저는 톨스토이를 위선자이기는 커녕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톨스토이가 가족을 버려야 도를 깨우친다는 불교 도덕을 맏었더라면 어땠을까요? 그의 삶이 조금이나마 덜 괴롭지 않았을까요? 제게는 부처보다 톨스토이가 더욱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입니다.
톨스토이는 수재가 아니었습니다. 대학도 유명 대학이 아닌 지방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마저 학업 능력 부족과 부적응 문제로 중퇴하고 독학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수도권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수도권 사회에 진입한 적도 없으며 소위 명사라고 부리는 자들과 어울린 적도 없습니다. 그는 평생 혼자 살았고, 혼자 글을 썼으며, 혼자 고민했습니다. 우리 문단이나 사회에서 보이는 학연이나 지연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습니다. 어떠한 파벌이나 그룹, 당파나 운동노선에도 가담한 적이 없고요. 그 뿐인가요? 톨스토이에겐 이끌어주는 부모도 스승도 형제도 없었습니다. 함께한 동료도 따르는 제자도 없었지요. 톨스토이는 문학을 자신의 주업이라 생각하지 않앗습니다. 주업은 커녕 부업으로도 여기지 않았어요. 어디 가서 "나는 작가요"라며 소개한 적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톨스토이 못지 않게 복잡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인간은 원래 모순 덩어리이니까요. 톨스토이가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인격적인 사법제도에 의해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부정한 점, 여성의 인격적 자유를 부정한 것, 그리고 황제 제도를 옹호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민중의 심성에 숨어 있는 의지가 제대로 발현될 때에만 세상이 변할 거라고 믿은 탓에 정치적 개혁에 소극적이었죠.
1 해방의 예술
니진스키, “나는 톨스토이다!” | 톨스토이, 가무에 미치다? | 톨스토이는 집시 음악 을 사랑했다 | 말을 타는 톨스토이 | 톨스토이는 정말 도덕에 미쳤을까? | 톨스토이의 참모습 | 톨스토이의 『예술론』 | 예술의 정의 | 현대예술의 타락 | 위조예술 | 나쁜 예술을 극복하라 | 음악이 살인의 동기라고? | 질투하는 톨스토이 | 청소년 시절의 예술 | 『참회』 이전의 예술 | 『참회』 이후의 예술
톨스토이는 음악이 자신감과 희망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음악은 예술 중에서 최고의 형태로서 가장 신비롭고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음악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으로 이를 '감정의 속기(速記)"라 하면서 '음악은 영혼의 상태를 전하는 것이지 사상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현재의 여러가지 미학에서 얻은 해답은 어느 것이나 다 예술의 목적은 미(美)이고, 그 미는 우리가 거기서 얻는 쾌락으로써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예술에 의한 쾌락은 훌륭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주장에 귀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쾌락은 그것이 쾌락이니까 좋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은 예술의 참다운 정의가 아니고, 현재 있는 예술을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한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예술이라는 개념의 근본에 미(美)라는 개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에술은 개개의 인간 및 인류의 생활과 행복에의 발검음에 없어서는 안될 인간 상호간의 교류 수단이요, 모든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다. 이전에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 예술의 대상 속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술 전체를 금지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술이 주는 쾌락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고 그것만을 걱정하여 온갖 예술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후자의 과오가 훨씬 더 심하고, 그 결과도 훨씬 해롭다고 생각한다.
학문과 예술은 인간에게 양식이나 음료와 떡같은 정도로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과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이 멋대로 필요하다고 단정짓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실제로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체(裸體)나 역사화(歷史畵)를 그리고 소설이나 심포니를 창작하는 것과 같은 일은 대상인 인민들이 즐겨 받아들일 때까지는 학문도 예술도 아니다. 톨스토이는 "예술을 위해 엄청난 돈이 인민에게서 징수하는데도, 정작 인민들은 예술이 제공하는 미의 열락에 참여하는 일이 절대 없다"고 비판합니다.
2 자유의 성장
파스테르나크의 톨스토이 | 모스크바 | 러시아의 술꾼들 | 레핀의 톨스토이 | 모스크바 시절의 톨스토이 | 톨스토이의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 | 볼콘스키 일가 | 톨스토이의 부모 형제 | 유년 시절 | 소년 시절 | 청년 시절 | 청년 지주 시절
무엇보다도 인간의 개성을 존중했던 파스테르나크는 "틀에 박힌다는 것은 인간의 최후이며 인간에 대한 사형선고"라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강압과 억제, 공포와 획일화로부터의 해방인 자유이지요. 그는 진실을 추구하는 고독한 지식인으로서 '혁명에 찬성하지만 폭력적이고 전제적인 혁명 지도자들에게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처럼 폭력을 거부했어요. 특히 당파적 웅변이나 추상적 공식으로 폭력이 합리화 되는 것을 결단코 거부했는데, 이야말로 톨스토이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잇습니다.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지바고의 삶이야말로 20세기이 톨스토이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제가 방문했을 당시 톨스토이 집이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는 자연 속의 시골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의 한 자락이었어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있는 마을의 정류장에 내려 10분 정도 걸었더니 숲속에 큰 건물이 나왔습니다. 톨스토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지만 거기는 병원이었지요. 다시 10분 정도 더 걸어야 햇습니다. 가는 도중 철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영지가 나왔는데요, 그곳이 바로 야스나야 폴랴나였습니다. 은빛 자작나무 숲길 끝에 톨스토이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 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었어요. 한 사람의 소유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났습니다. 20만 평에 이르는 사과 과수원과 30만여 평의 끝없이 이어지는 숲과 공원, 그리고 거대한 호수, 두 채의 거대한 저택, , 톨스토이가 정말로 이렇게 넓은 곳에 살았단 말인가?
