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5. 21:19ㆍ산행기 & 국내여행
저자 이건숙 지음
출판 혜진서관 펴냄 | 1989.11.01 발간
가격 3,800원 (판매중지)
참 희한하네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는데 의외로 없습니다.
‘손영목 소설 『거제도』 (2006. 6 동서문화사)’ 라고 있다는데 e-Book으로 나와 있군요.
좀 더 검색을 해봐야겠습니다만 실체적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입장, 피난민이나 지역주민의 입장, 남북한과 미국 정부의 입장이 얽혀있어서,
각각의 주의· 주장에는 ‘은폐· 조작 ·왜곡 ·착각 ·과장’ 들이 다분히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1
다음 글은 'http://cafe.daum.net/yonchojung' 에서 퍼온 것입니다.
관련 있는 몇 대목만 추려서 정리해 옮깁니다.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시에서 귀한 분들이 거제도를 찾아 주셨습니다. 동아누리 토크토크 진행자이신
청이님과 남편인 고박사님, 두 분을 알게 된 인연은 아주 특별합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닷컴/
동아누리 (카페 여인들의 담소실)에서 알게 된 휼륭한 분들입니다. 고박사님께서는 어린시절 거제도
포로수용소 제64 야전병원 군의관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거제도로 오게 되었으며 일운면 지세포에서
1년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의 작은 어촌마을에 소재한 일운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운동장 끝에는 바다여
서 바로 뛰어 들어 물개처럼 헤엄치고 놀았던 기억과 바닷가에 널려있던 희고 곱던 모래는 포로수용소
를 짓느라고 다 퍼갔다고.... . 박사님께 들었던 모래 이야기는 당시 모래가 있는 거제도는 어느 바닷
가를 막론하고 모래를 다 퍼가서 바닷가 풍경이 오랫동안 정말 보기 흉했다는 이야기는 바닷가 사람들
로부터 종종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또 신작로에서 공을 차고 놀아도 차가 지나가지 않아 정말
놀기 좋았다고 회상하셨습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거제도는 몇년간 전쟁포로와 피난민등을 수용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로 바뀐
적이 있었습니다. 1950년 11월<알바니작전> 이란 이름하에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
도록 계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약250만평의 광대한 농토와 임야, 3,000여 호의 주택을 사전 통보나
어떠한 보상도 없이 징발하여 포로수용소를 건설하였습니다. 거제시 고현, 수월지구 주민들은 포로수
용소의 설치로 인해 강제로 소개되었습니다. 당시 거제도의 또 다른 비극을 다룬 소개민 이야기는 거
제도 출신 작가 손영목의 소설'거제도'에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대전형무소가 대신하였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대구효성
초등학교,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중국군의 전쟁참가와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
로 포로가 크게 늘어나자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 최적지로 육지와의 이동거리가 짧고
용수문제가 해결되며 보안상 안정적이라는 판단으로 거제도가 결정되었습니다. 1950년11월 27일 거
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곧 360만평 규모로 늘려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의용군과 의자포로 300명을 포함 포로 17만 3천명을 수용하는 수용소군도가 들어섰습니다.
1951년 휴전회담이 거론되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 역시도친공과 반공 좌우로
나뉘어 죽음을 부르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거제도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대
한민국은 몰라도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아느냐고 물으면 '아하' 라며 고개 끄덕인다고 합니다. 전쟁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협정되었으며, 1954년 1월 23일 인민군 111,754명
+ 중공군 20,720명, 총합계 132, 474명의 친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
전군 1,216명 중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습니다.
1952년 5월 7일 도드준장이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를 당한 치욕스런사건이 발생하자 포로수용소 지역
내의 주민 1,116세대를 소개시키고, 출입을 통제하던 유엔군 헌병검문소가 1917년 가설한 연초면 연
사리의 MP다리(현 연사교) 에 설치되었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두 개
의 조국이 존재하였으며 반공과 친공으로 나뉘어져 친공포로들은 수시로 폭동을 일으켜 투쟁과 학살을
일삼아 2천여명의 포로가 이 기간동안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포로의
몸으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들겠지만 당시 포로들이 남긴 그림이며 사진들이
그들의 자유로웠던 생활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포로들은 또 앞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
록 다양한 형태의 직업 교육도 받았다고 합니다.
