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4. 17:05ㆍ詩.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현대시 2003,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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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있으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인간의 에로티즘은 단순한
동물의 성행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꾸로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어떤 것으로서, 참을 수 없는, 덧없는, 그리고 의미가 없는 충동, 자유로운 성
행위로서의 동물적 충동과는 대립된, 새로운 이미를 부여하는 경계이다. - 바타이유,《 에로티즘의 역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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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타이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전개됩니다.
경제사정으로 인해 내가 지금 구매할 수 없는 핸드백에서 느꼈던 감정과도 유사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은 인간에게 강렬한 열망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가지는 열망이 바로 에로티즘입니다.
따라서 에로티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때문에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이 동물들의 성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늪>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조관우라는 가수를 알고 있지요?
이 노래만큼 바타이유가 이야기한 에로티즘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경우가 별로 없을 겁니다.
늪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도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었지
하지만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법이니까
난 멈출수가 없었어
이미 내 영혼은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가려진 커텐 틈 사이로
처음 그댈 보았지
순간 모든것이 멈춘듯 했고
가슴엔 사랑이..
꿈이라도 좋겠어
느낄수만 있다면
우연처럼 그댈 마주치는 순간이
내겐 전부였지만
멈출수가 없었어 그땐
돌아서야 하는것도 알아
기다림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 뒤엔
언제나 눈물이....
까맣게 타버린 가슴엔
꽃은 피지 않겠지
굳게 닫혀버린 내 가슴속엔
차가운 바람이.. 우우~~
꿈이라도 좋겠어
그댈 느낄수만 있다면
우연처럼 그댈 마주치는 순간이
내겐 전부였지만
멈출수가 없었어 그땐
돌아서야 하는것도 알아
기다림에 익숙해진 내 모습뒤엔
언제나 눈물이
흐르고 있어
우~우~아아~~
일부일처제가 강요하는 성적 금기 때문에 남의 아내가 된 여인은 더 강렬하게 에로틱한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지금 같은 결혼제도가 애초부터 없었다면, 그래서 남의 아내와도 자연스럽게 만나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면,
<늪>에 등장한 주인공 남자의 열망도 그처럼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녀에게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남자 주인공에게는 불행이기보다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본문 출처. 강신주,《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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