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부쿠레슈티 혁명광장

2013. 10. 18. 08:58발칸반도

 

 

             차우세스쿠의 마지막 6일 side of history 

 

 

1989년 12월 중순, 티미쇼아라에서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을때, 차우세스쿠는 홰외 순방중이었다. 그는 이사태가 언제나 불평스러운 소수 헝가리계 주민들과 결코 순탄한 관계가 아닌 소련 서기장의 사주를 받은 불만분자들이 일으킨 소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우세스쿠는 자신이 돌아가 루마니아 인민들앞에 서서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위대한 영도력을 의심하는 우중들의 목소리를 잠재워 줄것이라고 확신하고, 루마니아로 돌아갔다. 12월 20일 저녁, 루마니아로 귀환한 차우세스쿠는 국가수반답게 사태를 진정시키기위해 귀국 직후, 루마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빌딩에서 전국민들에게 TV연설을 행했다. 차우세스쿠는 이날 연설에서 티미쇼아라에서 벌어지는 소요사태는 "루마니아주권을 위협하려는 외국세력들의 음모"로 규정내렸다. 차우세스쿠는 이것이 국민들을 납득시키에 충분한 설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 오만한 독재자의 연설은 오히려 루마니아 민중들에게 반정부투쟁에 나서야할 필요성을 상기시켜주고 말았다.

 

 

부쿠레슈티광장의 혁명

 

다음날인 12월 21일, 티미쇼아라에서 번져나간 전국적인 소요를 진정 시키기위한 차우세스쿠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날 오전, 그는 공산당중앙위원회 빌딩의 발코니에서 11만여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TV 생중계로 연설했다. 그는 티미쇼아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를 규탄하고, 루마니아가 이룩한 사회주의혁명의 성과를 예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수와 환호는 사라지고 대중의 분노에 가득찬 함성과 야유가 그자리를 대신했다. 급기야 연설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총성과 비명소리가 터져나왔고, 광장은 순식간에 반정부 집회장으로 바꿔었다. 당황한 차우세스쿠는 서둘러 발코니에서 건물안으로 사라졌다. 그날 부쿠레슈티의 반정부 분위기는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차우세스쿠는 서둘러 부쿠레슈티를 떠나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우세스쿠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물러난다면 폭도들 앞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라고 여겼고 내일이면 사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는 또 한번의 치명적인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차우세스쿠는 자신이 이 사태를 통제하고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 놓을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의 측근들까지 여기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사람보다 앞서 지진의 징조를 알아넨 동물들처럼, 차우세스쿠라는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애썻다. 티미쇼아라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온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22일 아침 일과를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면서 시작했다. 그의 왼쪽 다리는 멀쩡했지만, 그는 부상을 핑계로 앞으로 다가올 혼란에서 발을 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소박한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전 9시 30분경, 차우세스쿠 정권의 국방장관 바실리 밀레아는 시위 군중들에게 발포하라는 차우세스쿠의 명령을 거부한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차우세스쿠는 그가 외국과 내통한 반역자였고, 그 혐의가 드러나자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많은 루마니아인들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바실리가 명령불복종으로 인해 세큐리타트에게 암살당했다고 믿고 있다.

차우세스쿠는 그의 아내 엘레나의 천거를 받아 바실리의 후임으로 빅토르를 임명했고, 결국 빅토르는 깁스한 왼쪽 다리를 질질끌고, 당 중앙위원회빌딩에서 차우세스쿠를 만나야 했다. 그가 신임 국방장관으로 서기장 내외를 만났을 때 차우세스쿠의 부인 엘레나 차우세스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빅토르, 우리 아이들을 부탁해요."

 

한편 당 중앙위원회 밖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군중들은 해산되지 않았고, 더욱 강하게 집결해 중앙위원회앞 광장에서 독재자의 퇴위를 외쳤다. 오전 10시, 차우세스쿠는 전국에 5인이상의 모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헬기들은 부쿠레슈티 상공을 날며, 국가 분열 시도에 말려들지 말고 집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살포했다. 식용유마저 부족했던 당시 루마니아인들에겐 조롱 이상의 의미를 두기 힘든 전단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계엄령은 국민들에게 무시되었다. 이제 국민들은 이 정부가 내리는 모든 지시에도 불응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었다.

 

독재자, 도주하다
 
차우세스쿠는 이제 살기위해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는 민중들에게 포위당한 중앙위원회 빌딩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고, 헬기를 호출했다. 오전 11시20분, 바실리 마루탄 중령의 헬기가 차우세스쿠 일행을 탈출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빌딩에 접근했다. 바실리는 광장 내려서 거기서 차우세스쿠를 태울 생각이었지만 이미 광장은 군중들에게 장악당한 상태였기에 장소를 바꿔 중앙위원회빌딩 테라스에 착륙을 시도했다. 헬기가 착륙하자 차우세스쿠 내외와 두 명의 경호원, 두 명의 고위관료가 서둘러 헬기에 올랐다. 4인용 헬기는 무리하게 6명을 태우느라 비좁았다. 차우세스쿠가 마루탄에게 말했다.

