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아 (3) '대성당'

2012. 6. 5. 20:45발칸반도/스페인 · 모로코

 

 

 

 

 

우리가 서둘러서 문 열자마자 1등으로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나중에 늦게 입장하려면 북새통 이루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관광객이 많은 명소는 차라리 오후 늦게 가는 것이 한적하겠더군요.

 

 

 

 

 

 

 

규모가 엄청납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열십자 형태인데 긴 축이 130미터인가 됩니다.

이설도 있겠지만 로마 바티칸성당, 영국 폴성당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랍니다.

 

 

 

 

 

 

 

 

 

 

파이프오르간

 

 

 

 

 

 

 

 

콜룸부스 관을 네 명의 고대왕국(레온, 카스티야, 나라바, 아라곤) 왕들이 떠메고 가는 형상입니다.

실제로 저 밑 석관에 콜룸부스가 묻혀 있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콜룸부스에게 스페인 입국 금지령을 내리자,

이에 콜룸부스가 "그럼 나도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고 유언을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의 중남미 파나마인가 쿠바 땅 쯤에 묻혔었는데,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해지자

혹시 다른 나라에서 콜룸브스 유골을 가져가서 권리 주장을 할까봐 서둘러 스페인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사실 콜룸부스는 이태리 사람이잖습니까.

그러나 포투갈이나 영국이 콜름부스 시신을 수습해 가서 억지 권리 주장을 하면 일이 복잡해지거든요.

지금 관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공중에 떠메고 가는 형상으로 만든 것은 그런 연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콜룸부스 유골인지야 모르죠. 아무 뼉다귀 줘온들 누가 압니까?)

세비아 대성당에는 중세의 왕들의 무덤도 많고, 콜룸부스 아들도 묻혀있습니다.

콜룸부스 아들도 애비 행적을 정리하면서 공적을 세웠답니다.

유럽의 성당은 거의 모두가 왕들의 무덤으로 쓰였다고 보면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동상입니다. 물론 근래에 만들었습니다.

그 많은 교황 중에서 왜 요한 바오로 2세겠습니까?  폴란드 사람인데도요.

 

 

 

 

 

 

 

 

 

 

위엣 사진과 아랫 사진을 비교해서 보세요. 이슬람 사원을 개조한 것이 확연이 표시가 나지요?

엄숙 · 경건한 분위기가 호화찬란 · 요사스럽게 바뀌었네요.

 

 

 

 

 

 

 

이 사진은 정식으로 미사를 보는 것은 아니고요, 성지순례 온 관광객들입니다.

교회는 어디고 전부 금으로 떡칠해놨던데 신대륙에서 약탈해온 것이랍니다.

 

 

 

 

 

 

 

 

 

 

 

 

우리는 아랍과 이슬람교에 대해서 끈질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한 손에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불관용성에 대한 선입견이다.

그러나 이 불관용성과 호전성은 적어도 에스파냐에 들어온 이슬람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에스파냐의 이슬람 왕조에는 무력을 앞세운 강압적인 전제정치의 관례가 없었다.

그들은 로마의 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듯이 기독교의 교회도 공격하지 않았고,

서고트족처럼 약탈과 방화와 파괴를 일삼지도 않았다.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칼리프 왕국은 처음에는 성 비센테 교회와 평화적인 교섭을 통해 

교회 건물의 절반을 사들여 거기서 40년 동안이나 이슬람 예배를 보았다.

메카를 바라다보는 수평적 신앙과 하늘을 우러러 보는 수직적 신앙이 여기서만은 공존하고 있었다.

많은 에스파냐인 카톨릭교도들이 카톨릭 신앙을 가진 채로 다양한 관직도 등용되었고,

심지어 5천명에 이르는 궁정수비대의 사령관도 카톨릭교도였다.

 

이슬람 왕조는 유대교도도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시대의 에스파냐에서는 자발적으로 카톨릭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도 있었고

두 종교 사이에 혼인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자 이슬람교도도 카톨릭교도도 차츰 에스파냐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고,

언어도 뒤섞이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는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외부의 적'이 아니었다.

 

- 홋타 요시에 『고야 1』-

 

 

 

 

 

 

 

 

 

 

 

 

아름다운 천정을 자세히 보라고 반사경을 만들어놨더군요.

아주 돋보기로 보듯이 잘 보입니다.

 

 

 

 

 

 

 

 

 

 

 

"또 금칠할려고 저러네벼!"

 

 

 

 

 

 

 

 

  

 

 

 

 

 

 

 

 

 

 

 

 

 

히랄다 탑

 

 

 

 

세비아 대성당 종탑「히랄다탑」입니다.

' 세비아의 상징이 된 히랄다탑은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족이 만들었다. 지진으로 윗부분이 헐리자 16세기에 기독교인들이 플라테스코 양식의 종루를 설치했다. 28개의 종과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하였다. (히랄다=풍향계) '

 

높이가 90미터인데, 종탑 아래까지(70미터)는 나선형 골목길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10분이면 올라갑니다만 엄청 가파르죠.

장애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거길 휠체어를 밀고 올라가는 부모가 있더군요.

올라가면 세비아 시내 전경이 다 내려다 보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 집단군이「알카자르」궁전입니다.

'알카자르'는 '요새'라는 일반명사일 겁니다.

페르난도 3세가 무어인에게서 빼앗아서 수리해서 살았다니까 왕궁이 된 거지요.

 

 

 

 

 

 

 

이슬람교는 정원 복판에 손 씻는 우물을 꼭 만들지요.

나무마다에 작은 수로처럼 물길을 만들어 놔서 물을 주더군요.

이슬람 사람들의 머리가 참 탁월합니다.

 

 

 

 

 

 

 

무데하르 Mudéjar (아랍어로 '거주하게 된 자'라는 뜻의 mudajjan에서 유래)

그리스도교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재탈환한 후 스페인에 남았던 이슬람교도(11~15세기).

 

보호받는 소수민족이었던 이들은 인두세(人頭稅)를 납부하는 대가로 고유의 종교·언어·관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큰 도시에는 그 지방 그리스도교 군주에 의해 임명된 지도자가 다스리는 무데하르 공동체와 구역이 있었고, 이들은 이슬람 법에 따라 지배를 받았다. 아랍의 침략 이후 대부분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무데하르들은 (☜ 원래는 무종교거나 기독교인이라는 뜻) 13세기에 들어와 다시 아랍어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도가 사용하던 스페인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표기는 항상 아랍 문자로 했기 때문에 독특한 '알자미아도' 문헌이 생겨났다. 고도의 세련된 솜씨를 가진 무데하르는 아랍과 스페인의 예술적 요소를 잘 결합시켰다. 말굽 모양의 아치와 둥근 천장이 특징인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코르도바·세비야·발렌시아 등지의 교회와 궁전 건축물에서 볼 수 있다. 무데하르의 솜씨는 나무·상아·금속세공품·도자기류와 직물의 장식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윤나는 도자기는 중국제에 버금간다. 그러나 스페인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란다가 함락되자 무데하르의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들은 모리스코(Moriscos:스페인어로 '작은 무어인'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그 나라를 떠나거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1614년까지 어림잡아 300만 명에 이르는 이슬람교도가 모두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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