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베로의 파리 그림

2013. 1. 20. 06:18미술/서양화

 

 

Jean George Beraud 

장 베로(Jean George Beraud, 1849~1935)

 

 

 

장 베로가 남긴 500여 점의 작품 중에는 유독 파리의 대로변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파리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베로의 그림 속 거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카페의 빨간 차양과 상점의 하얀 차양, 볼록한 지붕을 한 광고탑, 고풍스러운 검정색 난간에 걸어 놓은 금색의 상점 간판,

거리의 의자, 가로등의 모양까지도 지금과 똑같다.

모퉁이만 돌면, 19세기의 파리가 눈 앞에 펼쳐질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파리가 오래된 도시라지만 장 베로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의문에 사로잡힌다.

대체 파리는 언제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일까?

 

 

생전의 장 베로(Jean George Beraud)는 화가들 사이에서 인정받기보다 사교계의 총애를 받던 화가였다.

당장 눈 앞에 펼쳐질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흡인력과 후세인들이 벨 에포크, 즉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1880년대부터 1914년 사이 상류층의 삶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바로 그 인기의 비결이었다.

 

 

이는 그의 특이한 작업 스타일 때문이었는데,

그는 당시의 삶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거리 모퉁이에 마차를 세워 놓고 하루 종일 작업을 하곤 했다.

마차 안에 앉아 스케치를 해 밑그림을 완성했고,

자기가 본 그대로의 배경을 묘사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뒤 그것을 따라 그리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인기 덕분이었는지 장 베로는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대표적 문인인 프루스트를 비롯해 몽테스키우 백작 등

당시의 쟁쟁한 사교계 인사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유난히 예쁜 색채와 로맨틱한 묘사, 그리고 사교계에서의 인기 때문인지

후에 그의 작품에는 ‘여성 취향’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이로 인해 그는 한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였음에도 제대로 된 전시회나 연구서조차 드문 화가로 남게 되었다.

 

 

장 베로가 관찰한 대로 그린 그 시절의 파리와 그 시대의 삶이 과연 그렇게도 화려했을까?

언뜻 보면 그냥 예쁘기만 한 그의 그림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까?

 

 

19세기 중엽까지도 파리는 중세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였다.

출구와 입구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미로처럼 얽혀 있는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진흙탕이나 다름없었고,

좁은 길 옆으로는 5층이 넘는 중세식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어 대낮에도 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악취가 나는 어두컴컴한 길에는, 낮이고 밤이고 물 장사와 똥 푸는 사람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다녔다.

상하수도 시설이 전혀 없는 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파리 사람들은 일명 ‘푸세식 화장실’에 오물을 모았다가 사람을 불러 치우거나 직접 강에 가져다 버린 뒤

물 장사에게 물을 사서 물탱크를 채워야 했다.

파리의 불결함은 파리로 여행 온 유럽인들, 특히 수세식 변기와 상하수도 시설을 갖춘 집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영국인들을 경악시켰다.

 

 

1852년부터 1870년까지 시행된 오스만의 도시 정비 계획이 착착 실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런던의 수세식 변기를 보고 놀란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만의 도시 계획은 그야말로 파리를 일신시켰다.

개선문에 올라가 파리를 내려다보는 관광객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시원하게 쭉 뻗은 12개의 대로는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오스만은 통행의 중심이 되는 곳에 광장을 만들고, 광장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큰 대로를 뚫었다.

대로의 끝 지점과 시작 지점에는 기차역을 두었고, 군데 군데 시민 공원을 만들었으며, 파리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정비했다.

또한 지하에는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상하수도관을 만들었는데, 이 공사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당시, 파리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이 그 면모를 변화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파리의 모습이 처음 태어난 때는 바로 그 19세기 후반이다.

그러니 장 베로의 그림 속에서 묘사된 파리의 대로는,

그 시절의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현대적인 도시에 대한 찬사인 것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건물이 줄을 이은 대로의 끝에는 ‘도시 정비 계획’이라는 이름 하에 파리 외곽으로 밀려난 노동자,

빈민층의 가난한 동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오스만 식 건물은 사는 층에 따라 거주자의 경제적 수준을 알 수 있도록 지어졌는데,

로열층인 2층에는 넓은 베란다와 화려한 조각상이,

그보다 싼 3층과 4층에는 간소한 조각상과 작은 베란다가,

5층에는 차양이, 제일 싼 꼭대기층은 아주 작은 창문이 붙어 있는 식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 공사가 불러 들인 지방의 농민과 일용직 노동자들은 제일 싼 꼭대기층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들은 우리가 보통 ‘하꼬방’이라 부르는 그 시대의 판자촌에 방을 얻거나 노숙을 해야 했다.

상하수도 시설은 아예 없고 30세대가 공용으로 쓰는 화장실이 보통이었던 시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그들이 매우 열악한 삶을 살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세기는 정치적으로는 왕정에서 벗어난 시대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아직 왕정과 다를 바 없는 시대였다.

우리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카퓌신 대로’를 그린 장 베로의 그림 속에는

새롭게 태어난 파리를 영위하는 사람들, 그러나 아직도 신분과 계층이 명확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토목 공사와 주식, 부동산 투자로 인한 경기 활성화의 이익을 가장 풍족하게 누린 것은

은행이나 공장, 부동산을 가지고 있던 대자본가들이었다.