3 자유의 산맥
러시아는 어떤 나라일까? | 지금 러시아인이 톨스토이를 싫어하는 이유 | 러시아와 체첸, 갈등의 역사 | 체첸은 톨스토이 문학의 고향이다 | 『카자흐 사람들』 | 예로시카와 올레닌 | 자연과 인간 | 「캅카스의 포로」, 「예르막」, 시베리아 | 『하지 무라트』 | 크림에서 보낸 2년 | 톨스토이가 사랑한 시인 튜체프
4 자유의 교육
교육자 톨스토이 | 톨스토이의 자유학교 | 1차 유럽 여행 | 2차 유럽 여행 | 자유 교육론 | 아이들을 위한 공부책 『아즈부카』 | 『러시아 독본』 | 위험한 농사 중재인 톨스토이 | 결혼의 행복
인간이 행하는 대부분의 惡은 나쁜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릇된 사상을 맹목적으로 믿을 때 나온다.
톨스토이는 역사의 원인이나 법칙 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일종의 숙명론에 젖어 있었지요. 즉 인간은 각자 자유로우며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위해 살지만 역사적으로는 전 인류의 목적 달성을 위해 무의식적인 도구가 되고,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대중의 집단정신이라 생각했습니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3대 작품 - 『닥터 지바고』(파스테르나크), 『고요한 돈강』(숄로호프), 『1914년 8월』(솔제니친)
흥미로운 것은 그 누구보다도 톨스토이의 도덕 강조에 반발할 것처럼 보이는 『롤리타』의 저자 나보코프가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 칭했다는 접입니다. 그는 톨스토이의 뒤를 이어 2위가 고골, 3위가 체호프이며, 4위인 투르게네프 다음에야 도스토예프스키가 온다고 말했는데요, 그 이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비천하고 멸시당하는 이들에 대한 그이 오만한 연민은 순전히 감상적인 동정일 뿐"이고, "자신이 책을 통해 주장한 가르침과는 전혀 다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듭니다.
5 전쟁과 자연
톨스토이는 애국자 군인이었을까? | 『전쟁과 평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 | 『전쟁과 평화』의 시작 | 『전쟁과 평화』의 민중 | 안드레이 | 나타샤 | 피에르 | 카라타예프 | 『전쟁과 평화』의 역사관 | 영화 『안나 카레니나』 | 『안나 카레니나』를 쓰기까지 | 『안나 카레니나』의 삼각 구도 | 『안나 카레니나』가 보여주는 사회상 | 가족과 토지 |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6 자유의 종교
정신적 변화 | 50세의 참회 | 톨스토이의 종교관·국가관·사회관·과학관 | 생활의 전환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인생론』 | 「어둠의 힘」, 「문명의 과실」, 「산송장」 | 톨스토이 민화 | 『이반 일리치의 죽음』
7 최후의 자유
톨스토이의 마지막 사진 | 『부활』 | 『부활』은 사랑의 소설인가? | 19세의 네플류도프 | 부활절 사랑 | 카츄샤와 네플류도프의 변모 | 부활의 의미 | 카츄샤 재판의 문제 | 자유 | 토지 분배와 죄수 보호 | 정치범 | 재판과 형벌에 대한 비판 | 자유로운 사람 | 톨스토이는 왜 『부활』을 썼을까? | 톨스토이, 파문을 당하다 | 「무엇 때문에?」 |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 생애 마지막 열흘의 자유
8 자유와 예속
1909년 조선의 톨스토이와 니체 | 한반도에는 톨스토이가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 톨스토이 평전 | 동아시아의 톨스토이 | 인도의 톨스토이 | ‘이상가’ 톨스토이 | ‘작가’, ‘종교인’, ‘교육자’ 톨스토이 | 톨스토이와 반 고흐
닫는 글 자연 속의 자유인 톨스토이
톨스토이 연보 | 참고 문헌 | 사진 출처
저도 오랫동안 톨스토이를 싫어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려서는 너무나도 좋아하다가 철들면서부터, 자로 얼마 전까지도 싫어했어요. 그의 작품이나 전기를 읽고 여러가지 의심을 품어오던 중 1993년에 번역된 폴 존슨의 『지식인들』을 읽고 나서 결정적으로 싫어졌지요.
존슨은 이 책에서 '지식인들이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비판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톨스토이가 가장 심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추상적인 관념을 좇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는 것인데요, "그의 유들유들하고 뻔뻔스러움에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포감마저 느낀다"고 말했을 정도예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톨스토이는 게급에 대한 근성을 조금씩 버리는 대신 땅에 대한 소유욕으로 치닫는다. 작품 수입은 오로지 땅을 사들이는 데만 바쳤는데 이러한 탐욕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이 토지를 모두 포기해야 할 시기가올 때까지 단순히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고 있었다."는 지적은 제게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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