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포로수용소

2013. 4. 15. 21:19산행기 & 국내여행

 

 

 

거제도 포로 수용소

저자 이건숙 지음

출판 혜진서관 펴냄 | 1989.11.01 발간

가격 3,800원 (판매중지)

 

 

 

 

 

 

 

참 희한하네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는데 의외로 없습니다.

‘손영목 소설 거제도 (2006. 6 동서문화사)’ 라고 있다는데 e-Book으로 나와 있군요.

좀 더 검색을 해봐야겠습니다만 실체적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입장, 피난민이나 지역주민의 입장, 남북한과 미국 정부의 입장이 얽혀있어서,

각각의 주의· 주장에는 ‘은폐· 조작 ·왜곡 ·착각 ·과장’ 들이 다분히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1

다음 글은 'http://cafe.daum.net/yonchojung' 에서 퍼온 것입니다.

관련 있는 몇 대목만 추려서 정리해 옮깁니다.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시에서 귀한 분들이 거제도를 찾아 주셨습니다. 동아누리 토크토크 진행자이신

청이님과 남편인 고박사님, 두 분을 알게 된 인연은 아주 특별합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닷컴/

동아누리 (카페 여인들의 담소실)에서 알게 된 휼륭한 분들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어린시절 거제도

포로수용소 제64 야전병원 군의관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거제도로 오게 되었으며 일운면 지세포에서

1년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의 작은 어촌마을에 소재한 일운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운동장 끝에는 바다여

서 바로 뛰어 들어 물개처럼 헤엄치고 놀았던 기억과 바닷가에 널려있던 희고 곱던 모래는 포로수용소

를 짓느라고 다 퍼갔다고.... . 박사님께 들었던 모래 이야기는 당시 모래가 있는 거제도는 어느 바닷

가를 막론하고 모래를 다 퍼가서 바닷가 풍경이 오랫동안 정말 보기 흉했다는 이야기는 바닷가 사람들

로부터 종종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또 신작로에서 공을 차고 놀아도 차가 지나가지 않아 정말

놀기 좋았다고 회상하셨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거제도는 몇년간 전쟁포로와 피난민등을 수용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바뀐

적이 있었습니다. 1950년 11월<알바니작전> 이란 이름하에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

도록 계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약250만평의 광대한 농토와 임야, 3,000여 호의 주택을 사전 통보나

어떠한 보상도 없이 징발하여 포로수용소를 건설하였습니다. 거제시 고현, 수월지구 주민들은 포로수

용소의 설치로 인해 강제로 소개되었습니다. 당시 거제도의 또 다른 비극을 다룬 소개민 이야기는 거

제도 출신 작가 손영목의 소설'거제도'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가 대신하였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대구효성

초등학교,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중국군의 전쟁참가와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

포로가 크게 늘어나자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최적지로 육지와의 이동거리가 짧고

용수문제가 해결되며 보안상 안정적이라는 판단으로 거제도가 결정되었습니다. 1950년11월 27일 거

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곧 360만평 규모로 늘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의용군과 의자포로 300명을 포함 포로 17만 3천명을 수용하는 수용소군도가 들어섰습니다.

1951년 휴전회담이 거론되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 역시도친공과 반공 좌우로

나뉘어 죽음을 부르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대

한민국은 몰라도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하' 라며 고개 끄덕인다고 합니다. 전쟁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되었으며, 1954년 1월 23일 인민군 111,754명

 + 중공군 20,720명, 총합계 132, 474명의 친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

전군 1,216명 중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습니다.

 

 

 

 

 

 

 

1952년 5월 7일 도드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를 당한 치욕스런사건이 발생하자  포로수용소 지역

내의 주민 1,116세대를 소개시키고, 출입을 통제하던 유엔군 헌병검문소가 1917년 가설한 연초면 연

사리의 MP다리(현 연사교) 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두 개

조국이 존재하였으며 반공과 친공으로 나뉘어져 친공포로들은 수시로 폭동을 일으켜 투쟁과 학살을

일삼아 2천여명의 포로가 이 기간동안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포로의

몸으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들겠지만 당시 포로들이 남긴 그림이며 사진들이 

그들의 자유로웠던 생활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로들은 또 앞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

다양한 형태의 직업 교육도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1] 각종 악기를 다루고 있는 포로들도 많았는데 고향의 가족들이 보고 싶을때는 이렇게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요? 포로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기자, 작가, 교사등 전문직의 포로들도 있었는데 이들

은 여러 분야에서 일정한 역활을 맡아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2] 여자포로들을 사진으로 보면 깨끗한 복장과 구두를 신은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

니다,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국군이나 일반인들보다 품격있는 대접을 받은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허기지고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자 차라리 포로가 되어 밥이나 배불리 먹어보고 싶다 고 말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진3] 78수용소 게이트 및 위병소.  1951년 9월 17일 인근의 포로수용소인 76,77수용소와 함께 대

대적인 반동 숙청을 실시한 9,17 폭동을 주도한 수용소입니다. 이 폭동으로 무려 400명의 반공청년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했던 곳입니다.

