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10:01ㆍ책 · 펌글 · 자료/역사
청방(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중국현대사의 인물들]
대세계 앞을 청소하고 있는 황진룽. [김명호 제공]
1949년 5월 26일 국민당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철수했다. 이틀 뒤 공산당은 상하이시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도살에 앞장섰던 청방(靑幇) 3대형(大亨) 중 장샤오린은 이미 암살당했고 두웨성(杜月笙)은 홍콩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가장 연장자였던 황진룽(黃金榮)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어차피 늙은 목숨이다”라며 태연자약했다.
수십 년간 세 사람은 무슨 일이건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다. 그래서 다들 대형(大亨)이라고 불렀다. 공동묘지의 잡초를 무성하게 만든,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황진룽이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변화가 무쌍한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확고한 철학과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었다. 아편과 마작·목욕이었다.
황은 공산당 천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집안에 아편을 쌓아 놓고 즐겼다. 그의 집은 지하 황제답지 않게 단출했다. 아들과 손자·며느리·요리사·청소부 등 20여 명이 복작거리며 한집에 살았다. 정원도 없고 담도 없었지만 주변이 모두 부하들의 집이었다. 한 구역이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와 부하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마작 상대도 여전히 넘쳤다. 하루에 여섯 번 밥 먹는 것이 가장 시시한 일이었다. 홍콩으로 피신은 했지만 부인에게 노래 한 곡 청해 듣는 게 고작이었던 두웨성에 비하면 나은 점이 많았다.
황진룽의 목욕 습관은 특이했다. 대중탕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떼로 몰려가 요란하게 하는 목욕이었다. 집에서는 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고향에 ‘아침에는 피부가 물을 받아들여야 하고, 밤에는 물이 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되씹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황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차를 여러 잔 마시고 온종일 물에는 손도 대지 않다가 밤만 되면 목욕탕으로 향했다. 두웨성이 홍콩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 같은 팔십 노인들이 매일 밤 갈 수 있는 대중탕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황진룽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죽고 큰며느리가 집안일을 관장했다. 능수능란한 여자였다. 거짓말을 잘했고 꾀가 많았다. 둘러대기를 잘해 황도 깜빡 속을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시국을 보는 눈도 있었다. 집에 있는 돈을 모조리 챙겨 홍콩으로 달아나 잠적했다. 얼마 후 ‘남편이 없어졌다’며 허둥대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 청소부의 부인이었다.
며느리 때문에 망신은 당했지만 경제적 여유는 여전했다. 상하이 인민정부는 황진룽의 사업 중 도박장과 사창가 외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동양 최대의 오락장 대세계(大世界)의 영업을 중단시키지 않았고 황금대희원(黃金大戱院)도 중공 화동국 소속 극단이 임대해 매달 일정액을 황에게 지불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컸지만 인민정부는 모른 체했다.
51년 반혁명 소탕운동이 시작됐다. 집 앞에 군중이 몰려와 ‘비판대회에 나오라’고 외쳐댔다. 황의 악행들을 나열한 고발장이 사법기관에 산처럼 쌓여 갔다.
다급해진 황진룽은 반성문과 청방 간부들의 명단을 공안국에 제출했고 사회봉사를 하겠다며 지난날 그의 영화가 서린 대세계의 문 앞을 빗자루 들고 쓸기 시작했다. 인민정부는 황의 반성문과 청소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인민정부의 골칫거리였던 청방은 몰락했다. 시민들은 그제서야 인민정부가 황진룽을 방치해 두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황진룽은 3년을 그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杜氏사당 낙성식에 시대의 거물들 총출동 - 두웨셩과 청방
1934년 전성 시기의 두웨셩(왼쪽 첫째). 왼쪽 셋째부터 왼쪽으로 외교관 장팅, 상하이 시장 우톄청.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 두의 심복이었던 양은 후일 공산당에 투항했다.
2년 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대형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노부인이 상하이를 찾았다. 두웨셩의 딸이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친은 황진룽·장샤오린과 함께 상하이의 3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황과 장의 후예들과 연락이 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노부인은 “우리 아버지를 그들과 함께 거론하지 마라”며 화를 벌컥 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개성이 제각각이었다. 황진룽은 돈을 탐냈다. 쌓아 놓기만 했지 쓰는 법이 없었다. 장샤오린은 나이가 들어서도 직접 싸움판에 뛰어들 때가 많았다. 생색내기를 좋아해서 돈을 써도 빛이 나지 않았다. 두웨셩은 사람 욕심이 많았다.