[사진1] 각종 악기를 다루고 있는 포로들도 많았는데 고향의 가족들이 보고 싶을때는 이렇게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요? 포로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기자, 작가, 교사등 전문직의 포로들도 있었는데 이들
은 여러 분야에서 일정한 역활을 맡아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2] 여자포로들을 사진으로 보면 깨끗한 복장과 구두를 신은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
니다, 제네바협정을 준수하여 포로들은 국군이나 일반인들보다 품격있는 대접을 받은것으로 알려져 있습
니다. 허기지고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자 차라리 포로가 되어 밥이나 배불리 먹어보고 싶다 고 말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진3] 78수용소 게이트 및 위병소. 1951년 9월 17일 인근의 포로수용소인 76,77수용소와 함께 대
대적인 반동 숙청을 실시한 9,17 폭동을 주도한 수용소입니다. 이 폭동으로 무려 400명의 반공청년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했던 곳입니다.
[사진4] 미 제64야전병원의 옛모습 <옮긴 사진>
포로들의 건강 관리를 위하여 수월과 해명 마을 사이 주작골 입구에 미 제64야전병원이 있었습니다. 이곳
에는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2개의 별관이 있었는데 한곳에 2,500개의 침대가 있었습니다.
별관 부속병원은 요양소이며, 64야전병원의 대부분은 미군 군의관들이었으며 한국군 군의관과 간호원들도
있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포로 가운데 의사 출신과 간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아 채
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곳은 엉뚱하게도 포로들의 접속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아프다
는 핑계를 대고 입원하여 정보를 교환하고 또 막사와 막사간의 연락과 지시를 병원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이런 사항을 미군들이나 한국군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진5] px및 무도장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이 곳은 포로송환을 끝낸 후 포로수용소의 기능이 끝나자 소개민이 되
어 떠나갔던 주민들이 돌아와서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를 무너뜨리고 논밭으로 되돌리는 고된 작업을 해야만
했던 소개민들의 아픔과 땀과 눈물이 맺힌 곳이기도 합니다.
2 (아래는 아고라에 소개되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출처는 <민중의소리> 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를 원자탄 세균 무기 및 각종 의학실험 대상으로 하여 인질로서 새 전쟁확대를 위
한 정치적 모략화를 하고 상품으로서 리승만, 장개석 도당에게 팔아먹어 재무장화 영원한 노예로 침략
전쟁의 **로서 투입할 가공할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쑤들은 심지어 수백명의 포로들을 한 줄에
세워놓고 증기와 경기의 관통능력을 실험하였으며...
(중략)...적지 않은 포로들이 의학실험에 걸려청춘을 빼앗겼으며 또 그보다 더 끔직한 사실은 수천 수백명의 우리 전우들이 비밀세균 실험실에서
세균탄 실험대상으로 적십자의 그늘 밑에서 이러한 죄악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1992년 12월 14일 경남 거제군 신현릅 고현리 용신마을 제 6포로수용소 화장실 자리에서 간이 경지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 기사
김동윤(당시 26세)씨가 병에 들어 있던, 포로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던 편지와 포로들의 내부관리 서류 50여점을 발견했다. 광목천으로 가로 80cm, 세로 1백20cm크기의 속
옷을 찢어 만든 이 편지는 '불란서 파리 세계평화옹호대회 귀중' 이라고 적혔으며 "미군이 북한포로
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으며 편지 끝 부분에는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 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
라고 쓰여 있었다. 이와 함께 발견된 엽서만한 크기의 종이에는 깨알같은 글씨로 수용소 내 도주우려
자, 변절자등을 파악한 보고서, 포로들의 전투훈련 종합통계, 적 무기 통계양식, 각 호실 지형서, 사상
무장 지침, 투쟁 격려문등 활동계획을 적은 기밀문서 30점도 발견됐다.
땅속에 묻혀 있던 현대사의 진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를 처음 필사했던 당시 거제 신문사의 서용
찬씨는 "약간의 과장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편지를 만든 천이며 내용들을 볼때 당시 포로들이 직접 쓴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한국전쟁이 남겨준 많은 상처 중에 특히 '이데올로기 전쟁터'로 불
리웠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미군 만행은 여전이 피해자의 증언만 있을 뿐이다.