 

[사진4] 미 제64야전병원의 옛모습 <옮긴 사진>

포로들의 건강 관리를 위하여 수월과 해명 마을 사이 주작골 입구에 미 제64야전병원이 있었습니다. 이곳

에는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2개의 별관이 있었는데 한곳에 2,500개의 침대가 있었습니다.

별관 부속병원은 요양소이며, 64야전병원의 대부분은 미군 군의관들이었으며 한국군 군의관과 간호원들도

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포로 가운데 의사 출신과 간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아 채

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곳은 엉뚱하게도 포로들의 접속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아프다

는 핑계를 대고 입원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또 막사와 막사간의 연락과 지시를 병원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이런 사항을 미군들이나 한국군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진5] px및 무도장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이 곳은 포로송환을 끝낸 후 포로수용소의 기능이 끝나자 소개민이 되

어 떠나갔던 주민들이 돌아와서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를 무너뜨리고 논밭으로 되돌리는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던 소개민들의 아픔과 땀과 눈물이 맺힌 곳이기도 합니다.

 

 

 

 

 

 

2 (아래는 아고라에 소개되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출처는  <민중의소리> 입니다.)

 

 

"미제 식민자들은 전쟁포로를 생포한 첫 시각부터 국제법규에 의해서 억류하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그를 원자탄 세균 무기 및 각종 의학실험 대상으로 하여 인질로서 새 전쟁확대를 위

한 정치적 모략화를 하고 상품으로서 리승만, 장개석 도당에게 팔아먹어 재무장화 영원한 노예로 침략

전쟁의 **로서 투입할 가공할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쑤들은 심지어 수백명의 포로들을 한 줄에

세워놓고 증기와 경기의 관통능력을 실험하였으며... (중략)...적지 않은 포로들이 의학실험에 걸려

청춘을 빼앗겼으며 또 그보다 더 끔직한 사실은 수천 수백명의 우리 전우들이 비밀세균 실험실에서

세균탄 실험대상으로 적십자의 그늘 밑에서 이러한 죄악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1992년 12월 14일 경남 거제군 신현릅 고현리 용신마을 제 6포로수용소 화장실 자리에서 간이 경지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 기사 김동윤(당시 26세)씨가 병에 들어 있던, 포로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던 편

지와 포로들의 내부관리 서류 50여점을 발견했다. 광목천으로 가로 80cm, 세로 1백20cm크기의 속

옷을 찢어 만든 이 편지는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 이라고 적혔으며 "미군이 북한포로

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으며 편지 끝 부분에는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 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

라고 쓰여 있었다. 이와 함께 발견된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수용소 내 도주우려

자, 변절자등을 파악한 보고서, 포로들의 전투훈련 종합통계, 적 무기 통계양식, 각 호실 지형서, 사상

무장 지침, 투쟁 격려문등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

 

땅속에 묻혀 있던 현대사의 진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를 처음 필사했던 당시 거제 신문사의 서용

찬씨는 "약간의 과장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편지를 만든 천이며 내용들을 볼때 당시 포로들이 직접 쓴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한국전쟁이 남겨준 많은 상처 중에 특히 '이데올로기 전쟁터'로 불

리웠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미군 만행은 여전이 피해자의 증언만 있을 뿐이다.

"원쑤들은 심지어 수백명의 포로들을 한 줄에 세워놓고 증기와 경기의 관통능력을 실험하였으며....

자탄, 세균무기 및 각종 의학실험 대상으로 하여...전시핵과 실험용으로 팔과 다리를 짤리었으며......

비밀세균 실험실에서 세균탄 실험대상으로..."


