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에

2013. 1. 15. 16:02미술/서양화

 

 

 

                                                  「가르강튀아」 

 

  

프랑스 혁명의 중심세력인 소위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산업 자본가들은 7월혁명으로 인해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입헌군주제 형태였지만 재산을 기준으로 한 의회 선거권은 국민의 1%도 안되는 한 줌의 부자들만 가질 수 있었다.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왕이 된 루이 필립은 왕위에 오르자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극소수를 위한 정책을 고수한다.

왕실과 귀족의 자리를 산업 자본가가 차지했을 뿐 그 구조는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부루주아 군주'라는 루이 필립은 맨손으로 성공한 '프티부루주아'로서 그동안 당한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치부에만 열을 올렸다.

국민의 불만에 대해서는 "당신도 부자 되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풍자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로 칭송받는 도미에(1808~1879)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부루주아 정부의 부패와 사리사욕, 그에 봉사하는 사법부의 위선과 허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다.

스물셋 되던 1831년 도미에는 루이 필립을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탐욕스런 '가르강튀아'로 묘사해 화제가 되었다.

서양 배 모양의 살집 좋은 얼굴은 이내 왕의 상징이 되었고, 그는 이 그림으로 인해 6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 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펌1)

 

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1863-65 캔바스에 유채. 사이즈:65.4 x 90.2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삼등열차>의 볕도 잘 들지 않고 환기도 잘 안되는 비루한 공간에  궁핍해 보이는 사람들이 지루함과 불편함을

인내하고 있다.   우선 시선을 잡는 것은 어디로 향하는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앞쪽의 인물들이다.     광주리를

무릎에 올린 노파의 행색 위에서 초조함과 피로함이 경쟁한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 그를 만났던 세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감당하기 힘든 삶의 행렬에서 허검지겁 피난 나온 듯한 사람들은 주위를 살필 기력조차

없어 보인다.

 

  

 

오노레 도미에 <일등열차>1864년경 수채. 사이즈: 20.5 x 30 cm  볼티모어, 월트스 아트 갤러리 소장

 

  

<일등열차>의 승객들은 사생활을 고려한 듯  공간이 나뉜 열차 안의 사람들은 행색부터 다르다. 혹여 있을지 모를

서로에 대한 접촉을 염두에 둔 사람들은 전부 장갑을 끼고 있다. 쾌적한 일등열차이지만 막연히 느껴지는 결핍감은

지울 수 없다.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유대감도 인간적인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창가의 승객과 읽을거리에 몰두한 여성 그리고 할 일 없이 앉아있는 노신사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모두 고독한

개인이다.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시선의 각도를..... 

 

 - 공주형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

 

 

 

 

 

 

펌 2)

 

 

 

만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질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면서 고뇌에 허덕이는 인간의 압박된 정신에, 별안간 나타난 통풍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오노레 도미에 - 

 

 

 

 

<가르강튀아> 

 

 

 

 

   <입법부의 배> 

 

 

 

 

<공화국> 

 

 

 

 

<진실한 사람들> 

 

 

 

 

<세탁부> 1860 . 유화. 49×32.5cm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뉴욕 주 버펄로

 

 

 

 

<돈키호테> 

 

 

 

 

<대화하는 법조인들>

 

 

 

 

 

 

 

 

 

 

 

 

 

 

 

 

 

 

 

 

 

 

 

펌3)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1808~1879)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어려서 유리 직공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1829년 무렵 석판화 기술을 익혔다. 1830년부터 잡지에 정치 만화를 발표하여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이후 40여 년 간에 걸쳐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독재, 파리 코뮌의 한복판에서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을 잃고 고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대표작으로 석판화 <로베르 마케르> 유채화 <3등 열차> 등이 있다.

 

 

소요 (l'emeute) 1848년작

 

2월 혁명의 잔혹하고 광기어린 현장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면서 이후에 벌어질 참혹한 결과를 음울한 전조와 함께 예견하고 있는 것 같다.작가는 이 살인적인 광경에 세피아빛을 입혀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빛바랜 역사, 시간에 산화된 역사, 현실과는 다른 모노톤의 세상을 상상했을 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풍차를 향해 돌격한 사나이. 공상적이고 가치없는 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 작가는 이 상징적인 인물을 프랑스 혁명과 비슷하게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혁명을 이끈 지도자는 지상보다 더 어두운 이상을 바라보고 있고 그를 따르는 민중(산초)은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루이 왕의 옥좌

 

프랑스 혁명당시 파리의 거리 부랑아들이 방치된 궁전 주위를 즐겁게 들쑤시고 다니다가 잠시 루이 왕의 옥좌를 점령했던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재구성했다. 이 옥좌는 그 뒤에 바스티유로 옮겨져 소각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혼한지 6개월, 공감은 영혼의 결합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쟁자의 작품을 검토하는 예술가들

 

 

 

법정의 한 모퉁이 (1864년)

 

이 그림은 성공한 변호사와 실패한 변호사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는 뒤로 젖힌 얼굴과 거만한 표정, 당당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있다. 반면, 그 옆을 지나친 인기없는 변호사는 흘낏 뒤를 돌아보면서 그런 그를 부럽게 쳐다보고 있다. 성공한 인생과 실패한 인생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법조계 사람들 (1834년) 석판화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풍자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보인다. 실제 법조인들의 인물들을 함께 그린 그림으로 상반신의 군상(群像)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 줄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거만하게 뒤로 젖힌 얼굴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고 또 어떤 인물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풍기기도 한다. 각 인물들의 사회적 위치와 성격들이 어두운 색조로 잘 묘사된 작품이다.