대자본가들의 일부는 지방의 영지와 부동산 등을 재빨리 산업화 현장에 투자하거나 제정시대 고위 관리직을 차지한 귀족들이었는데,

이 때문에 프루스트의 책에는 백작이니 공작이니 하는 귀족의 이름을 단 대부호들이 대거 등장한다.

 

 

대부호들 아래로는 그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전문직 종사자들이 있었다.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을 가진 이들 중에는 대부호들과의 혈연관계, 친목 등을 이용해

고위 관리로 출세하거나 기술 덕에 유명인이 된 이들이 많았는데,

외과 의사였던 프루스트의 아버지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그리고 그 전문직 종사자들 아래에는 자기 이름의 작은 사업체, 가게를 운영하거나 관청, 신문사 등에서 월급을 받고 일했던

시민 부르주아지들이 있었다.

 

 

이 시대는 어느 계급으로 태어나느냐가 개인의 평생을 결정지었다.

균등한 교육의 기회란 찾아볼 수 없었고, 계층 간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빈부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했다.

계급과 빈부의 격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시대였기 때문에

 19세기의 그림에서도 옷차림만으로 어렵지 않게 계층을 구분해 낼 수 있다.

대부호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검고 긴 실크 모자에 꼬리가 긴 양복을 입었고,

시민 부르주아지들은 둥근 모양의 모자나 보다 짧은 실크 모자에 간편한 양복을 입었다.

 

 

이들에게 19세기 후반은 그야말로 영광과 발전의 시대였다.

기차를 타고 바캉스를 떠났고, 막 보급되기 시작한 자동차로 주말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오페라와 발레, 무도회를 비롯한 온갖 사교 행사는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는데,

이는 인맥과 학연, 혈연이 있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전·후반에 걸쳐 이런 부르주아지들은 프랑스 전 인구의 5퍼센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 베로의 그림 속에는 분명히 벨 에포크를 살아가고 있던 또 다른 계층들이 등장한다.

그림 속의 마차몰이꾼이나 짐을 나르는 하인, 카페 종업원, 거지들이 바로 그들이다.

벨 에포크의 그늘에는 자영농이나 공장 등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

시골에서 먹을 것이 없어 도시로 온 빈민과 하인, 창부, 일용직 종사자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The Church of Saint Philippe du Roule

 

 

 

 

The Boulevards, Evening in Front of the Cafe Napolitain

  

 

 

Boulevard des Capucines

 

 

 

La Modiste sur les Champs Elysées

 

 

 

Boulevard Poissonniere in the Rain (1885)

 

 

 

At the Telegraph

 

 

 

 

Avenue Parisienne

 

 

 

 

Bal à la Présidence (1877-1879)

 

 

 

An Argument in the Corridors of the Opera (1889)

 

 

 

 

The Boulevard at Night, in front of the Theatre des Varietes (1883)


 

 


Cafe de Paris (1900)

 

 


 

Carriages on The Champs-Élysées

 


 

 

The Casino at Monte Carlo
(also known as Rien ne va plus!) (1890)

 

 

 


 

Elegant Soiree

 

 


Entrance to the Exposition Universelle (1889)

 

 


Envol d'un Biplan

 

 


Femme en Priere (1877)

 

 


First Communion

 

 


The Funeral of Victor Hugo (1885)

 

 


The Gardens of Paris
(also known as The Beauties of the Night) (1905)

 

 


Hailing a Cab outside the Cafe Americain (1890)

 

 


In Café-Chantant 'Les Ambassadeurs' (1882)

 

 


In the Wings at the Opera House (1889)

 

 


L'accident, Port Saint-Denis (1899)


 

 

 

La Boule de Verre (1875)

 


 

 

La brasserie (1883)

 

 


La Colonne Morris

 

 


La Danse Publique

 

 


 

Le boulevard des Capucines devant le Théâtre du Vaudeville


Le Boulevard Saint Denis, Paris

 

 


Le Concert Privé (1911)

 

 


L'Elevation

 

 


Le Pont Neuf

 

 

 

 

 

Saint Preux, Aria de Syrna
 
 
 
 
 
 
 
장 베로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이다. 그는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성당의 내부 조각을 의뢰받아 온 가족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잠시 이주한 몇 년을 제외하고는 파리에서 줄곧 살아온 파리 토박이로서 명문 고교인 리세 콩도르세를 졸업한 후에 파리 법대로 진학하였으나,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이라는 난세를 겪고난 후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변호사라는 인텔리로 살기보다는 화가로서 살기로 결심한다. 파리 토박이인 그는 주로 근대적 외향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파리의 풍경이나 풍속들 또는 도시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파리장이나 파리지엔의 모습들을 주로 화폭에 담았는데, 그가 그린 '라 뻬 거리' 라는 그림 속에는 플라뇌르(소요자)로서 멋지게 차려입은 댄디들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담겨져 있다. 댄디즘이란 댄디(dandy:멋쟁이)에서 나온 말로, 세련된 복장과 몸가짐으로 일반사람에 대한 정신적 우월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19세기 초 영국에 나타난 G.브러멀(1778∼1840)이 댄디즘의 시조(始祖)라고 하며, 당시 영국 사교계의 청년들 사이에 널리 유행되었다. 시인 G.바이런도 그 영향을 받아 《돈 후안:Don Juan》을 썼다. 후에 댄디즘은 프랑스로 건너가 뮈세, T.고티에와 같은 작가들에게서 이 취미를 엿볼 수 있었으나, 프랑스에 있어서의 댄디즘은 당시 세간에 풍미하고 있던 부르주아적 취미와는 달리 예술가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정신적 귀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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