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21. 18:26ㆍ발칸반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트레베비치 산 기슭을 흐르는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이 시는 이슬람교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를 비롯해 내부가 장식된 목조주택들과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가 있고 시민의 거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이다. 주요 모스크로는 베고바드자미야라고도 하는, 가지 후스레프 베이의 사원(1530)과 알리파샤 사원(1560~61) 등이 있다. 상업의 종류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37개의 거리들 가운데 꽤 많은 거리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중 구리세공사의 바자르街는 원래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로마인들은 보스나 강이 발원하는 곳에서 가까이 있는 일리드자에 휴양지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유황 온천이 있다. 고트족과 뒤이어 슬라브족이 7세기경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415년 사라예보는 브르보스나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15세기말 투르크에게 점령당한 후 교역 중심지와 이슬람 문화의 거점으로 발달했다. 두브로브니크의 상인들은 라틴 구역인 라틴루크를, 이주해 온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역인 치투타니를 세웠다.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850년 사라예보를 행정중심지로 삼았고, 이는 1851년 유혈폭동을 유발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878년 투르크를 축출하고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믈라다보스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을 암살했던 1914년 6월 28일에 절정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이 사건을 대(對)세르비아의 전시동원을 위한 구실로 이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재촉했다. 1918년 사라예보 의회에서 유고슬라비아와의 통합을 선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사라예보의 저항운동 투사들은 독일군에 대항하여 중대한 전투를 여러 차례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라예보는 상당했던 전시 피해를 신속히 복구했다. 이곳은 도로망의 중심지이며 전화(電化)된 철도를 통해 브르폴례에서 시작되는 간선철도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아드리아 해로 이어지는 철도 교통망이 있다.
철물과 카펫 제조를 비롯하여 오래전부터 계속된 수공업이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84년에는 여기에서 동계 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사탕무 정제업, 양조업, 가구· 담배· 메리야스 제조업, 성장일로에 있는 자동차산업 등이 이루어지며, 통신기관과 농업 관련 복합산업체가 있다. 또한 사라예보 분지에서 채굴된 갈탄이 근처 일리야슈에서 코크스로 가공되며 용광로가 있어 주물용 선철을 생산한다. 인구 428,600(2004).
출처.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라예보는 발칸반도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귀에 익은 도시名일 겁니다.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이에리사가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딴 곳으로 기억되고 있죠.
도시가 그다지 크지는 않습니다. 청주나 전주 정도?
그래도 발칸반도에서 베오그라드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발칸반도 국가들이 생각외로 작은 소국들입니다. 땅도 작고 인구도 적습니다.
쬐만 것들이 시끄러운 거예요. ^^
해발이 700미터나 올라와 있는 도시인데, 동그랗게 산동네로 둘러싸여 있더군요.
사람이 제일 살기 좋은 지대의 높이가 해발 700~800미터랍니다. 피톤치트가 잘 나온대나?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시청사입니다. 새로 지었더군요.
이래 보여도 이거 江입니다 - 드리나 江 (?)
시청사인데 공을 많이 들여서 지었답니다. 아직 인테리어가 덜 됐다고 한 것 같네요.
이 건물이 오스만터키 시절의 목욕탕이었다지 아마?
이 다리가 유명한 다리입니다. 라틴 다리라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저 다리 위에서 폭발물 투척을 받아 부상당한 수행원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다시 왔다가,
다리 건너 'MUSEM'이라고 쓴 당시의 카페 앞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한 장소입니다.
바보같이 여길 왜 다시 왔느냐? - 운전기사가 길을 잘 몰랐답니다.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저 박물관에 전시해놨습니다.
세계 1차대전 발발의 핑게거리가 된 현장입니다.
황태자비는 평민 출신이라서, 만일 그때 황태자비만 죽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더군요.
이곳에 사는 한국 사람은 한 가정집 뿐이랍니다. 17년 전에 선교사로 건너갔다네요.
발칸반도는 우리에겐 그동안 생소한 지역인데,
제가 알기로 3년 전부터 한국 관광객이 들어가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가이드, 큰아들도 가이드, 둘째 아들도 가이드.. ㅎㅎ
우리는 둘째 아들의 가이드를 받았는데 애가 똑똑합디다. 자기가 형보다 잘한다고.
수입이 쏠쏠하데요. 싱글벙글 합디다.
대학 3학년 재학중인데 영문과 다닌답니다.
갸가 그러는데 보스니아 학생들은 꼴통들이라더군요.
중고교생이건 대학생이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왕따 당한데요.
가뜩이나 정치가 개판인데, 젊은이들까지도 그러니…, 단적으로 보스니아는 희망이 없는 나라라고 하더군요.
보스니아 만이 아니라 발칸반도는 인구가 줄고 있답니다.
젊은애들이 기회만 있으면 유럽으로 튄다는군요. 일거리가 없대요.
이런 얘기도 해줍디다. 자기가 크로아티아 가서 보스니아 말을 하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더랍니다. 눈치조차 못채더래요.
그러니까 유고 연방이었던 국가들은 자국어가 따로 있다기 보다 방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스만 터키 시절에 마켓과 여관이 있던 자리랍니다.
저쪽으로 가면 지금도 이슬람 바자르(시장)이 있죠. 이따가 갑니다.
위엔 그리스정교회이고, 아랜 카톨립이니다.
그리스정교회는 십자가 가로 세로가 같습니다. 그리고 의자가 없습니다. 서서 예배를 봐요.
그리고 사제와 신도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를 향해 같이 섭니다.
그리고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찬송가도 전부 육성으로만 합니다.
한마디로 오소독소하죠.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따른다고 해서 正敎會라고 하는 겁니다.
[Greece正敎會] : 동로마 제국의 국교로서 4세기 무렵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의 한 종파
반지하 상가
500년 된 화장실
사라예보를 건설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기념하는 모스크.
터키 직인거리 라네요. 이 골목은 세공품을 많이 팝니다.
여기서 가이드 녀석이 뭐라그러냐믄,
"아무 데나 들어가서 사면 나쁜 재료를 사용했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안내하는 집으로 가면 안전합니다"
오스만 터키 시절의 상인들 숙소
구시가 광장 복판에 있는 세빌리 샘.
사라예보랑 수코페를 가장 간단히 둘러본 것 같네요.
다음 날 베오그라드로 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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