포로수용소내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수용소 안에서 생체실험과 세균무기실험이 행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52년 3월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의 보고서는 미군에 의해 세균전이 진행되었음을 확

인했다. 협회의 조사단은 북한 곳곳에서 페스트, 콜레라, 티프스, 출혈열, 일본 뇌염등의 균을 가진 특별

한 벼룩과 파리, 썩은 생선, 거미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할 곳에 집단으로 뭉쳐

있었다. 이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미군 비행기가 아주 낮게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곤 했던 것이 확인

됐다.
이러한 내용은 52년 6-8월 사이 작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의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세균전 사실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무기제조 지

도자 이시이 시로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을 나타냈다.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은 일본인과 나찌 세균전문

가를 고용하였고, 제네바 협정으로 사용금지된 신경가스 사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를 부인하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고 적고 있다. 이시이 시로는 마루타, 즉 인간생체실험을 주도한 장

본인이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황인종 놈들"

전쟁에 있어 포로수용소라는 것은 전쟁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매개기도 하거니와
감춘다고 감추어질

일도 아니요,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일도 아니다. 지난 52년 8월 영연방군 부대의 지휘관이었

던 도니 밴크로프트 소령(왕립슈롭셔경보병부대)에 의하면 미군들은 거제수용소의 포로들을 보통 "눈꼬

리가 치켜 올라간 황인종 놈들(yellow bastards)"이라고 호칭했다고 밝혔다. 당시 북한군 3천200명이

수용돼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미군으로부터 인계받기 위해 파견된 그가 작성한 문서에는 보초를 서던

미군 병사들이 졸거나 근무지를 이탈해 현지 창녀촌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고 지적했으며 포로들

의 막사를 좀처럼 검사하지 않았고 우편물도 불규칙하게 전달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 소령은 부임초기 병원 호송 임무를 맡은 미군에게 학대받은 포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

이 개입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이는 내가 목격한 미군들의 많은 제네바협약 위반사례중 하나"라고 말했

다. 1993년 8월 '월간 길'지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영국의 특파원 레지날드 톰슨은 "미군 헌병들은 적들

을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취급한다"고 적어 미군이 한국민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짐작케

했다. 또한 50년 런던의 '픽쳐 포스트'의 제임스 카메론은 "이곳은 벨젠 수용소보다 더 참혹하다.... 나는

분개하여 UN위원단에 항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 최악의 혼란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는 매우

른 행동기준을 갖는...모든 것이 매우 다른 아시아인임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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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로수용소 테마파크에 ‘전쟁문학관’ 세우자

- 소설가 손영목·시인 김수영 작품 등 기반 충분
2010년 01월 08일 (금) 15:23:46 전의승기자 saegeoje@paran.com

옛 고현중학교 부지 위에 추진되고 있는 포로수용소유적공원 테마파크 조성사업에 ‘한국전쟁문학관’

건립도 포함해야 된다는 지적이 높다.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다수인데다 포로생활

을 체험했던 김수영 시인(1921~1968)의 포로체험 산문집이 최근 발견되는 등 그 토대는 충분한

까닭에서다. 
시는 그러나 ‘체험학습형’을 내세우면서도 ‘전쟁문학관’ 건립에는 소극적인 분위기다. 시 관계자는

전쟁문학관 설치 여부에 대해 “검토해 볼 순 있으나 현재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소설가 손영목의 ‘풍화’와 ‘거제도’, 장용학 작가의 소설 ‘요한시집’, 강용준

작가의 소설 ‘철조망’을 포함해 최인훈 작가의 장편 ‘광장’ 등 다수다.
특히 포로로 체험했던 김수영 시인의 산문 ‘포로체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의용군으로 징집된 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일화와 25개월 후 석방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최근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전쟁문학관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은 충분하다는 게 거제 문인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전쟁문학 세미나’를 여는 등 전쟁문학 조명에 심혈을 기울여

온 거제문인협회 관계자는 “한국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의 면면도 문학사적으로 충분히 평가되고 있

다”며 전쟁문학관 건립 당위성을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거제시에 전쟁문학관 건립을 건의했으

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토로했다.

 

 

 

 

 

 

 

 

 

 

 

4

출처.천주교 인권위원회

앞 뒤 글이 있는 모양인데 못찾겠습니다.

 

 

 6.25 한국전쟁 시기 전쟁포로들에 행한 미군의 만행자료3
 작성자 : 펌  2002-11-30 00:45:12   조회: 1383   

-이어서-

6) 1952년 9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1주일간에 거제도 제14수용소 18대대포로들에 대하여  

미제침략군 제555헌병대대와 13헌병중대 및 이승만괴뢰군 제132경비대대 등 600여명의 무장한

군대들은 비법수사를 실시하였다.

9월 27일 오전 비법수사는 제2대대 포로들에 대하여 실시되였으며 그날 오후에는 제88대대,

9월 29일 오전에는 제33대, 그날 오후에는 제5대대, 9월 30일에는 제6대대, 10월 1일에는 제1대대,

10월 2일에는 제4대대, 10월 3일에는 제7대대에 대하여 수사를 진행하였다.