 

"당장 완전무장한 병력을 태운 헬기 두대를 불러서 이 반역자들을 쓸어버리게!"
  
차우세스쿠 일행은 우선 여름 별장이 있는 스나고프로 향했다. 그곳에서 엘레나는 만약을 대비해 옷가지와 보석을 챙겼고, 마루탄 중령은 애당초 4인승인 헬기이다보니, 6명을 태우는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차우세스쿠를 따라온 두명의 관료는 스나고프에 남게 되었다.  스나고프를 출발한 뒤, 마루탄은 그의 상관으로부터 어떤 메세지를 받았다.

"혁명이 발생했다... 이제 귀관이 알아서 하라. 행운을 빈다."

물론 바실리는 이 독재자 무리와 함께했다가 뒷탈 당하고 싶진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이들과 떨어지는가였는데, 무장한 두 명의 경호원이 있는 상황에서 쉽진 않은 일이었다. 바실리는 머리를 굴렸다. 그는 헬기를 상하좌우로 격하게 흔들었다. 놀란 차우세스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공 사격을 받고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

차우세스쿠는 겁에 질렸고, 당장 착륙하라고 지시했다. 바실리는 차우세스쿠 일행을 인근 언덕에 내린 후 기지로 귀환했다.

 

 

차우세스쿠, 붙잡히다

 

한편 부쿠레슈티에서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신임 국방장관 빅토르는 독재자의 마지막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군인들에게 막사로 돌아갈것을 지시했다. 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는데, 일선 병사들에겐 이게 시위대에 참가해도 좋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군은 시위대와 함께 했고 시내 곳곳에서 끊어져가는 차우세스쿠 정권의 숨을 이어가려는 세큐리다트(보안대)와 교전을 벌였다.

권력의 공백도 빠른 속도로 메워졌다. 12월 24일 오후 1시, 루마니아의 반정부 시인 미르치아 디네스쿠는 부쿠레슈티의 스튜디오 4 TV 중계국에서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군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독재자는 도망쳤습니다.

신께서는 그 자비로운 얼굴로 다시 루마니아에 비추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차우세스쿠는 루마니아 남부의 티투로 향하기 위해 길가던 차들을 정지시켰다. 처음에 정지시켰던 차량의 운전사는 엔진 고장을  이유로 가다가 멈췄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다음에 얻어탄 차량이 그를 티르고비스테 지역의 농업기술연구소로 데려갔고, 연구소직원은 이들을 방으로 안내한 뒤, 밖에서 문을 걸어잠근 뒤, 경찰에 신고했다. 곧 무장한 민병대와 경찰이 연구소에 도착했고, 차우세스쿠를 체포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온 민병대가 차우세스쿠를 보고 말했다.

"이제 당신은 민중의 손아귀에 있소!"

차우세스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라고?"

차우세스쿠가 체포되던 그 시간, 부쿠레슈티에서는 디네스쿠가 말했던 "우리"의 모습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불행히고 그 모습은 디네스쿠 본인이 보기엔 다소 실망스러웠다. 오랜 반정부 투쟁 인사들과 함께, 가슴 한가득 훈장으로 가득 채운 장군들과 수많은 직책으로 길고 긴 명함을 가진 당간부들이 혁명 이후를 대체할 조직, 구국전선(National Salavation Front)에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가장 역설적인 건 티미쇼아라 참극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스탄쿨레스쿠나 얼마전까지 차우세스쿠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눈밖에 나버린 이온 일리에스쿠가 자리를 함께 했다는 것이었다.

 

 

처형

 

12월 24일, 이온 일리에스쿠는 구국전선의 수장의 최초의 공식업무로서, 차우세스쿠에서 대한 특별재판을 다음날인 25일 시행한다는 명령에 사인했다.  다음날 군사재판의 판사와 검사 그리고 차우세스쿠의 처형을 집행할 부대가 헬기를 타고 티르고비스테의 병영에 도착했다. 스탄쿨레스쿠는 처형을 집행할 64공수연대의 병사들을 막사 뒤쪽에 집합시켰다.

"여기 누가 있는지 아나? 차우세스쿠가 있다.

그는 이제 곧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될것이다. 

만약 그가 사형을 언도받는다면 누가 집행하고 싶은가?"

병사들중 8명이 지원했고, 스탄쿨레스쿠는 그중 3명을 선발했다.

"자동소총으로 30발이다."
 
군사재판은 미리 예상되었던 대로, 차우세스쿠부부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사형이 언도되자, 엘레나는 울부짓었다. 

"우리중에 반역자가 있었어! 그게 누군지 알겠어..."

 재판이 끝난지 2시간뒤 처형이 집행되었다.

"형장으로 끌려나온 차우세스쿠는 처형자들을 노려보며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역사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것이다!"

그리고는 좌파혁명가인 인터네샤날레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역설이 있을까? 그의 몰락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 중에는 티미쇼아라를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파업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제 몰락한 독재자는 노동자세계를 꿈꾸는 노래를 유언으로 재창하니 말이다.