 

 

 

 

7월의 영웅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해 왕족 루이 필립이 시민왕, 평등왕을 사칭하며 국왕이 되었지만, 그 혁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노동자와 민중들은 철저히 배신을 당했다. 멀리 삼색기가 펄럭이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이나 혁명은 실패였다. 작가는 전당포 선전지로 만든 옷을 입은 외다리 영웅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쓰여진 돌에 몸을 매달고 세느강 다리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장면을 통해, 당시 민중의 절망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차에서, 유쾌한 옆 승객 (1862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즐거운 여행을 안전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

 

당시의 치안상황을 비꼬는 그림인 것 같다. 나 아니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현실. 유일한 해결책은 무장!

 

 

 

펌4)

 

도미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주제로 이렇게 3958점의 석판화를 남겼습니다. 도미에의 석판화를 보면 루이 필리프~나폴레옹 3세까지의 프랑스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거죠.  

그의 스튜디오는 파리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들라크루아와 시인 보들레르(포우 작품을 번역했죵! 이사람 덕에 포우가 유명해짐) 와 함께 센강을 거닐며 산책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민들의 모습을 관찰했고 그만의 시각으로 페인팅을 제작했습니다. 루부르 박물관에도 자주 가서 화풍도 연구하구요. 그러고보니.. 도미에는 풍경화나 정물화는 없네요. 그의 주제는 언제나 '사람' 이었습니다.

 

 

 

 

 

 

 

 

 

 

 

 

 

 

캐리커처의 바탕이 된 정치 권력자들의 소조 / 1832~33

 

 

 

 

  

Ratapoil c. 1850 Beonze, height 38 cm Musée du Louvre, Paris

 

  

 

 

 

쟈크 르페브르 동상 청동 1830 ~ 32년경

 

 

 

 

 

 

 

The Emigrants c. 1850 Plaster Musée du Louvre, Paris

 

 

 

 

[앙드레 마리 장 자크 뒤팽] 1832년경
테라코타, 9.2×15.2×15.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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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 프랑수아 빅토르 가브리엘 프뤼넬] 1832년경
테라코타, 15.9×15.2×13.4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작품 보러가기


도미에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캐리커처 조각을 시도한 작가 중 하나이다. 그는 친구였던 조각가 프레오(Préault)의 거칠고 즉흥적인 느낌이 나는 조각을 좋아했는데, 프레오의 권유로 1830년부터 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1832년에는 국회의원들의 흉상을 연작으로 만들어 출판업자 오베르(Aubert)의 판화 가게에서 전시했다. 보통 높이가 20cm 안 넘는 이 조각 작품 각각에는 인물의 외형적 특징과 성격뿐 아니라, 이들이 대변하는 가치에 대한 풍자적인 힘이 담겨 있다.

 

 

 

오노레 도미에 - 파리의 풍자꾼

 

오노레 도미에가 태어난 1808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하는 1879년 사이 프랑스는 크고 작은 시민항쟁들이 끊이지 않는 정치적 질풍노도의 시대를 경험했다.

이러한 시민항쟁들은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계층이 세속제의 보수왕권의 종말을 요구함과 동시에 스스로만을 살찌우기 바쁜 귀족층의 횡포에 대항하여, 노동을 할 권리와 그 대가로 빵을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을 주장한 것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상과 구속, 감금이라는 희생을 치르며 진행되었다.

1830년 7월 혁명, 1832년 파리폭동, 1848년 2월 혁명, 6월 혁명 등은 봉건군주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하려는 시민의, 나아가서는 시대의 움직임으로 기억된다. 이 격동의 중심지 파리에서 도미에는 타락한 정치가들을 풍자화로 날카롭게 비판하는가 하면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애정 어린 따스한 시선으로 기록하였다.

마르세이유의 액자 집 아들로 태어난 도미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던 유화작업을 대신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1829년부터 일간지에 정치풍자화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국왕의 살찐 얼굴을 서양배에 비교하여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도미에의 캐리커쳐는 서민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보수파 정부에게 정치범으로 몰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후로 도미에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내용으로 주제를 바꿔가며, 파리시민들의 일상과 여가생활, 사랑과 자녀교육 등을 유머 가득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는 석판공방에서 견습생활을 하던 21살 때부터 시력저하와 곧 이은 시력상실로 더 이상 작품 제작이 불가능해진 65살까지, 많게는 일년에 약 125점(3일에 한 작품 꼴)을 제작, 일생 동안 총 약 4천여 점의 석판화를 남겼다.

