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먼저, 자유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려 했다.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_
허용된 자유는 불완전한 자유다.
즉 억압한 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것이고,
책의 표현을 빌려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러한 허용된 자유에 안주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또한, 자유란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앞에(ob) 던져져(ject) 나의 활동을 방해하는 저항에 대해 능동적(active)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_
저자는 인간의 자유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대상적 활동'에 있다고 말한다.
즉, 풀이 바람에 눕고 다시 일어나듯
인간에게 자유란 자신을 가로막는 저항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관철시키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자유에 대한 개념을 재확인했다.
김수영에게는 서러움이 늘 따라다닌다.
그는 '거미'를 보며 설움에 타들어가는 자신을 보았고 (<거미>)
'벽'을 말하면서 방바닥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다 자신의 벽을 발견한다(<벽>).
또한 가난과 매명에 대한 자신의 불완전함을 토로했고 (<마리서사>)
강자에겐 찍소리 못하고 약자에게는 정의를 요구하는 자신의 비겁함에 절규했다(<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하지만 그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또한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는 온갖 설움을 마주하면서 그것을 극복해내겠다는 자신을 다지곤 했다.
때로는 <너를 잃고>를 통해 아내를 정리하려는 것처럼, 상처를 극복하려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만의 투철한 정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그에게 모든 시는 완전한 '자기 이해'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러한 집요한 추구가 오늘날 김수영을 김수영이게 한 원인이 되었다.
김수영은 '자기 이해'에 다다르기에 앞서 한 가지를 명확히 했다.
그것은 바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욕심이다. 이 욕심을 없앨 때 내 시에도 진경이 있을 것이다. (후략) _ <생활의 극복>" _
김수영에게 사랑은 대상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자신의 생각을 포기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성복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김수영이 가장 크게 성장한 계기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김수영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의 자유가 이념에 의해 어떻게 유린당하는지 그 큰 눈으로 여실히 보았다.
아니, 그는 포로수용소에 오기 전에 이미 이것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인민군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는 자신이 인민군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경찰이 자신을 붙잡았을 때는 인민군이 아니라고 외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존을 위해 짐승처럼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고
그 악몽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위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썼다.
그리고 이 2년동안, 김수영은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다.
"목이 졸린 사람이 공기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경험하듯이,
김수영은 자유가 철저히 부정되는 공간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_
김수영에게 이러한 설움, 고통과 고독은 자유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_<긍지의 날> (1955.2)" _
이 고독과 고통이 훗날 자긍심이 되기까지, 김수영은 끊임없이 자유를 읊고, 자유를 살아내려 했다.
아래부터는 저자가 김수영에 대해 언급한 글들을 소주제로 묶어 모아보았다.
1. 시에 대한 태도
- 김수영은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방점은 '남을 수 있는'이란 구절에 찍혀야 한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은 '영원히 남는 작품'과는 다르니까.
자신의 기대처럼 자신의 작품이 영원히 남을 수도 있고, 아니면 허무하게 영원히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수줍은 프러포즈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듯이,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은 시인이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다.
(중략) 사랑에 빠진 사람이나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단지 온몸으로 프러포즈를 했는가,
혹은 온몸으로 시를 썼는가의 여부일 뿐이다.
물론 온몸으로 밀어붙였을 때에만 프러포즈가 사랑하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시가 독자들을 울릴 수 있다는 기대도 가능하다.
-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이며,
따라서 그것은 시인이 -육체로서- 추구할 것이지, 시가 -기술면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다." _<시월평: 모더니티의 문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은 무엇을 비추는가?
지성의 화염은 나 자신이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에도 없었으며,
나아가 백 년 뒤 그리고 천 년 뒤에도 없을 것이라는 내적인 확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어린아이도 어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가 아니라 그만의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며,
어른도 어린아이의 성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가진다.
어쩌면 단독성의 이념은 '영원한 현재(the eternal present)'에 있지 않을까.
어떤 사건 혹은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비록 한순간이었을지라도,
내 마음 속에서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생생한 기억일 수 있다.
이런 만남을 경험하려고 자신이 태어났다고 탄복할 만큼 강렬한 삶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단독성, 즉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덧없어 보이는 현재도 이처럼 삶의 차원에서 영원성을 확보할 수 있다.