"원쑤들은 심지어 수백명의 포로들을 한 줄에 세워놓고 증기와 경기의 관통능력을 실험하였으며.... 원
자탄, 세균무기 및 각종 의학실험 대상으로 하여...전시핵과 실험용으로 팔과 다리를 짤리었으며......
비밀세균 실험실에서 세균탄 실험대상으로..."
포로수용소내에서 발견된 편지에는 수용소 안에서 생체실험과 세균무기실험이 행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52년 3월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의 보고서는 미군에 의해 세균전이 진행되었음을 확
인했다. 협회의 조사단은 북한 곳곳에서 페스트, 콜레라, 티프스, 출혈열, 일본 뇌염등의 균을 가진 특별
한 벼룩과 파리, 썩은 생선, 거미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할 곳에 집단으로 뭉쳐
있었다. 이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미군 비행기가 아주 낮게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곤 했던 것이 확인
됐다.
이러한 내용은 52년 6-8월 사이 작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의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세균전 사실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무기제조 지
도자 이시이 시로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을 나타냈다.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은 일본인과 나찌 세균전문
가를 고용하였고, 제네바 협정으로 사용금지된 신경가스 사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이
를 부인하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고 적고 있다. 이시이 시로는 마루타, 즉 인간생체실험을 주도한 장
본인이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황인종 놈들"
전쟁에 있어 포로수용소라는 것은 전쟁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매개기도 하거니와 감춘다고 감추어질
일도 아니요,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일도 아니다. 지난 52년 8월 영연방군 부대의 지휘관이었
던 도니 밴크로프트 소령(왕립슈롭셔경보병부대)에 의하면 미군들은 거제수용소의 포로들을 보통 "눈꼬
리가 치켜 올라간 황인종 놈들(yellow bastards)"이라고 호칭했다고 밝혔다. 당시 북한군 3천200명이
수용돼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미군으로부터 인계받기 위해 파견된 그가 작성한 문서에는 보초를 서던
미군 병사들이 졸거나 근무지를 이탈해 현지 창녀촌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고 지적했으며 포로들
의 막사를 좀처럼 검사하지 않았고 우편물도 불규칙하게 전달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 소령은 부임초기 병원 호송 임무를 맡은 미군에게 학대받은 포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
이 개입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이는 내가 목격한 미군들의 많은 제네바협약 위반사례중 하나"라고 말했
다. 1993년 8월 '월간 길'지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영국의 특파원 레지날드 톰슨은 "미군 헌병들은 적들
을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취급한다"고 적어 미군이 한국민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짐작케
했다. 또한 50년 런던의 '픽쳐 포스트'의 제임스 카메론은 "이곳은 벨젠 수용소보다 더 참혹하다.... 나는
분개하여 UN위원단에 항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 최악의 혼란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는 매우
다른 행동기준을 갖는...모든 것이 매우 다른 아시아인임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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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로수용소 테마파크에 ‘전쟁문학관’ 세우자 | |||||||||||||||
- 소설가 손영목·시인 김수영 작품 등 기반 충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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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현중학교 부지 위에 추진되고 있는 포로수용소유적공원 테마파크 조성사업에 ‘한국전쟁문학관’ 건립도 포함해야 된다는 지적이 높다.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다수인데다 포로생활 을 체험했던 김수영 시인(1921~1968)의 포로체험 산문집이 최근 발견되는 등 그 토대는 충분한 까닭에서다. 전쟁문학관 설치 여부에 대해 “검토해 볼 순 있으나 현재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은 소설가 손영목의 ‘풍화’와 ‘거제도’, 장용학 작가의 소설 ‘요한시집’, 강용준 작가의 소설 ‘철조망’을 포함해 최인훈 작가의 장편 ‘광장’ 등 다수다.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일화와 25개월 후 석방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최근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이처럼 전쟁문학관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은 충분하다는 게 거제 문인들의 지적이다. 온 거제문인협회 관계자는 “한국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의 면면도 문학사적으로 충분히 평가되고 있 다”며 전쟁문학관 건립 당위성을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거제시에 전쟁문학관 건립을 건의했으 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토로했다.
4 출처.천주교 인권위원회 앞 뒤 글이 있는 모양인데 못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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