수사실시시에는 포로들을 손을 머리 위에 놓고 일렬로 세워 밖으로 내몰았다.
수용소의 전체 집들을 수색하였다. (의복, 담요 등). 개별적 경우에는 수사 시에 방벽까지 허물었다.

미국놈들과 이승만 괴뢰도배들의 비법적 행동을 반대하여 나선 포로들에게는 무력을 적용한 바

그 결과 2,8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235명이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7) 1953년 5월 1일 거제도 제1수용소 '지'대대에서 미제침략군 제8137헌병 집단 사령부관하 

제13헌병 대대소속 미제침략군 헌병소좌 뺀드렛톤이란놈은 이승만 괴뢰군 제878부대 장교, 졸병들

250여명을 이용하여 수사를 실시하였다.
약 500명의 포로들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이승만괴뢰군대는 포로들을 나체로 하고 수색하면서

입, 코, 귀, 머리들을 들여다보았다.
수사 시에 연필과 종이를 가진 8명의 포로들은 그들의 폭행에 의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전체 포로들에게 말하기를 '포로들은 읽고 쓰고 하며 종이와 연필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8) 1951년 8월 15일밤 8시 30분 거제도 P62호 수용소에서는 수용소관리책임자 미육군헌병대위

카레리란놈과 제92헌병대대 경비부책임자(성명미상)와 이승만괴뢰군 제32대 소속 중위놈은

이승만괴뢰군 32연대 졸병 30명에게 이 수용소 제3대대 포로들이 8.15조선해방일노래를 불렀다 하여

그들을 사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사격은 10분간 계속되었는 바 그 결과 3명이 죽고 27명이 중상 당하였다.

9) 1951년 8월 15일 부산 거제리 제1, 2, 3, 4, 5, 6, 7, 8, 9, 10, 11 포로수용소들에서

미제침략군 제93헌병대대소속 병졸들과 이승만괴뢰군 제31경비대대소속 700명의 병졸들은

엠완보총으로 무장하고 경비과장 미육군 헌병대위 죠께이스놈의 지시에 의하여

포로들이 8.15명 절에 제하여 노래를 불렀다 하여 조선인민군 포로들에게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미국놈들과 이승만괴뢰도배들은 3대의 탱크, 5대의 장갑차, 10정의 중기, 3정의 경기 엄호하에

행동하였다.
'작전'은 미제침략군 헌병대위 메이비스, 제4포로수용소장 군의대위 가, 제6수용소 관리책임자

군의대위 웨루멘, 경비대대 지휘관 이승만괴뢰군 헌병소자(성명미상)놈이 지휘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사격은 저녁 9시 20분부터 10시까지의 40분간에 걸쳐 계속되였는바

그 결과 44명이 죽고 86명이 중상을 입고 101명이 경상을 입었다.

10) 1951년 9월 18일 아침 10시에 제84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국놈들에 의하여 총살당한 포로

최순식의 장례식이 조선인민군포로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진행되였다.
거제도 주둔 미제침략군 헌병 제94대대 지휘관 미제침략군 헌병중좌 데임이란 놈은 5대의 장갑차,

3문의 박격포 엄호 하에 100명의 군대를 수용소 주위에 배치하였다.

미제침략군은 데임놈의 지시에 의하여 아침 10시 32분부터 11시 30분까지 포로들에 대한 사격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13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음 100명에 가까운 미제침략군 및 이승만괴뢰군 종합부대가 수용소 내에 침습하여 총창으로

400여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336명을 71호 수용소 유치장에 감금하였다.

11) 1953년 2월 9일 거제도 제17포로수용소 소장 미육군 중좌 에프. 에스. 떼일라르 놈은

자기 관하수용소 관리 측에 2월 8일과 관련한 일체 경축행사를 중지시키며 이 명령을 위반한 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을 지시하였다.
명령은 이 수용소들에 수용되고 있는 전체 포로들에게 전달되었다.
2월 9일 제3관구 제5대대 소속의 약간의 포로들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노래를 부르자

미제침략군 중좌 떼일라르놈과 경비과장 미제침략군 대위 죠깨이스란 놈은

미제침략군 제555헌병 부대 소속 50여명의 병졸들과 이승만 괴뢰군 6183부대의 한주애에게

14정의 중기, 8정의 경기, 화염방사기 및 기타 엠완보총, 카빙총 등 무기를 주어 이를 진압시키는데

동원시켰다.
포로들이 있는 수용소에 침입하여 저녁 5시부터 시작하여 2시간반 동안
포로들에 대한 유혈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포로들의 가슴과 얼굴과 배를 잘랐다. 4명은 죽고 71명은 부상을 입었다.