김수영이 염두에 둔 교훈이나 명령은 '모든 것은 단독적인 것으로 완성되어야만 한다'는 교훈이자 명령이다.
-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중략)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_<시인의 정신은 미지>
- 김수영은 시의 초고에 해당하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초고에는 상투적인 언어와 사회적 통념이 개입해서 자기 이해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초고를 꼼꼼하게 응시하여 진정한 자기 이해가 응결된 시로 다듬는다.
1954년 초가을 <거미>라는 시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행동 강령도 없을 것이다,
-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대시의 양심과 작업은 이 뒤떨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이 모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 준다.
이상한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중략)
우리의 현대시가 우리의 현실에 뒤떨어진 것만큼 뒤떨어지는 것은 시인의 책임이 아니지만,
뒤떨어진 현실에서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 내놓는 것은 시인의 책임이다." _<시월평: 모더니티의 문제>
- 그는 구체로의 비약을 상징하는 최적의 비유를 찾아낼 필요를 느꼈다.
마침내 비와 눈처럼 구체적인 삶으로 하강하는 분위기를 가졌지만 동시에 강인함도 갖춘 상징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것이 바로 '폭포'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중략)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후략)" _<폭포>
그는 폭포의 이미지를 통해 비나 눈이 가진 일말의 낭만성까지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 "무릇 모든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은 하고 많은 직업 중에서 유독 예술을 업으로 택한 이유는 -
자기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살려보기 위해서 독특한 생활방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특한 시를 쓸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 하고,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문단에 등장을 하는 방식 역시 이러한 생활의 방식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가 문단에 등장하고 세상에 자기의 예술을 소개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것이 독자적인 방법이냐 아니냐쯤은 한번은 생각하고 나옴 직한 문제이다." _<문단추천제 폐지론>
-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은 예술가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수행하는 다른 활동과 달리 예술은 독특한 개성과 생활 방식을 긍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중략)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독특한 시를 쓰려면 독특한 생활의 방식(즉 인식의 방법)이 선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의 독특한 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새롭고 다른 것을 쓰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말했던 것처럼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여 도드라지게 하려는 속물적인 본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특한 생활 방식에 대한 김수영의 이야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온몸으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기만의 인식에 이른 사람만이 독특한 시를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이가 독특한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는 단지 거짓 제스처에 불과하다.
-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후략)" _<문단추천제 폐지론>
-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_ 프란츠 카프카 <친구, 가족 그리고 편집자들에게 보내는 서신>
-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의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중략)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_<요즈음 느끼는 일>
-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법이다. (중략)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여기서 자유의 회복이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 것인지 분명해진다.
그렇다. 자유의 회복, 즉 혁명은 "고독한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유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돌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남과 다르게 보지 않고서, 남과 다른 나만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나만의 시선을 갖출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익숙한 시선에 모조리 괄호를 쳐야만 한다. (중략)
"항상 외국에 온 사람 모양으로 내 나라에 살고,
외국어를 하듯이 내 나라말을 하고,
여자들을 모두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중략)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에게 낯선 사람과 사물, 언어는
'의미의 결핍'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의미의 과잉'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중략)
다른 스타일로 사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 성원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도 있다. (중략)
두려움과 슬픔!
이것은 우리가 자신만의 삶을 사는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환희를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두 가지 난관이다.
어떤 난관이든 그것을 돌파하려면, 우리에게는 고요한 용기, 즉 "정밀의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허약함과 비겁함을 극복하려는 용기는 고요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삶은 천둥과 번개처럼 역동적인 모습을 취할 것이다. (중략)
하지만 남과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려고 할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끈질긴 적을 이길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수영의 말처럼 우리가 "가슴 속에 깊은 자유가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앵무새의 발언 같은 허위를 태워버리"게 되는 순간,
이제 드디어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가장 심플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앞으로도 서글픔이 간혹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스스로 도는 힘"으로 돈다는 것, 이것은 어쨌든 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 다양한 담론을 배워야만 한다. (중략)
다양한 담론을 배울 때, 우리에게는 인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반면 실천적 담론을 선택하거나 부득이하게 만들어야만 할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다.
