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8. 11:34ㆍ詩.
인문학의 장르 중 가장 험하고 고도감이 높아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시와 철학일 겁니다.
시와 철학은, 오르기만 하면 그래서 그 고도감에 적응하기만 하면,
시인과 철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빼어난 산과도 같습니다.
또한 이런 비유가 적절하다면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을 하나의 봉우리에 견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모든 봉우리들이 우리가 원하는 좋은 전망을 약속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좋지 않은 전망을 준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봉우리에 오를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어떤 봉우리가 훌륭한 시야를 제공해주는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오르는 길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은 참고가 될지는 몰라도 절대적 기준은 될 수가 없을 테니까요.
다시 오르고 싶은 산이 있고,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것은 산을 내려오기 위해서라는 사실,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는 것도 삶을 건강하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는 조망을 얻으려는 것은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혹은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긴 여정의 하나일 뿐입니다.
(서문 ‘철학의 능선에서 시를 읽다’ 중에서)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 아닌 다중의 논리가,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를 통해 언어에는 뼈가 있다는 사실이,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사유는 곧 의무라는 판단이,
알튀세르와 강은교를 통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바타이유와 박정대를 통해 너무나 인간적인 에로티즘의 비밀이,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의 소비 논리가,
레비나스와 원재훈을 통해 기다림의 신비가,
니체와 황동규를 통해 망각의 지혜가,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이,
고진과 도종환을 통해 타자로의 비약이 지닌 신비가,
하이데거와 김춘수를 통해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들뢰즈와 최두석을 통해 마주침과 주름의 논리가,
사르트르와 최영미를 통해 애무와 섹스의 비밀이,
아도르노와 최명란을 통해 교환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데리다와 오규원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가,
아감벤과 한하운을 통해 생명 정치의 무서운이,
메를로-퐁티와 정현종을 통해 사랑과 고독의 진실이,
리오타르와 이상을 통해 포스트모던즘의 논리가,
바디우와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 구조가,
호네트와 박찬일을 통해 인정투쟁의 심리학이,
박동환과 김준태를 통해 한국 사유의 가능성이 펼쳐질 겁니다.
21명의 시인들은 모두 우리나라 출신이고 21명의 현대철학자들 중 우리나라 사람은 오직 박동환 한 명 뿐입니다. 전체 42명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하는 시인들은 우리와 같은 언어 그리고 우리와 유사한 감성을 소유한 사람들이지만, 철학자들은, 현재 우리 철학계의 슬픈 자화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과 이웃의 삶을 포착할 수 있는 그물을 스스로 만들기보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그물들을 매번 수입해서 판매했던 것이지요.
기쁨의 연대
박노해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 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보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인생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참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한때는 씩씩했는데, 자신만만했는데,
내가 이리 작아져 보잘 것 없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큰 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관계 그물이 이다지도 복잡 미묘하고 광대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도 인생도 나도
생동하는 우주 그물에 이어진 작으나 큰 존재입니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주 기운으로 태어나 우주만큼 소중한 한 생명,
한 인간이 먼저, 내가 먼저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내 한 몸 바치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아온
'개인 없는 우리'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
'개인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구슬처럼 빛나는 개개인을 하나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라다의 구슬처럼
지구 마을의 큰 울림을 만들어가는 주체입니다
새벽 찬물로 얼굴 씻고 서툰 붓글씨로 내 마음에 씁니다
오늘부터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벽 허물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연대하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 화엄경
박노해는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무한한 그물 위의 방울들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을 정치철학적으로 수용한 안토니오 네그리라면 아마도 이런 방울들 사이의 공명을 '다중'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예전에 나온 시집 노동의 새벽을 읽으며 노동 해방을 위해 헌신하던 사람들은 그의 변신을 일종의 변절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시인 박노해는 과연 변절한 것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지평으로 비약한 것일까요? (중략) 이제 박노해가 <인다라의 구슬>에서 강조하던 '개인 있는 우리', 즉 '자유롭고 독립하여 주체적인 개인들의 연대'가 어떤 모습일지 조금 이해가 되는지요? 그것은 바로 네그리가 말한 사랑과 기쁨의 연대, 즉 다중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수세력이나 진보세력은 모두 하나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바친다"고 자임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우울하고 무거운 정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생동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그가 이제 '개인 없는 우리'의 우울함을 벗어던지고 '개인 있는 우리'의 활력을 되찾아야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박노해는 과연 혁명을 배신한 것일까요? 아니면 혁명을 더욱 진화시킨 것일까요?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이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대부분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히만은 승진을 꿈꾸었던 평범한 독일인이었습니다. 그가 승진할 속셈으로 사악한 음모를 꾸미거나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관료사회에 주어진 규칙을 어긴 일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이 독일의 관료 사회 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성과 성실성이었습니다. 최고 통치권자인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을때, 그 명령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그 명령을 집행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히틀러에게 받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아이히만은 그 명령을 수행했을 때 자신의 서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가 미치는지 '사유'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반드시 사유해야만 했을 것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반성할 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해서 발생한 악은 도처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이제 전체주의의 기원을 확인하셨나요?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원 재 훈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스고
그대를 기다리다 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도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그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
꿈, 견디기 힘든
황동규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타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사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드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싸일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그림자가 없다
하.....그렇다......
하......그렇지......
아암 그렇구 말구......그렇지 그래......
응응...... 응......뭐?
아 그래...... 그래 그래.
감옥에 갇힌 죄수는 간수들에 의해 항시 감시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죄수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간수의 시선에 맞춰 미리 검열하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이 부여한 규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노예적 의식, 노예적 주체를 구성한 것이지요. 타인의 감시 여부에 일일이 신경 쓰면서 일일이 인위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요구되는 그런 행동을 익히는 것이 자신의 실존적인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감옥이란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외적 감시의 메커니즘은 어느 사이엔가 죄수의 내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식되는 겁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발적 복종', 혹은 '노예적 주체'가 탄생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애완견을 훈련하는 과정과도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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