도미에에게 있어 이 작품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기록이자 소시민에게 주어진 발언의 장이었으며 당대를 살아가는 한 파리지안으로서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오노레 도미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이타미시립미술관과의 교류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서는 1830년 7월 혁명 직전에 제작된 작품번호 1번에서부터 1868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암시하는 말년의 작품까지 총 146점의 석판화를 [모던 파리], [부부와 가족], [여행과 여가], [정치풍자]의 네 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의 정치가들의 얼굴을 희화화해서 재현한 풍자조각, 도미에의 초기 유화양식을 엿보게 해주는 회화작품을 포함한 총159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모던 파리

 

●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좁은 돌담골목에 오수가 흐르던 중세의 도시에서 개선문이 들어서고 방사선의 대로 불르바드가 뻗어나며 실크해트와 거대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중산계층이 도시를 활보하는 모던한 도시로 거듭난다.

도미에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와 미술전람회인 살롱, 식물원을 찾은 관광객을 비롯하여 새로이 등장한 세력인 여성운동가들의 활약상까지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살롱의 관중」은『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지에 1852년 4월부터 5월까지 연재된 11점의 프린트 연작이다.

파리에서 매해 열리는 미술 전람회인 살롱은 약 백만 여명의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미술 축제로, 수백 명의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를 들어, 1834년의 살롱에는 첫날에만 3만 여명의 방문객이 모였다. 두 달이라는 전체 기간 동안 총 백만 여명의 관중이 전시를 보러 왔다.

어떤 날에는 티켓 가격이 20수(약 만원)로 내리거나 무료인 경우도 있어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살롱은 새롭고 현대적이며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화가들에게도 절호의 시장이었다.

사설화랑과의 연결이 쉽지 않은 진보적 화풍의 작가들에게는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심사위원은 작가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보수적인 심사위원에 의해 살롱에서 한 번 거절당한 작가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종종 살롱에서 거절당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가 열리기도 했는데, 1855년에도 쿠르베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기에 너무 혁명적이라 여겨져 거절당하자, 살롱 밖에서 자신만의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보들레르는 살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시대 파리에서 들라크루아에 비할 수 있는 작가는 두 명뿐이다. 캐리커쳐 작가인 도미에와 앵그르다.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와 가족

 

● 도미에가 그리는 부부와 가족상에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모습이 묻어난다. 19세기파리에서도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기쁨은 두 배로, 때로는 미움도 두 배로 증폭되어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나 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둘을 잇는 것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자식들이다. 「

결혼생활」은 60점의 연작으로 1839년 5월 19일부터 1842년 10월 12일 사이에『르 샤리바리』지에 게재되었다. 이 연작이 발표되었을 때, 도미에는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린 다시Alexandrine Dassy와 아직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연작에 상냥한 아내로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파리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남성이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때에 여성 해방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므로 이 연작에 도미에가 묘사한 사소한 말다툼이나 분쟁들은 당시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특히 이웃의 결혼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도미에의 판화를 정리한 로이스 델테이유 Loys Delteil는『르 샤리바리』지의 1월 판에서 이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파리의 가족들은 도미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비판정신을 본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불행과 재난들을 진솔하게, 그러나 희극적으로 그려낸다. 이 예술가를 뛰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무자비한 솔직함이다. 독신으로서의 삶을 끝내려고 고심하는 자들에게 이 연작은 위로가 될 것이며, 모든사람들에게, 기혼자들에게도 또한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 직후에「여성사회주의자」와「청탑파 ??派」가 등장하여 남성 우월주의를 끝내고, 남녀 평등을 주장했다.

 

여행과 여가

 

● 19세기 파리의 휴일을 담은 모습에서는 더 이상 농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중산노동자층들의 야외 나들이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파리외곽의 호수나 전원지대를 하루에 왕복 할 수 있게 해준 철도열차의 대중화는 도미에 이후의 인상파화가들에게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철도열차 안에서」는 시사일간지 『르 샤리바리』지에1864년 8월과 9월사이 게재되었던 6점의 판화 연작이다. 고속으로 파리와 파리 근교를 잇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함에 따라 여유 있는 파리인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교외로 나가 주말을 즐기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새로운 기차 여행은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승객들은 자주 강도를 당했고, 때문에 이 새로운 교통수단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단둘이 일등칸에 탄 승객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앉아있고 각자의 손에는 권총까지 쥐어져 있다.

당시의 열차는 차량 간에 통할 통로가 없고 밖에서 열쇠를 거는 형태였으므로 일단 출발하면 다음 정차역까지 완전한 밀실상태였다. 따라서 실제로 밀실상태의 일등칸 속에서 폭행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며 유럽의 추리소설들은 이런 사건들을 주제로 쓰기도 했다. (이타미시립미술관 '도미에' 도록 77번 참조.)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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