- "나는 그들에게 감히 말한다. 모자란다고!
'고통이 언어'에 대한 고통이 아닌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란다고.
그리고 그 고통을 위해서는 '진실의 원점' 운운의 시의 지식까지도 일단 잊어버리라고.
시만 남겨놓은 절망을 하지 말고 시까지도 내던지는 철저한 절망을 하라고." _<시월평: 체취의 신뢰감>
자신의 맨얼굴로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고통은 불가피한 법이다. (중략)
하지만 이런 고통은 또한 진정한 시인의 긍지 아닌가? (중략)
당당한 자유인으로 서는 고통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언어에 대한 고통은 단지 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_<시여, 침을 뱉어라>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의지를 작동시키는 시를 쓰는 것이다.
의지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자신을 밀어붙이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 머리나 심장으로 쓰는 시는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조건을 지적인 조작으로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주어진 조건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다.
-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것을..."
_<시여, 침을 뱉어라>
김수영에게 1961년은 중요한 해다.
두번째 시작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시론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행동에의 계시"가 없다면, 즉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시는 썼다고 할지라도 쓰이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 아닌가?
김수영은 1845년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도달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실천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 "시(詩).
행동을 위한 밑받침. 행동까지의 운산이며 상승.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이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
그때는 3할의 비약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때인 동시에 회의의 구름이 가시고 태양처럼 해답이 나오고 행동이 나온다.
시는 미지의 정확성이며 후퇴 없는 영광이다." _<시작 노트 2>
1961년 그는 마침내 일체의 "슬픔"과 "두려움"의 정서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온몸의 시론"이다.
1959년만 해도 그에게 자유란 "자결과 같은" 이미지였다.
여기에는 자유를 추구하는 순간, 죽을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묻어난다.
그러나 4.19 혁명을 거치면서 이런 죽음의 이미지가 더는 김수영의 시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이제 그의 시는 "미지의 정확성이며 후퇴 없는 영광"일 뿐이기 때문이다.
2. 스타일에 대해
만약 사상을 그대로 시나 삶에 관철시키려고 하면 시나 삶은 사상의 수단이나 노예로 전락한다.
김수영에게 시와 삶은 사상보다 백배 더 중요하다.
하지만 투철한 지성, 즉 사상이 없다면 제스처에 불과한 포즈의 폐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포즈라는 가면을 벗어던질 때까지, 그래서 제대로 단독적인 삶과 시가 가능해질 때까지 사상은 유효하다.
- "시에 포즈가 없는 것이 아니다. (중략)
포즈가 성공을 거두고 실패를 하는 분기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진지성이다.
포즈 이전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포즈의 밑바닥에 그것이 깔려 있어야 한다." _<시월평: 포즈의 폐해>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서 눈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힘과 보폭으로 눈길을 걷겠다는 정신, 그는 이것을 '진지성'이라고 부른다. (중략)
비록 가난하고 남루하더라도 시인들이 당당했던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진지했으며,
나아가 그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포즈'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당당함을 노래함으로써 시인은 이웃에게 당당한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는 믿음을 조금이라도 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 바로 읽히기 힘든 글은 우리 자신을 성장시키고, 우리의 삶과 언어도 변화시킬 것이다.
"주를 바꾸려면 더 큰 주로 발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을 때,
김수영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다.
"언어에 있어서 더 큰 주는 시다.
언어는 원래가 최고의 상상력이지만 언어가 이 주권을 잃을때는 시가 나서서 그 시대의 언어의 주권을 회수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이 수정의 작업을 시인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서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한다." _<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모든 시간의 언어", 다시 말해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도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언어는 없을까?
바로 그것이 시다.
3. 김수영의 꿈
-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동시에 공동체 성원 간의 공존도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는 단지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동체 성원들이 스스로 도는 힘을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스타일을 다른 성원에게 강요하지 않을 때에만 민주주의는 실현된다.
- 푸코는 권력이 개체의 차원, 그러니까 개체의 육체나 내면까지 집요하게 관철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중략)
기존의 억압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왜 억압 체제가 소멸되지 않고, 단지 화장만 고친 새로운 억압 체제가 다시 살아나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억압 체제에서 훈육된 개체는 치명적인 병균에 감염된 환자와 비슷하다.
