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2012. 11. 23. 08:40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셋

 

 

오늘은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디?

지루할팅께 음악부터 틀고설라무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넓은 벌 동쪽 끝이라 ~~~..

 

옥천 가봤시유?

정지용 시인이 살았다던 집 가봤시유?

(원래는 그 위쪽에 있는 교동 저수지 밑에 살았답디다.)

거기 벌판이라고 할만한 게 있습디까?

하긴 왜정때야 옥천읍내 통털어 집이 몇 채나 있었겠슈.

애들 눈에는 벌판으로 보이기도 했겠지.

 

내가 선 위치에서 벌판을 바라볼 때 동쪽 끝이라 했으니

구획과 방향을 정확히 표현한 거지.

근데 내가 어제「정동진」갔었자니여.

거기가 왜 정동(正東)이여?

내가 여기서 보기엔 대각선으로 북동(北東)인디?

정동이라 한 놈이 누구여? 건방지게시리.

서울 사는 놈만 사람이고 눈깔인가?

 

나 이래봬도 ‘땅끝’이니 ‘정중앙’이니 하는 데를 먼 데까지 몇 곳 가봤구먼..^^*

지난번에 유라시아 대륙 끝이라는 ‘로까곶’도 가봤고,

스페인 정중앙이라는 마드리드 뭔 광장에도 서봤고,

아프리카 서쪽 끝 카사블랑카. ㅋㅎ

캐나다 빅토리아섬 ‘마일 제로’ 표석 앞에서 사진도 찍었고,

일본 홋가이도 최북단 근처까지도 가봤었고.

흠. 그 사진들 다시 한번 볼쳐?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州  빅토리아섬

 

포르투갈「까보 다 롯까」 (5£짜리 인증서)

 

스페인 정중앙

 

 

 

그런데 ‘땅끝’이라는 게 말이여, 진짜 ‘땅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겨?

기준점이 있으니깐 끝이 있는 건데,

아 물론, 여기가 캐나다 땅의 시작이라는 거, 여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끝이라는 거, 말 뜻은 알지.

그치만 우리, 그냥 일반론으로 말해보자구.

바다 밑바닥은 땅 아닌가?

그리고 바다 건너가면 또 땅 나오고, 땅을 가다보면 江도 나오고 바다가 또 나오고,

둥그런 공 모양인데 끝이 어딨디야?

뱅글뱅글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데, 어디가 시작이고 끝이냐구?

뱅기 타고 가도 되고, 배 타고 가도 되고. 왜 끝이여?

모든 걸 내 중심으로 제한해 놓고 보니까 시작점이 있고 끝점이 있는 거여.

동서남북도 마찬가지지 뭐.

 

서양애덜이 우리나라를 극동(極東)이란다매? 

중동(中東). 근동(近東).,, 어디서 근동이고 먼동이란 얘기여?

우리 애들 세계사 책에도 그렇게 썼다니께?. ㅠㅠ.

미국이나 캐나다서 보면 서쪽인디? 태국사람 눈에도 우리가 극동이리야?

영국이나 스페인은 극서(極西)여 뭐여?

허면 우주에서의 극동은 어디리야? 중심은 어데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존재철학)이 맘에 들었던 묑이여.

실존철학이 히틀러 파시즘의 이론적 토대였응께

김춘수도 박정희 전두환의 꼬붕 노릇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제.

어쨌든 하이데거의 말도 일리는 있어.

내가 얼마 전에 불교와 장자의 존재론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고 썼었자니여.

나야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아마 그것도 비슷할 겨.

 

가만 생각하다보면 결국엔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도달하더라구.

웬만한 사람이면 이 말의 깊은 뜻을 알게야.

그런데 딱 거기까지더라고.

말 뜻을 이해하는 걸로 끝이야. 거기서 넘어서질 못해.

깨닫는다는, 벼랑에서 손을 탁 놔버리는,

몸을 던져버리는 소위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를 못한다 이 말이여. 

그 대목까지 철학적 논리를 대단한 양 전개를 하거나 아니면 허탈감에 빠지거나.

 

원효랑 의상이랑 해골물 먹은 얘기 잘 알잖여.

