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5. 08:29ㆍ詩.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어둠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차차 촉심이 서고 불이 제자리를 정하게 되면, 불빛은 방 안에 그득히 원을 그리며 윤곽을 선명히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윤곽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있다. 들여다보면 한바다의 수심과 같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할 따름이다.
시 해설 : 강신주
이 시인의 애칭만큼 <꽃>이란 작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 전체는 아닐지라도 다음의 일부분을 자신도 모르게 읊조리곤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이란 시에 충분히 빠져들어 보려면 '이름', '하나의 몸짓', 그리고 '꽃'의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이름'이 의미 부여를 나타낸다면, '몸짓'은 의미를 부여받기 전의 타자의 모습을,
'꽃'은 의미가 부여된 타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곳에서 '이름'이란 나와 타자를 이어주는 오작교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죠.
이름을 통해서 나는 타자에게로, 타자는 나에게로 건너올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시인의 탁월함은 하나의 몸짓으로 무의미하게 던저져 있던 타자를 새롭게 발견했다는데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좀 무서운 일이 아닌가요?
이름이 불리기 전 어던 타자에겐 나 역시 그런 무의미한 몸짓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서로 이름이 호명되어 친숙한 사이로 등장하기 전 우리는 대부분 무의미 속에서 외로워했을 겁니다.
<꽃>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이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라고 강변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꽃>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열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입니다.
하지만 고독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하나의 꽃이 되자마자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슬픔이 우리를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꽃이었던 연인들도 언제든지 이별을 통보하고 다시 고독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두운 무의미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춘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어두웠던 과거의 형상을 가슴 한켠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럴 때에만 지금의 밝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김춘수의 대부분의 시들에 어둠과 밝음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어둠과 밝음의 변증법! 사실 이 때문에 <꽃>이란 시를 또 다른 작품인 <어둠>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1959년 출간된 《꽃의 소묘》를 보면 <꽃>이라는 시 외에도 <꽃1> <꽃2>라는 시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꽃1>과 <꽃2>는 서로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두 작품 사이에 <어둠>이란 시가 끼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느낌이 오나요? 그만큼 <어둠>이란 시는 꽃에 관한 연작시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입니다.
<어둠>이란 시를 잠시 살펴볼까요.
성냥불이 그어지면서 초에 불이 붙으면 시인의 표현처럼 방안에 있던 작은 것들은 “하나씩 살아나게” 되지요.
이곳에선 촛불이 서로 구별된 세계, 즉 의미로 충만한 세계를 만들어 놓은 셈이지요.
물론 촛불이 닿지 않는 곳은 “한바다의 수심 같이” “고요하기만”한 무의미로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촛불이 켜진 환한 방에서 우리는 “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촛불이 켜져 의미의 세계가 열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시인은 이것이 안타까웠나 봅니다.
이 때문에 촛불이 아직 밝히지 않은 어두운 곳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준 것입니다.
▒
어둠이란 김춘수의 짧은 시는 우리를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에게로 이끌어줍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존재 망각'을 안타깝게 경고했던 인물이지요.
(……) 하이데거가 김춘수의 <어둠>이란 시를 읽었더라면 무릎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어둠을 통해서 시인은 촛불이 열어 놓은 밝음, 즉 '밝히면서 건너오는 존재'를 잘 부각시켜 주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차이, 혹은 황동규와 김춘수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하이데거와 김춘수가 망각을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니체와 황동규는 오히려 망각을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망각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불가피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와 김춘수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변혁하기보다 관조하는데 그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들의 작품에는 마치 삶의 열정과 온기가 사라진 조각상과도 같은 이미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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