처형자들은 다시 벽쪽으로 차우세스쿠를 밀어붙힌 후 방아쇠를 당겼다.


 

 

혁명이후

차우세스쿠의 정권의 붕괴 이후 루마니아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다. 새로운 체제, 새로운 이상... 하지만 그러기엔 앞으로 나아가기엔 너무 많은 장애가 존재했다. 세큐리타트를 비롯한 차우세스쿠 잔당들의 저항은 마치 나치 패망 이후의 베르볼프처럼 계속되었다. 스탄쿨레스쿠는 이런 혁명이후의 내전적 분위기에는 소련이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KGB 요원들이 그당시 루마니아에 파견되고 있었어요. 그들은 마치 게이 커플들 신혼여행온 것처럼, 무리를 지어 차에 타고 각지를 돌아다녔죠. 한 4천명쯤 될겁니다. 그외에 서방측 용병이나 스파이들도 있었고요."

스탄쿨레스쿠는 혁명이후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차우세스쿠 정권하에서 남긴 그의 자취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스탄쿨레스쿠는 티미쇼아라에서 잔혹행위의 배후이자 혁명 당시인 22일 독재자의 도망을 도운 죄로 비난받았고, 그로 인해 아내는 자살했고 자신은 15년형을 언도받았다.

"나는 차우세스쿠나 군중들 모두에게 죽임일 당할수있는 상황이었어요...

차우세스쿠가 그때 탈출하지 못했다면 아마 군중들에게 잡혀 린치 당했을겁니다."

일리에스쿠는 이후 루미나아 대통령이 되어 1996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임기초에 광부들의 파업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까닭에 "혁명의 성과를 도둑질한" 인물로 루마니아 좌파들에게 비난 받고 있다.

디네스쿠는 혁명이후, 차우세스쿠 치하에서 벌어진 잔혹행위를 밝혀내고 고발하는데 노력했다. 그는 현재도 언론인으로써 활동하고 있다.

 

 

 

윗글 출처.

by Cicero

2010/02/06 19:20

 flager8.egloos.com/2536159

 

 

 

 

 

 

 

이 건물은 국립도서관입니다. 동상은 루마니아 초대 왕인 카롤1세 동상이구요.

우측 뒤에 보이는 건물이 차우세스쿠가 마지막 연설을 하던 공산당 본부 건물입니다.

 

 

 

 

 

 

 

 

 

바로 이 건물이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인데요,

 

 

 

 

 

 

 

 

 

저 테라스가 차우세스쿠가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암살을 지독히 두려워하던 독재자가 연설하기엔 위치가 너무 낮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믿을만한 ‘관제 군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처음엔 환호하고 박수를 쳐줬겠지요. 분위기 좋았는데,

그런데 앞쪽에 있던 청년 한 명이 갑자기 군중 속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독재자 차우세스쿠  타도!"  ‥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청년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분위기가 술렁이면서 험악해지더니 드디어 군중들이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원된 관제 군중이 순식간에 ‘시위 군중’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차우세스쿠가 서 있는 테라스 위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치고,

드넓은 광장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였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차우세스쿠는 허겁지겁  헬기로 도망쳤다는군요.

 

저 종이연처럼 생긴 대리석 판은 당시에 차우세스쿠가 연설하던 위치를 가르키고 있는 것이고,

파여진 부분은 청년이 쓰러진 자리의 표시입니다.

 

 

 

 

 

 

 

혁명기념탑입니다.

주위에는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동판과 조각들이 있습니다.

저 위에 붉은 핏자국 같은 것은 일부러 한 것이 아니고, 원래는 깨끗한 상태인데,

요근래에 누군가가 페인트를 던졌답니다.

그런데 막상 저렇게 해놓고 보니까 그럴싸한 겁니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답니다.

 

아닌게 아니라 2011년에 찍어온 사진을 보니까 깨끗하더군요.

 

 

 

 

 

 

 

 

가운데 이상하게 생긴 건물은 비밀정보기관 본부입니다.

당시 내전 상태에서 파괴된 것인데,

문화재 가치가 있어서 허물지 않고 보존하기로 하고는,

저 상태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공모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느 개인이 입찰받아서 파손된 건물 위에 저렇게 현대식 건물을 얹어 지었다는군요.

건물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광장 밑을 가로질러 정교회와 연결되어 있더랍니다.

↓ 아랫 사진의 이 교회 건물입니다.

 

 

 

 

 

 

 

 

 

 

 

 

 

 

 

 

 

 

 

 

 

 

 

아까 본 국립도서관 맞은편에는 궁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궁전 옆에 그 교회가 있는 것인데, 모든 궁전 옆에는 왕실용 부속 교회가 있다더군요.

담장에 붙어 있는 패널들을 보니까 수리 중인 모양입니다.

유럽 건물들을 보면 겉 모양은 칙칙한데 안에 들어가 보면 화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