12) 1953년 3월 9일 거제도 제3수용소에서는 미제침략군 제8137헌병집단본부 제13헌병대대

헌병소좌놈은 이승만괴뢰군 제878부대 소속 졸병 500명과 함께 조선인민군 포로 4,000명을

수용소 광장에 끌어내다가 그들을 구타하였다.

괴뢰도배들은 곤봉으로 얼굴, 가슴, 손발을 난타하여 포로의 대다수를 부상시켰다.

13) 1953년 4월 17일 용초도 제3포로수용소 관리책임자 미육군 소좌 죠세프 제이, 킹스베리놈과

이 수용소 제4대대 책임자 하사 샴쉘이란 놈은 이 수용소 각 대대포로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놓고

조선인민군 군모박탈과 부역 등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을 언명하였다.
그후 이날 4시 30분 경에 완전히 무장한 미제침략군 중대와 이승만괴뢰군 제6133부대 소속 한 개

 대대는 수용소 광장에 모인 제18대대 포로들을 포위하였다.

포로들에게 수용소 내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고 수용소에 150발 이상의 수류탄을 던지고 보총으로

사격하였다. 그 다음 이놈들은 수용소에 침입하여 포로들을 총창으로 찔러 17명을 즉사시키고

190명을 부상시켰다.

5. 전쟁포로들에 대한 강제억류

조선에서의 침략전쟁의 초기부터 미국놈들은 모든 전쟁포로들을 의무적으로 송환할 것을 예견한

국제법의 원칙을 위반하는 길에 들어섰다.

전쟁포로들을 강제억류하기 위하여 미국놈들은 소위 '송환을 원치 않는 자'들의 '선별'을 실시하고

남, 북 출신 포로 또는 시민억류자 등으로 강제 선별하고는

그들에게 소위 '석방탄원서'를 제출할 것을 강요하면서 그들에 대한 강제억류의 구실을 각방으로

획책하였다. 이와같은 목적을 추구하면서 미국놈들은 조선정전담판 진행과정에 소위 '자원송환'이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1952년 3월부터 미제포로수용소 당국은 전쟁포로들을 억류하기 위하여 그들에 대한 개별심문을

노골적으로 실시하였다.

 

1) 1950년 12월 초순 부산 거제리 수용소 각 병원들에서는 미육군 중장 니골스의 직접적 지령에

의하여 10여명의 미제침략군과 이승만 괴뢰50여명이 매개 환자포로들에게 소위 '석방탄원서'를 쓸 것을 강박하였다.
'석방탄원서'는 미리 인쇄된 용지에 매개 포로들의 본적지, 생년월일 및 약력을 기입케 하고  

인민군대에 강제로 나왔는가 자원에 의하여 나왔는가를 심문하여 기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자원하여 군대에 나왔다고 하거나 '석방탄원서'를 쓸 것을 거부하는 포로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곤봉으로 구타하며 밧줄로 묶어서 천장에 달아매며

나체로 하여 냉수를 끼여 얹고 밖에서 얼리는 등 악형과 고문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1950년 12월 7일 부산 거제리 수용소 제1호 병원에서만 하여도

28호 침대 김문수 외에 7명을 고문 치사했으며 50여명의 중상자를 내였다.

2) 1951년 10월 15일 거제도 60단위 수용소 소장 미육군 중좌 에이. 엘. 엔파트는

 60호-68호 수용소에 수용되고 있는 조선인민군 전쟁포로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쟁포로가 아니라 민간억류자들이라는 것을 성명 시키기 위하여

미리부터 포로로 가장하여 잠입시킨 이승만 괴뢰특무들을 상기 각 수용소의 매개 수용소마다

50명씩 재배치시켜 놓았다.
당일 에이. 엘. 엔파트는 직접적인 지휘하에 포, 탱크, 수류탄 및 저격무기 등으로 무장한 무력을

한 개 수용소에 300명씩 수용소 주변에 배치하고 민간억류자심사를 받겠느냐 안받겠느냐고 위협하였다.
포로들이 이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에이. 엘. 엔파트는 각 수용소에 일제히 포탄 70여발을 발사하고

동시에 보총 사격을 감행하였다.

결과에 80여명의 조선인민군포로들이 학살 되였으며 500여명의 인민군전쟁포로들이 중상 당하였다.

