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7. 10:45ㆍ책 · 펌글 · 자료/문학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저자의 첫 산문집으로, 자신의 시가 되었던 가족 이야기부터 일상이 시로 바뀌는 특별한 순간들, 저자가 몸소 깨우친 시작에 관한 편지들을 엮어냈다.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를 받아 적기만 하면 시가 되는 어머니의 이야기, 아버지와 소를 팔러 장에 나갔던 날의 추억, 남들보다 두 살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해 외로웠고 슬펐고 주눅 들어 있었던 사연 등 어린 시절 추억과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고,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과 시를 쓰며 처절하게 느꼈던 솔직한 경험들을 오롯이 담아냈다.」
1 밥상머리
세상 모든 말의 뿌리는 모어다
부엌은 우리들의 하늘
"먹어도 먹어도 배가 허한거여. 그래서 내 밥 풀 때는 시어머니 몰래 있는 힘을 대해서 밥을 눌러 펐는디, 지금 상 차리다 그 생각이 나면 혼자서 웃는다야. 밥을 그렇게 눌러서 퍼놨는디 네 삼촌들이나 딴 식구가 먹어버리면 워쩌겠냐. 나만 속상하고 낯 뜨겁지. 그래서 내 밥은 숭늉 들일 때 따로 갖고 들어갔는디, 내 밥 풀 때는 좀 모양이 안 좋게, 주걱 자국을 그릇 가에 척 발라서 들어가면 시어머니가 그러는 거여. 얘야, 너만 그렇게 몹쓸 밥을 먹어서 워쩐다냐 하고 말이여. 그때 내 가슴이 워쩠겄냐. 쿵당쿵당 세로 가로 달음질 치고 잘아오르고 그랫지."
어머니의 한글 받침 무용론
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
아버님께서 그리도 기다리던 손자 이름을 제가 지었을 때 얼마나 속상하셨던지요. 홍성장에서 쌀 몇 말 값을 주고 작명해오신 이름을 들이밀며 종손이라서 꼭 돌림자를 써야한다고 쿵 돌아누우셨지요. "아버지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대요?" "그야 물론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지." "그런 내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대요?" "그거야 당연 이 애비가 지었지." "그럼 사나이로 태어나 저도 아들 하나 얻었는데 누가 이름을 지어야 된대요?" 말없이 한참 누워 계셨던 아버님께서 벌떡 일어나 술 사발을 들이키셨죠.
버스는 배추 자루를 닮았다
치맛자락은 간간하다
그 소가 우리 집에서 오래 산 까닭
기적을 믿어라
황새울에는 오리가 산다
훠어이 훠어이
텔레비전과 간첩의 상관관계
할머니의 광주리
노심초새
고무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앞바퀴로 왔다가 뒷바퀴로 가는 자식
보랏빛 제비꽃을 닮은 누나
사나이끼리라
반지는 물방울 소리처럼 구른다
2 좁쌀 일기
그는 시처럼 산다
오늘밤 바람은 어느 쪽으로 부나
파리의 추억
다 담임 잘못이지유
짬뽕과 목탁
신 구지가
시인보다 아름다운 경찰
자식이 씨눈, 희망이 싹눈
내 마음의 신작로에는
배고픔과 밀접한 것들
'물끄러미'에 대하여
손길과 발길
등짝의 무게
편지봉투도 나이를 먹는다
너도 지금 사랑 중이구나
참 좋은 풍경
절 마당에 들어서니 빗자루가 지나간 결이 아름다웠다. 그런데 너른 마당 한복판에 깨진 기앗장이 소복히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치우려면 저 깨진 기왓장도 치울 것이지. 저곳에 모아 놓은 건 무슨 심보람.’ 투덜거리며 대웅전 앞으로 가다보니 소복하게 쌓여있는 기왓장 안에 개미들이 분주하게 집을 짓고 있다. 아,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과 감동적인 광경이여. 그래 이게 금강경이지. 마당 곁엔 대숲이 있었다. 대숲 울타리 안쪽에 선방이 있는 듯했다. 작은 울타리에는 “새들의 산란기이니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씌여 있다. "정숙"도 아니고 "돌아가시오"도 아니다. 여행에서는 이정도만 얻으면 된다. 역사 문화 지리 등등의 지식은 방 안에서도 다 찾아볼 수 있다.
초승달, 물결표, 그믐달
처음은 언제나 처음이다
날개
마음의 꽃물
3 시 줍는 사람
이야기 있는 곳으로 내 귀가 간다
쓴다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것
다듬는다는 것
품고 산다는 것
설렘과 그늘 사이에서 사는 것
홀로 전복을 기도하는 것
오래 몬다는 것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숲과 집을 닮는 것
시간과 공간을 짐작하는 것
낚시 바늘과 같은 것
수직의 문장을 세우는 것
늘 새로이 태어나는 것
시의 리듬과 동행하는 것
언 우물을 깨는 도끼질 같은 것
작가의 말
[교보문고 제공]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어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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