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2013. 4. 24. 13:04책 · 펌글 · 자료/문학

 

 

소설책 오랫만에 봅니다. 도서관 갔더니 신간이라며 들여놨습디다. 저는 주로 신간 위주로 빌려봅니다.

이 책은 안수길이라는 분이 썼는데, 생몰연대가 1911-1977 입디다. 첫 출판이 1960년이더군요. 신간은 커녕 고전입니다.

그런데 ‘초판 1쇄 발행 2013년 2월 12일’이라고 했네요?

배경은 1870년부터 1945년까지의 북간도, 이한복이라는 일가의 수난사를 그린 것이랍니다.

말로만 “간도” “간도” 하지, 간도가 어딘지 위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왤까요?

 

 

 

 

 

 

 

안수길의 < 북간도 > 에는 이한복 일가가 겪은 1909년의 간도협약 상황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침내 9월 4일(1909년) 간도에 관한 일곱 항으로 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중략) 이렇게 일본은 두만강 이북의 간도, 그 영토와 조선 주민을 송두리째 청국에 넘겨주고만 것이었다.

원한의 통감부 파출소는 물러갔다. 그러나 원한을 걷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원한의 씨를 심어놓고 간 것이다. 그 뒤엔 무엇이 올 것인가?

이젠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영 입 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북간도의 조선 농민들은 완전히 남의 나라에 온 '이미그런트' 유랑의 이주민이 되고 말았다."

100년 전 간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난 것일까.

19세기 말 조국이 그들을 간도로 보낸 것이 아니다. 흉년으로, 관리들의 폭정에 못 이겨 이들은 간도로 넘어갔다.

그곳은 신천지였다. 꿈속에 그리던 논과 밭이 있었다. 세금도 필요없었다.

소작도 아니었다. 자식들의 입으로 솔솔 흘러들어갈 곡식을 영글게 할 땅이 있었다.

이한복 일가도 그렇게 간도를 꿈꾸었다.

이한복은 종성부사 이정래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고, 간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했다.

그는 간도로 갔다.

허물어져 가는 조선 왕조가 백성들을 버렸듯이, 간도에서도 조국은 그들을 버렸다.

뒤늦게 이곳에 들어온 청국 관리들이 변발을 강요했다.

어떤 사람은 청국 지주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유민은 악착같이 조선이라는 조국을 버리지 않았다.

이한복은 손자인 이창윤이 강제로 변발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간도협약으로 이한복-이장손-이창윤-이정수로 이어지는 4대는 유랑인이 됐다.

조국은 이미 없어졌고, 일본이 이들을 관리했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이한복의 손자 이창윤은 조선족 자치군에 해당하던 이범윤의 사포대에 참가했고,

증손자 이정수는 홍범도 부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나라를 잃은 설움으로, 청국 지주의 핍박으로, 일본의 탄압으로 이들은 간도 땅에서 죽어갔다.

당시 간도에 살았던 저자 안수길은 서문에 "이 작품을 북간도에서 민족 수난으로 작고한 유·무명 인사들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적었다.

해방 후 간도에서 서울로 온 안수길은 1948년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 북간도 > 는 1959년 < 사상계 > 에 발표됐다.

소설은 해방으로 끝이 난다.

핍박 속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일부는 안수길 선생처럼 남한으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간도에 남았다.

그들은 지금의 조선족이다.

해방 이후에도 그들에게는 고통의 역사가 남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이 있었고, 1950년 한국전쟁에는 중국군으로 참여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문화혁명을 겪어야 했다.

그 사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된 조국은 그들을 잊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다.

그들에게 지금의 조국은 중국이다. 조선은 단지 모국일 뿐이다.

이한복 일가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조국의 숨결은 사라졌다.

안수길은 < 북간도 > 라는 소설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간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100년 전 간도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겐 진행형이다.

< 윤호우 경향신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