3) 1952년 2월18일 오전 3시 30분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관 미제침략군 육군헌병대좌 훠찌째랄드는

제92헌병대 대장 미육군 헌병중좌 바라바스, 제62호 수용소 책임장교 미육군 헌병소좌 케이스 및

제62호 수용소 미제침략군 부관 마쓰테쓰 마데유와 함께 자기 지휘하의 미제침략군부대 약 1,000명을

수용소 주위에 배치하였다.
이날 오전 3시 30분을 기하여 권총 한 발의 발사를 신호로 수용소 주위에 배치된 화력은

2분간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수용소 당국의 이와 같은 행동은 이 수용소의 약 8,000명의 전쟁포로들이 지난 수개월 동안

'민간억류자'로 되겠다고 서명날인하지 않았다는 것과

작년 2월17일 이승만 괴뢰 '문교부 장관'의 해설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민군전쟁포로로서 공화국에 돌아가겠다. '고 하는데 기인되었다.

이리하여 수용소는 그 주변에 배치된 25정의 중기와 63정의 경기의 사격을 당하였다.

수용소에 대한 2분간의 일제사격이 끝나자

대기했던 미제침략군부대는 수용소 내에 들어와 수류탄을 던졌다.

이 조직적인 침습으로 인하여

이우영(29살, 서울시 영등포 출생), 정봉환(25살, 서울시 종로구 출생), 정원준(22살, 전북 전주 출생), 서마영(22살, 서울시 용산 출생),김동진(24살, 서울시 용산 출생), 조점수(23살, 전남 광주 출생), 김인배(25살, 서울시 출생),  김수남(28살, 제주도 출생), 선진호(29살, 경북도 출생), 송증수(23살, 충남 출생), 김래의(28살, 인천 출생), 유동진(24살, 군산 출생), 변춘식(41살, 전남 화순 출생), 이진현(22살, 전남 광주 출생), 김창수(40살, 전남 광주 출생)등 102명을 즉사시켰으며 김영상(26살, 경기도 개성 출생), 정광준(22살), 김상국(29살), 서정옥(31살), 방제천(25살)등

26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4) 1952년 3월 13일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대 경비과장 미제침략군 육군대위 레이니놈은  

거제도 제92포로 수용소의 조선인민군전쟁포로들을 강압하였다.
이 강압계획의 수행을 위하여 레이니 대위놈은 오전 8시에 제91호, 93호, 94호 및 96호 수용소로부터

이 수용소에 미리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잠입시켰던 약 1,000명의 이승만 괴뢰도당들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멸공단 만세', '공산주의자를 죽여라', '92호 수용소를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 행진시켰는바

상기 테러 인원들의 시위행진의 선두에는 헌병대위 윌손을 선두로 한 미제침략군 전하사 및

이승만괴뢰군 전하사들 약 300명이 참가하였다.
9시 30분 시위행렬이 제92호 수용소 정문에 도착하자 상기 레이니 대위는 이승만괴뢰군 통역을 통하여

'지금부터 92호 수용소 악질 빨갱이를 잡아죽이겠으니 정신을 똑똑히 차렷'하고 외치고

강압의 신호로 권총 1발을 발사하였다.
300명의 무장병력은 92호 수용소를 향하여 약 20분간 중단 없는 사격을 감행하였다.

김순남은 자기 옆에 서 있다가 미제침략군의 흉탄에 맞아 쓰러진 심태윤을 일으키면서 간호한다고 하여

상기 레이느대위놈이 직접 권총으로 쏘아서 즉사시켰다.

여기에서 13명을 즉사시켰으며 78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거제도 제76호 수용소 사령관 미제침략군 육군중장 보우트너는 수일간에 거쳐

이 수용소의 전쟁포로들을 강압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미제침략군 제187공정연대, 제2사단 제27연대, 미제침략군 제92, 94헌병대대 등

약 4,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 병력은 20문의 포와 40정의 중기 및 경기와 엠완보총, 카빙총과 22대의 탱크로써 무장되어 있었다.
이 작전의 목적은 76호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6,800명의 전쟁포로들의 '개인 면회 심사'를 용이케

하기 위한 데 있었다.

1952년 6월 10일 6시 10분 정각 미제침략군 육군중장 보우트너는 73호 수용소를 공격할 것을

신호하였다.

미제침략군은 이 수용소에 대하여 무차별 난사하며 독가스를 살포하고 수류탄을 투탄 했으며

탱크를 수용소 내에 침입시켜 포로인원들을 탱크로 깔아 죽이었다.
육군중장 보우트너는 감시초소로부터 이 수용소의 침습을 지도하였다.