“돈을 많이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 많이 쓰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사람에게 돈을 많이 썼다.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황이나 장에 비해 모든 게 한 수 위였다.
두웨셩은 과일가게 점원 시절 가난에 찌든 애들을 만나면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돈으로 뭐든 사먹어라. 나중에 돈이 생기면 나를 먹여주기 바란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씩 웃었다.
초기 수입원은 아편 운반과 도박장 운영이었다. 노사분규에도 개입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약 80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파업을 부추기고 원만히 해결한 후 노사 양쪽에서 거액을 뜯어냈다. 두는 벌어들인 돈을 주로 사람들에게 풀었다. 타고난 두목 감이었다.
1931년 6월 10일 오전 두씨사당으로 향하는 의장행렬이 상하이 중심가를 통과하는 장면. 맨 앞에 전 총통 우페이푸의 편액이 보인다. 김명호 제공
1931년 6월에 있었던 두씨사당 낙성식은 두웨셩의 폭넓은 인맥과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확인시켜준 대사건이었다. “두웨셩의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입에 거품을 문 사람은 대학자 장빙린(章炳麟)이었다. 두의 조상이 요순(堯舜)임에 틀림없다고 우겼다. 두웨셩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국학대사 장빙린에게 맞장구 쳤다.
두씨사당 낙성식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상하이의 명인과 재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총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상하이 증권교역소 이사장 겸 상공회의소 회장과 청방의 대두목 중 한 사람인 황진룽이 총무주임을 맡았다.
축하 공연 담당인 장샤오린은 메이란팡 등 전국의 일류 경극배우들을 상하이로 집결시켰다. 위생주임은 전국상회연합회 이사장과 전국 적십자회 회장이 담당했다. 기타 무슨 주임, 무슨 주임 모두가 한결같이 전국적인 인물들이었다.
장제스는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楊虎) 편에 금가루로 쓴 거대한 편액을 국민당 주석과 총사령관 명의의 축사와 함께 보냈다. 당과 정부의 요인들도 빠질 수 없었다. 쑹즈원·쿵샹시·장쉐량 할 것 없이 편액을 보내거나 직접 참석했다. 이쯤 되면 집안 행사가 아니라 국가 행사나 다름없었다.
6월 10일 두웨셩 조상의 위패를 푸둥의 사당까지 운반했다. 1개월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답지해 산처럼 쌓인 편액, 대련, 선물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이 보내온 편액을 든 의장대들이 거리를 메웠다. 새벽부터 프랑스 조계에 있는 두웨셩의 집 부근은 인산인해였다.
의장대는 모두 6개 대대였다. 대형의 국민당 기와 ‘두(杜)’자를 크게 새긴 깃발이 1대대를 선도했다. 깃발의 전후좌우를 100대의 자전거가 호위했다. 프랑스와 영국 조계의 경찰국에서 파견 나온 영국· 프랑스·인도·베트남인으로 구성된 기마대가 뒤를 따랐고 두웨셩이 세운 초등학교 학생 전원과 10여 개의 만인산(萬人傘)이 뒤를 이었다.
장제스와 행정원장 허잉친 등의 편액도 행렬 속에 있었다. 나머지 5개 대대는 상하이시 보안국 경찰대대와 육·해·공군 군악대가 선두에 서고 매 대대마다 우페이푸·돤치루이·류치 등 국양군벌 시기의 총통과 남북의 군벌, 신구 관료, 정객들의 편액과 1만 명 이상의 사회 각계 대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따랐다. 위패가 안치될 때 상하이 요새사령부에서는 21발의 예포까지 쏴댔다.
두웨셩은 빛과 그늘을 자유롭게 왕래한 복잡한 사람이었다. 중일전쟁 시절에는 자비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병원을 설립해 250여만 명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전 반생은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후 반생은 남만을 생각했다.
인민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기 직전 대륙을 떠날 때 남에게 받을 돈이 많았다. 채권증서를 모두 소각했다. 두웨셩 덕분에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청방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출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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