감염된 개체를 멸균의 새로운 상태로 이송한다고 해도,
그들은 멸균된 곳을 자신들이 가진 병균으로 오염시킬 수 밖에 없다. (중략)
결국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는 병균, 즉 적을 물리치지 않는다면 억압이 사라진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제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간의 투쟁은 외부에 그어진 국경선이나 바리케이드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 그어진 국경선과 바리케이드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 순수문학을 지향한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이미지나 형식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문학의 내용은 항상 현실로부터 길어 올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참여파 시인들은 민족주의 아니면 민중주의에 입각해서 자신들의 시 세계를 열어 간다.
하지만 민족주의나 민중주의도 개인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약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이들도 어차피 "공통된 그 무엇"을 전제하는 이념이니 말이다. (중략)
시인이 가야 할 길은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도자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문주의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중략)
예술파 시인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시를 날조하여 거기에 안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이나마 자신의 시가 자신의 관념 속에서만 정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비겁하다고 할지라도 예술파 시인의 폐해가 적은 것은 이런 까닭이다.
반면 참여파 시인은 자신이 만든 시, 혹은 제스처를 타인에게 암암리에 강요한다.
그들은 자신의 시가 오직 자신의 행동을 계시하는 데에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시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맹신한 것이다.
과거 자신이 오른 등정로만이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등정 대장과 같은 정치가의 아우라가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 "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은 시의 본질에서 볼 때는 당연히 동일한 비중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가치의 치우친 두둔에서 실패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많이 나오고,
후자의 가치의 치우친 두둔에서 사이비 난해시가 많이 나온 것을 볼 때,
비평가의 임무는 전자의 경향의 시인에게 후자의 경향을 강매하거나
후자의 경향의 시인에게 전자의 경향을 강매하는 일보다도 오히려,
제각기 가진 경향 속에서 그 시인의 양심이 살려져 있는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일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식별의 눈은 더욱이 우리 시단과 같은 정지 작업이 되어 있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리 섬세하게 작용되어도 지나치게 섬세하다는 핀잔은 받지 않을 것이다." _<생활현실과 시>
시를 쓰면서 전자의 경우는 점점 강인함을, 후자는 점점 섬세함을 얻어 가고자 하면 된다.
이것이 김수영의 근본 입장이다.
시인마다 "제각기 가진 경향"을 긍정하면서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자유를 충족하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다. (중략)
여기서의 양심은 자신의 시가 아직도 시가 되지 않았다는, 다시 말해 시의 제스처만 취했다는 뼈아픈 자각을 말한다.
-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한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_<생활현실과 시>
- 4.19 혁명의 좌절은 김수영에게 불행이자 행운인 사건이었다.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필 수 있는 희망이 덧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유로운 사회를 꿈꾼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4.19 혁명의 좌절을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다.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통찰이다.
모든 사람들이 투철한 자유정신을 가진다면,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민주적인 공동체, 그러니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일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독재자나 소수의 지배자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이념이다.
4. 김수영에게 정치란
- 김수영에게 있어 혁명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자신이 메시아라는 강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1960년의 정치 상황은 이와는 반대로 흘렀다.
4.19 혁명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정자가 다 잘해줄 줄 알고만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신이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인 동시에
정치가, 즉 대표자가 자신을 좋은 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메시아이기를 기대하는 노예 의식의 발로다.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것 자체가 모든 사람이 중심으로 삼아 도는 공통된 그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혁명적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 즉 대의제와 법치주의에 입각해서 수행한다는 것은
기존의 부르주아 법률 밑에 혁명을 가두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혁명적 정치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법률의 핵심은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비혁명적인 방법, 그러니까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기존 세력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하는 범위에서 정치 개혁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다.
김수영의 말대로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한다. (중략)
공통된 중심으로서의 반공주의나 부르주아 헌법을 유지하는 한,
모든 사람들이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여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갈 수 없다. (중략)
천국이 온다고 바라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도래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 <김일성 만세>라는 시는 그가 자신에게 부가된 '반공=동지, 친공=적'이라는 도식을 얼마나 멋지게 극복했는지 잘 보여 준다.