이 수용소에 대한 공격은 4시간 계속되었다. 10시 30분 침습은 끝났다.
이 결과 276명의 조선인민군 전쟁포로가 즉사하였으며 4,0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5)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대 부관(성명미상)은 미제침략군 종군목사(성명미상) 1명과

괴뢰군 제33경비 대대소속 이승만괴뢰군 중위 김연우를 데리고

1952년 4월 7일 오전 9시에 거제도 76호 수용소에 와서

이 수용소에 미리부터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투입해 두었던 테러분자 김두익에게

권총 1정과 최루탄이 든 상자를 넘겨주면서

같은 달 9일에 실시하는 '개인 면회심사'에서 한사람도 북조선에 갈 사람이 없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부관의 지시에 의하여 300명으로 조직된 이 수용소내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 '멸공단',

'기독교회' 가담자들은 4월 8일 오후 7시부터 8,000여명의 포로들을 수용소 내 '씨.아이.이. 학교'에

개별적으로 호출하여 권총으로 심문하였다.
심문 시에 놈들은 고문으로 위협하면서 전쟁포로들이 남조선에 남을 것을 각박하였다.

이에 응치 않은 포로인원들은 총살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에 170명 이상의 포로들이 학살당하였다.

6) 1952년 4월 8일 오후 3시 30분 거제도 제81호 수용소에서

이 수용소 책임장교 미제침략군 육군 헌병대위 스나이더는 미제침략군 종군목사 옥호열대위와 

제33경비대대 소속 이승만 괴뢰육군 중위 김관희와 함께

미국식 전투용 권총 1정과 실탄 30발을 차로 가지고 와서 미리부터 이 수용소에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투입하여 수용소 여단장으로 배치해둔 테러분자 배영호에게 넘겨주고

'오는 4월 10일에 개인면회심사를 실시하겠으니 한사람도 북조선으로 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를 주었다.
이 지시에 의하여 배영호는 이 수용소 경비대장 마초원과 결탁하여

이날 오후 8시 30분부터 이 수용소 7,500명의 포로들에게 너비 5센치메타, 길이 6센치메타의 백지를 분배하여 북조선에 갈 사람은 '북'이라고 쓰고 남조선에 남을 사람은 '남'이라고 써서 제출하라고 지시를 주었다.
이 용지들을 회수한 후 배영호는 이날 오후 10시에

'북'이라고 쓴 전쟁포로를 하나씩 이 수용소 내 '씨.아이.이. 학교'에 불러다

80명의 기타 테러도당들과 함께 전쟁포로를 고문하였다.

이 결과 90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7) 1952년 4월 9일 거제도 제83호 수용소에서 이 수용소 책임장교 미제침략군 육군헌병대위 마취는

이승만 괴뢰군 제3경비대대소속 육군대위 박(이름 미상)과 함께

이 수용소에 미리부터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투입하여 수용소 여단장으로 배치해 두었던 테러단원

장위선과 기타 박의 부하들에게 20개의 단도를 주었다.
이 수용소에서 '개인 면회 심사'를 진행할 모략을 준비한 다음 상기 마취대위는 북조선으로 가겠다는

사람을 처리할 데 대하여 지시하였다.  
이 수용소 포로인원 6,400여명에게 이날 오전 7시 30분부터 백지를 분배하여 북조선에 가겠는가

또 남조선에 남겠는가에 대한 자기의 희망을 기입케 하였다.
이 배포한 용지를 수집한 후 테러들은 북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한 포로들을 불러다 고문, 구타, 학살하였다. 이 결과에 50여명이 학살되었으며

60명이 테러들에 의하여 '씨. 아이. 이. 학교' 근방 광장에서 생매장되어 죽었다.

8) 1952년 4월 12일 거제도 제71호 수용소에서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대 헌병중좌 레이본의  지시에 의하여

이 수용소 책임장교 미제침략군 헌병대위(성명미상)가 '유. 에스' 마크가 찍힌 단도 2백 여개를

수용소 내에 반입하여 이 수용소에 미리부터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투입해두었던 테러분자 고영수에게

주면서 '개인 면회 심사' 실시 시에 북조선에 가겠다는 포로들이 없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4월 12일 오전 7시부터 이 수용소포로 약 5,00명에 대하여 소위 '개별 심문'이 개시되었다.  

이 심문장소에는 미제침략군 대위를 선두로 한 275명의 미제침략군 및 이승만 괴뢰군 병졸들이

동원되었으며 동시에 상기 테러분자 고영수외 300여명으로 구성된 살인단들이 동원 되였다.
심문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을 표명한 전쟁포로들을 단도로 찌르고 곤봉으로

난타하여 125명 이상의 전쟁포로들이 무참히 살상되었다.

