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장릉

2014. 4. 28. 10:25산행기 & 국내여행

 

 

 

 

문화재 소개

조선시대의 왕릉이다. 조선 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의 무덤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

단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3년만에 왕위를 넘겨주고, 복위운동에 휘말려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동강에 버려졌다. 시신은 영월호장이던 엄흥도가 수습해 암장했다가 중종 11년(1516)에 이르러 묘를 찾아 봉분을 조성했다. 선조 13년(1580)에 이르러서야 상석과 표석, 정자각, 홍살문 등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후 숙종 24년(1698)에 신위를 종묘 영녕전에 봉안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은 생략되었다.

세종대왕의 아들로 병약했던 문종은 성삼문, 박팽년, 황보인, 김종서, 신숙주 등에게 사후 단종을 잘 보필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단종은 끝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게 되었다. 1456년 사육신으로 알려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면서 처형되었으며,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도모한 복위운동이 또다시 발각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어 수장되고 단종은 사사되었다. 동강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영월호장 엄흥도가 겨우 찾아내 암장했다. 그래서인지 단종의 묘인 장릉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가 있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왕릉에 사당, 정려비, 기적비 등을 갖춘 곳은 장릉뿐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들이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장릉 → 영월 장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소나무 숲이 이렇습니다. 울진 소나무와는 생김새가 다르죠.

 

 

 

 

 

 

 

 

 

 

 

 

침 추모제인가를 합디다.

 

 

 

 

 

 

 

 

 

 

 

 

 

 

 

 

 

 

 

 

 

능참봉 이하 5명의 묘지기가 살던 집이랍디다. 말하자면 관사죠.

 

 

 

 

 

 

 

 

 

 

묘역 관리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잘해놨습디다.

특별히 덧붙일 얘기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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