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7. 18:38ㆍ詩.
최영미 시모음 (선별)
(가나다 순)
1. 가을에는 a+
2. 꿈의 페달을 밟고 b
3. 꿈 속의 꿈 b
4. 그에게 b
5. 나의 대학 d
6.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d
7. 내 마음의 비무장 지대 b
8. 다시 찾은 봄 c
9. 담배에 대하여 b
10. 대청소 c
11. 마지막 섹스의 추억 b
12. 목욕 c
13. 보낸 편지함 c
14.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c
15. 분리수거 c
16. 사랑의 시차b
17. 사랑의 힘 c
18.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b
19. 살아남은 자의 배고픔 c
20. 새들은 아직도...... c
21. 서른 잔치는 끝났다a
22. 서울의 울란바토르a
23. 선운사에서 a+
24. 다시 선운사에서 d
25. 속초에서 b
26. 시(詩) b
27.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a+
28. 어떤 사기 c
29. 어떤 輪廻 c
30. 어쩌자고 c
31. 영수증 c
32. 옛날의 불꽃 c
33. 일기예보 a
34. 인생 c
35. 임하댐 수몰지구에서 c
36. 지하철에서 1 c
37. 지하철에서 2 c
38. 지하철에서 5 b
39. 茶와 同情 c
40. Personal Computer -c
41. 행복론 c
42. 혼자라는 건 c
에서 몇 개 발췌 함.
출생 1961년 9월 25일 (만 52세), 서울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미술사 석사과정 수료
최영미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례식과 3대 세습을 희화화한 이 시를 비롯해 풍자의 화살을 남북한 정치인들에게도 날린다.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자 장례식을 마련하고 조문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도 시로 포착된다. "텔레비전으로 최고 통치자의 슬픔이 생중계되는,/ 지금이 그가 가장 약해보이는 순간,/ 눈가의 주름과 뾰루지가 화면에 잡히고/ 검정 조문복을 입고 분향하는/ 엉덩이에서 총알이 튀어나온다/ (내 뒤에서 까불지마!)"('권력의 얼굴' 부분)
그런가 하면 북한과 남한의 사회상을 울음과 웃음에 비교해 보여주는 시도 있다.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 인민 모두가 배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 돼지가 사망한 뒤, 눈물공장이 24시간 가동해/ 야근을 하며 눈물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간부로 승격하고/ 슬픔을 충분히 짜내지 못하면 쫓겨나고"('닮은 꼴' 부분)
올해로 등단 20년인 그는 시의 촉수를 자신에게도 들이댄다.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부분)
최영미의 강점은 타인의 치부에 대한 풍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점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데 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5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운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세상과 겨루면서 눈에 보이지 않은 상처를 입었던 최영미는 1987년 서울 명동에서 '민주 볼펜'을 외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기도 한다.
"볼펜 사세요!/ 한 개의 천 원짜리/ '민주' 볼펜 사세요!/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외쳤다/ 민주주의보다 볼펜을 더 크게,/ 외쳤다 강철 추위에 발을 구르며/ 모금함을 들고 동상처럼 서서/ 1987년 겨울을 운반하고 있었다"('1987년 겨울' 부분)
민주 볼펜을 팔던 시절에 진실이 단 하나의 향기였다면 이제 그는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나쁜 자식./ 위선자./ 벗겨도 살점 하나 묻어나지 않는 껍데기들.// 그들을 싸잡아 욕한 뒤에/ 단풍을 보았다// 울긋불긋 모든/ 그들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물들지도 않았다// 진실은 순색(純色)이 아니다"('추상(秋想)' 전문)
과거의 최영미가 혼자 단단하고 혼자 투명한 시인이었을 때, 하나의 색만이 진실이었다면 지금 그에게 진실은 순색이 아니라 세상의 얼룩을 닮은 단풍 같은 것이다. "내 발이 걸쳤던 신발들이 얼마나 될까?/ 내가 버린 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왼쪽에 줄을 맞추던 시간들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운동화에서 구두로,/ 바꿔 신으며 중년이 되었다"('세월의 신발장' 전문)
이제 오십을 훌쩍 넘겨 중년이 된 그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꿈의 페달을 밟고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그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의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은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 끝의 허망한 한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담배에 대하여
그날 밤 첫사랑 은하수, 눈이 시리도록 매운
스무살의 서투른 연정, 아무래도 감출 수 없는
더 서투른 입술로, 떨리는 손으로
필락말락 망설이는
쉽게 태워지지 않는 뻑뻑한 고뇌로
이빨자욱 선명한 초조와 기대로
파름한 연기에 속아 대책없는 밤들을 보내고, 어언
내 입술은 순결을 잃은 지 오래
한 해 두 해 넘을 때마다 그것도 연륜이라고
이제는 기침도 않고 저절로 입에 붙는데
웬만한 일에는 웃지도 울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슬슬 비벼 끄는데
성냥곽 속에 갇힌 성냥개비처럼
가지런히 남은 세월을 차례로 꺾으면
여유가 훈장처럼 이마빡에 반짝일
그런 날도 있으련만, 그대여
육백원만큼 순하고 부드러워진 그대여
그날까지 내 속을 부지런히 태워주렴
어차피 답은 저기 저 조금 젖힌 창문 너머 있을 터
미처 불어 날리지 못한 기억에로 깊이 닿아
마침내 가물한 한줄기 연기로 쉴 때까지
그대여, 부지런히 이 몸을 없애주렴
분리 수거
너를 향한 나의 애증을 분리수거할 수 있다면
원망은 원망끼리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맥주 깡통 따듯 한꺼번에 터트릴 수 있다면
2주마다 한번씩 콱! 눌러 밟아 버린다면
너를 만난 오월과 너와 헤어진 시월을 기억의 서랍에 따로 모셔둔다면
아름다웠던 날들만 모아 꽃병에 꽂을 수 있다면
차라리, 홀로 자족했던 지난 여름으로 돌아가
네가 준 환희와 고통을 너에게 되돌려줄 수 있다면
여름에 가을을, 네가 없어 끔찍했던 겨울을 미리 앓지 않아도 되리라
늦기 전에, 아주 더 늦기 전에
내 노래가 너를 건드린다면
말라 비틀어진 세상의 가슴들을 흔들어 뛰게 한다면
어느날 문득 우리를 깨우는 봄비처럼
아아 - 우우 - 허공에 메아리칠 수 있다면......
사랑의 시차
내가 밤일때 그는 낮이었다.
그가 낮일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다.
그것이 우리죄의 전부였지.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
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
제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선창가를 서성이며
백야의 황혼을 잡으려 했다.
내 마음 한켠에 외로이 떠있던
백조는 여름이 지나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피고 꽃이지고
그리고 가을, 그리고 겨울,
곁에 두고도 가고 오지 못했던
너와나 面壁한
두세상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
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떤 사기
진달래가 이쁘다고 개나리는 안 이쁜가
내가 아는 어떤 부르주아는 연애시를 쓰려고 연애를 꿈꾸는데
행을 가른다고
고통이 분담되나
연을 바꾼다고
사랑이 속아주나
아, 그러나 작은 정열은 큰 정열이 다스려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줄만 알지
몇번 했는지 모른다
어쩌자고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이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옛날의 불꽃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네가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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