둘이서 친군데 왜 말을 안 나눴겠어? 의상도 원효가 하는 말 뜻을 알아챘겠지.

그런데 원효만 돌아온 거야. 의상은 공부 존나게 더하고 돌아왔지.

자, 이것이 뭐여? 

의상이 몰라서 못 깨닫는 게 아니란 말여. 같이 다 알아.

그럼 이게 뭐시냐. 당시의 의상에겐 원효만큼의 진정성이나 처절함이나 용기가 부족했던 거야.

그러니까 의상은 지름길을 못찾고 빙 돌아온 셈이지.

틀림없이 의상이 원효보다 잔머리가 잘 돌아갔을 사람일 겨.

원래 재주가 많은 놈은 제 신세를 볶는 겨.

 

그런 의미에서 용기를 북돋게 목탁 한번 칩시다. ^^*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蜜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縟多羅三邈三菩提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모두가 비었음을 비추어보고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의지 계속되는 생각 최후의 인식도 그러하느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공함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의지와 계속되는 생각 최후의 인식도 없고
눈귀코혀몸 의지도 없으며 빛과 모양 소리
향기 맛 닿은 법도 없고
눈의 객관과 내지 인식의 객관까지 없으며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 없어서
괴로움 번뇌 열반 수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나니
얻을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마음의 걸림이 없게 되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게 되어
뒤바뀐 망상을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삼세에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기 때문에 위 없이 높고 깊고
바른 깨달음 이룩하였느니라
사리자여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문이고 위 없이 드높은 주문이며
등등함이 없는 주문이니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며 허망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를 설하리라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열반 언덕 어서 가자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열반 언덕 어서 가자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열반 언덕 어서 가자                                                          

 

 

 

가만 보면 생각을 생각하고, 아는 걸 알려고 하는 것 같더라구.

이중으로 겉돌고 있는 거야.

불경이나 역대 조사들의 행적 같은 거 잘 외고 쫘르르 꿰면 뭘 햐?

지식과, 앎과, 내가, 삶이 따로 놀고 있는데.....    

요지는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깊게 깊게 체득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그래서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자는 거지.

절대로 아는 게 부족해서 수련을 하고 해탈을 못하는 게 아니라구.

 

이건 내 생각인데,

유식스럽게 문자 쓰고 어쩌고 할 것도 없어.

‘내가 지구상의 극히 하찮고 미미한 존재’ 라는 것만 자각하면 다 끝나는 거야.

그러면 불교에서 노상 읊어대는 생노병사니 뭐니 기타 등등이 다 풀리는 겨.

문제는, 말로만, 생각으로만 그런단 거야. 실천적으로 그러지를 않는다는 것이지.

언행일치가 안돼. 말하자면 모순이고 위선이고, 갇혀 있는 것인데,

아니, 경지가 열리지를 않는다는 표현이 맞겠군.

있음과 없음. 있음 속의 없음. 없음 속의 있음.....

감은 잡히는데 나 역시 절실하게 삶속에 실행으로 옮기지를 못해.

신념이래야 해. - 내 생각에 대한 믿음과 실천으로 혼연일체가 되는.

신념이 그냥 생기나. 큰 용기가 있어야지.

난 그래서 ‘깨달음은 용기’ 라고 말하고 싶더라구.

 

그런데 여기서 깨달음이니 해탈이니를 고귀한 신분이 되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더라?

겉모습은 똑같은 거여. 신분이고 뭐고 달라질 이유가 있나.

한 달 벌이가 100만원 되는 사람이 해탈한다고 해서 200만원이 벌이가 되는 게 아녀.

손오공 맹키로 구름 타고 댕기는 것도 아녀.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겨.

죽어서 금칠해보고 싶어서 참선하냐? 십자가 둘러메고 싶어서 신학대 가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접받자고 그짓 했던거겠어?

그리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중되고 목사되면 누가 먹여살린디야?

걍 사는 대로 사는 겨.

그냥 다른 동물들처럼 사는 건데, 머릿속이나 맑게 하고 살자 그 말이여.

머릿속이 맑으면 일머리도 잘 알팅께 잘 살 거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