9) 1952년 4월 9일 거제도 제73호 수용소에서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대소속 제73수용소 책임장교 미육군 헌병대위 브라운 놈은  '개인 면회 심사'를 획책하고 이 수용소 내에 전쟁포로로 가장시켜 배치해 두었던 김명원외 239명의 테러분자들에게

'북조선에 가는 사람이 한사람도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날 오전 7시부터 '개인 면회 심사'를 시작한 바 브라운 대위놈은 미제침략군 장교 30여명과 엠완보총,

카빙총으로 완전 무장한 미제침략군 전하사 280명의 테러단은

수용소 내 '씨. 아이. 이. 학교' 내부에 길이 12메터, 너비 10메터, 깊이 8메터의 토굴을 파고

북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포로 김인원, 이창수, 최경곤, 기해룡, 정기우, 윤병룡, 강철갑, 한광옥 등

27명을 곡괭이, 삽 등으로 난타 학살한 후 상기 토호에 매장하였다.

1952년 4월 10일 거제도 제95호 수용소에서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대 경비과장 미육군 헌병대위 레이니 놈은

95호 수용소 포로들이 '개인 면회 심사'시 남조선에 남을 것을 거부하였다 하여

양일간 식량과 음료수 공급을 중단시켜 포로들을 기아에 빠뜨렸다.

그리고 이날 오후 5시 정각 상기 레이니 대위놈은

직접 95호 수용소 책임장교 미군 헌병대위 윌손과 협동하여

미제침략군 제7사단의 약 450명과 이승만 괴뢰군 제33경비대대 장교 및 전하사 200여명을 동원하여

95수용소를 포위하였다.

이놈들은 경기, 중기, 엠완보총 및 권총으로 무장하였다. 

이승만 괴뢰군 80명에 각각 곤봉을 휴대시켜 수용소 내에 침습 시킨 다음

이 수용소 포로들을 무차별 난타케 하여 5,000여명의 포로들이 혹독한 구타를 당하였다.

이 구타에 이기지 못하여 수용소로부터 쫓겨 나오자

레이니 놈은 전쟁포로들에게 사격할 것을 군대에 명령하였다.
45분간 계속된 사격의 결과 45명의 전쟁포로들이 중경상을 당하였다.

10) 1952년 4월 8일 거제도 제93호 수용소에서 미제침략군 제94헌병대 소속 장교는

 제33경비 대대의 30명의 사병들과 협동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돌아갈 것을 원하는 포로인원에게

야수적 고문을 가하여 72명의 조선인민군 전쟁포로를 이 수용소 '씨. 아이. 이  학교'에서 학살하였다.

11) 1952년 4월 10일 오전 8시경부터 오후 11시까지에 거제도 제91호 수용소에서

이 수용소 미제침략군 행정원 일등 상사 오브라스키 놈은 이 수용소 기독교 회신자로 가장하고 잠입한

이승만 괴뢰테러단 25명과 협동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는 조선인민군 포로 150명을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테러도당들은 북조선에 돌아갈 것을 원하는 포로들을 카빙총으로 위협하여

도자기 가마에 쓸어 넣고 불을 질러 구워 죽이었으며

이 수용소 내 '씨. 아이. 이. 학교' 건물 내부에서 120명을 야수적으로 학살하고

그 시체를 깊이 8메터, 너비 4메터, 길이 12메터의 노호 속에 매장하였다.

12) 1952년 4월 10일 거제도 제94수용소에서 이 수용소 책임장교 미제침략군 육군 헌병대위는

이승만 괴뢰군 제33경비 대대소속 육군중위 황삼주와 이 수용소 특무 강명호외 60여명의 협조를 받아

이 수용소에 수용 중인 포로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갈 것을 원하는 34명을 곤봉으로

때려죽이고 달아매고 단도로 신체를 찢었다.

13) 1953년 4월 14일 거제도 제1수용소 제8대대에서 이 대대의 미제침략군 상사 마크놈은

판문점 정전 담판이 성사되어 수용중의 포로들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된다는 데로부터

아무러한 이유도 없이 돌연히 조선인민군 포로 조인수(포로번호 22212)와 7명을 호출하여다가

이 수용소 고문실에 집어넣은 다음

미리 투입하여 두었던 10여명의 이승만 괴뢰 특무들을 시켜 그들을 물고문하여 실신케 한 후

화젓가락을 달궈 가지고 실신한 포로들의 몸에 반공 구호들을 새기는 등 가혹한 고문 끝에 학살하였다.

6. 여성 전쟁 포로에 대한 만행

(아래 언급되는 모든 만행들은, 육전에 있어서의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개선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 제 3 조(1)-(c)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특히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우를 금지하는 조항과,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제협약에 대한 추가 및

비국제적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제2의정서), 제 4 조 2-마.

개인의 존엄에 대한 침해 특히 모독적 비하행위, 강간, 강제매춘 및 모든 형태의 비열한 폭행의 금지 규정의

위반행위들입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