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2014. 9. 17. 10:41책 · 펌글 · 자료/문학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편액을 내걸고는 나에게 記文을 청하기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는 물을 보지 못하는데 그거 왜 그런지 아나? 보이는 게 죄다 물이면 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일세. 지금 낙서는 책이 온 방에 가득해 전후좌우에 책이 아닌 게 없으니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이. 그러니 자네가 비록 동중서처럼 방에 콕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장화 같은 박람강기에 의지하고, 동방삭처럼 글을 달달 외운다 한들, 뭐 얻는 게 있겠나? 이래서야 되겠는가?

낙서가 놀라서 물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물건을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늘 보면 뒤를 못 보고, 왼쪽을 보면 오른쪽을 못 보지. 왜 그런지 아나?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자기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눈과 대상이 가깝기 때문이지. 그러니 방 바깥으로 나가 문풍지에다 구멍을 뚫어 그리로 들여다 보는 게 나은 법일세. 한 쪽 눈으로 뚫어져라 보면 방 안의 물건을 낱낱이 볼 수 있으니 말일세.”

낙서가 감사해 하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약(約)’ 쪽으로 인도해 주시는군요.”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이미 ‘약’의 이치에 대해 알고 있군. 그렇다면 이번엔 눈으로 볼 게 아니라 마음에 비추어 봐야 한다는 이치를 가르쳐 줌세. 대저 태양은 순수한 양의 기운으로, 사해를 비추어 만문을 길러 내지. 진땅에 빛이 비치면 마른땅이 되고, 어두운 곳이 햇빛을 받으면 환해지네. 그렇지만 나무에 불이 일게 하거나 쇠를 녹이지는 못하는데 그건 왠지 아나? 빛이 퍼지는 바람에 정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그런데 만리를 두루 비치는 빛을 쪼그맣게 모아서 둥근 유리알을 통과시켜 동그라니 콩알만 하게 만들면 처음엔 연기가 희게 나다가 갑자기 불꽃이 팍 일며 활활 타는 건 왜 그런지 아나? 빛이 합해져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하나로 되었기 때문이라네."

낙서가 감사해하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오(悟)'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군요!"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지 사이에 있는 게 죄다 책의 정(精)이라네. 이는 방 안에 틀어박혀 들입다 책만 본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을 살핀 것을 두고, '우러러 하늘을 살피고 굽어봐 땅을 살폈다' 라고 했는데, 공자는 이러한 포희씨의 천지읽기를 거룩하게 여겨 「계사전」이라는 글에서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괘사와 효사를 음미한다' 라고 말했거늘, 무릇 '음미한다' 라는 것이 어찌 눈으로 봐서 살피는 것이겠나? 입으로 맛봐야 그 맛을 알 수 있고, 귀로 들어야 그 소리를 알 수 있으며, 마음으로 이해해야 그 정수를 알 수 있는 법일세. 가령 지금 자네가 문풍지에 구멍을 내어 한쪽 눈으로 뚫어져라 보고, 둥근 유리알로 빛을 모으듯이 마음으로 깨닫는다고 치세. 비로 그렇더라도 창이 투명하지 않으면 빛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리알이 투명하지 않으면 정을 모을 수 없는 법일세. 대저 마음을 밝히는 도란, 텅 비워 물을 받아들이고 담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는데 있나니, 이것이 바로 이 서재 이름을 '소완(素玩)'이라고 한 이유일 테지."

낙서가 말했다.  "벽에다 붙여 두려 하오니 선생님께서는 지금 하신 말씀을 글로 써 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낙서를 위해 이 글을 쓴다.

 

 

 

 

- 『연암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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