그가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포획되어 있다면, 이 시를 결코 쓸 수 없을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 "김일성만세"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 때, '적=동지'라는 공식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순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통된 그 무엇'으로 작용하던 반공주의는 붕괴되고,
남한 사회는 진실로 자유로운 공동체로 거듭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김일성만세"가 가능해져야만, 남한 사회에는 언론의 자유 뿐만 아니라 정치의 자유도 가능해진다고 노래한 것이다.
- 모든 것을 이념의 잣대로 보는 사회주의자에게 인간의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자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도는 힘을 포기하고 공통된 이념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매사에 긴장한다.
자신이 사회주의 이념을 어기고 있지 않는지 매번 스스로 검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불온한 야생성이라는 인상은 시인, 소설가, 철학자, 예술가가 아니라 공통된 중심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려는 권력자가 갖는 것일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권력에서 비롯되는 감시와 탄압은 자유로운 사람들, 그러니까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에게는 긍지라 할 수 있다.
5. 억압과 자유, 그리고 작가의 의무
밖으로 소리를 낼수 없으니, 소리는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다.
김수영은 안다. "도피자" 혹은 "기만적 유심주의자"가 발생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정치적 억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중략)
"삶에서의 자유"를 영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코 자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왜곡된 형태의 자유, 즉 "관념에서의 자유"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억압이 사라지거나 완화될 때,
내면에 억눌렀던 자유에의 열망은 용수철처럼 튕겨 삶에서의 자유로 분출된다.
당연히 이것은 거친 형태로 쏟아져 나온다.
- 이어령은 해방 공간과 자유 공간에서 문학자들이 정치적 주장을 피력하느라 문학자 본연의 임무인 "응전력와 창조력"이 미약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김수영은 과연 이어령이 문학의 힘이라고 역설했던 "응전력과 창조력"을 알고나 있는지 조롱한다.
문학과 예술의 "응전력과 창조력"은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지 실험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당시 우리 사회에 적용한다면 반공이데올로기가 절대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자신만의 삶의 양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전위성과 실험성이 용납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돌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스스로 삶을 살아내고 표현할 능력은 부정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 사실 이념이나 사상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이나 사상을 타인에게 강요할 때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강요하는 사람이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경우 더욱 그렇다.
생명과 생계를 볼모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들이 원하든 아니든 자신의 이념에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가 경직될 때, 다시 말해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중심에 따라 돌고 있는 상황에서,
더 강하게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살아야만' 하기에, 시인은 침묵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공통된 중심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의 목소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가 된다.
- 잊지 말자.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이유는 항상 압도적인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유래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공통된 중심을 강요하는 권력이 없다면, 어느 누가 자기 검열을 통해 권력에 미리 길드는 삶을 선택하겠는가?
그러므로 문학은 중요한 것이다.
문학은 공통된 스타일을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하고,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말처럼 모든 문학은 실험적일 수 밖에 없다.
-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 시를 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과연 이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들이 무엇인가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 방침을 관철시키려는 선생님이나 학교 당국일 것이다.
혹은 학교 방침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다른 학생들일 것이다.
자기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려는 학생은 자기 삶의 방식을 동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이미 억압적인 학교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고 한다.
자신을 그만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 모두가 메시아가 되는 세계,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 마음에 아로새겼던 이상이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당한 이상이다.
물론 이런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는 스스로 자유를 읊고 자유를 살아가야만 할 숙명,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떠맡을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의 언어가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전진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우리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임무라는 것이다.
사회인의 목적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서 적시에 심금의 교류를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에 지장이 되는 모든 사회는 야만의 사회라는 것이다." _<히프레스 문학론> (중략)
진정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과의 충돌을 기술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통념을 조롱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카프카가 그랬고, 바이런이 그랬고,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사랑이 가능한 집안은 언제나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중략)
이 가정에는 언제나 자기의 음악을 듣겠다는 소음이, 그리고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올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다.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되었다.
소음은 권력자의 시선에서만 소음으로 들릴 뿐, 자기만의 삶을 살아 냈을 때 발생하는 자유의 소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 낸 교향곡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우리는 이래서 김수영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