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5. 20:43ㆍ발칸반도/스페인 · 모로코
세비아 (Sevilla)
과달키비르강 어귀에서 87km 상류 연안에 있다. 로마시대에는 지방 중심지로 번창하고 서고트(5~8C) · 무어(8~13C)의지배를 받았고, 12C에는 이슬람문화의 정수를 모은 알카사르 궁전, 히랄다 탑 등이 건조되었다. 1248년 페르난도 3세에 의해 다시 에스파냐에 속했고 15C 말에는 신대륙 무역의 기지로서 전성기를 맞아 에스파냐 최대의 성당과 대학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7C에는 대형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카디스에 밀려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거점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코르도바 · 세비아 · 톨레도는 르네상스 시대 초기에 유럽의 학문 중심지였다. 유럽 각국의 학자들은 우선 여기서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같은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아랍어 문헌들을 라틴어로 다시 번역하는 데 힘썼다. 코르도바 · 세비아 · 톨레도는 유럽의 관문으로서, 르네상스는 아랍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황금의 탑
1220년 이슬람교도가 과달키비르강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웠다. 강 건너편에 "은의 탑"이 있어서 두 탑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통제하였으나, "은의 탑"은 지진으로 일부 파손된 것을 그대로 방치해버려 지금은 없어졌다. "황금의 탑"이라는 이름은 처음 지을 당시에 금 타일로 덮었기 때문인 듯하다.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배가 정박해 있는 이곳이 콜룸부스와 마젤란이 출항하던 지점이다.
(화물을 싣던 '산 거시기'항구는 따로 있었고.)
건너편 전망대 같은 곳이 "은의 탑"이 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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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무릴요 공원이다.
무릴요는 대상을 이상화하고 때로는 정확하게 묘사하는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요후원자들 중에는 종교 교단, 특히 프란체스코 교단과 세비야 및 안달루시아의 봉사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리요의 가장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인 〈성 안토니우스의 환상 1656, 세비야 대성당 소장)은 베네치아 회화에서 유래한 이른바 '공상적인' 표현 양식의 초기 작품이다. 1660년에 무리요는 세비야 미술 아카데미를 창설하고 초대 원장이 되었다. 그후 20년 동안 그는 여러 개의 중요한 주문을 받았으며, 대개 웅장한 규모로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다. 1678년부터 무리요는 세비야에 있는 고위 성직자 숙소에 또다른 연작을 그렸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술트 무원죄잉태〉(1678,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주제는 흔히 신비한 내용을 갖고 있는데, 자연스러운 몸짓과 부드럽고 경건한 표정을 가진 친숙하고 전형적인 인간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사실성이 이같은 신비주의적 의미와 대립해 고양된 종교적 감정보다는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무리요는 많은 제자와 추종자를 갖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스페인과 그 제국 전역에서 복제되고 모방되었다. 그는 유럽에까지 널리 명성을 얻은 최초의 스페인 화가였고, 19세기까지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진 유일한 스페인의 예술가였다.
노란색 건물은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 '롯시니'가 머물던 집이다.
'워싱턴 어빙'이 살던 집이다. 미국 대사로 왔다가 눌러앉아서 <알함브라 이야기>를 써서
대외적으로 스페인을 널리 알렸다 하여.... 스페인 관광의 일등 공신이라는......
일본인 관광객이다.
이제 외모만으로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의 구별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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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사르 성채(나중엔 왕궁)이라고 하는데 못 들어가봤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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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아 대성당 입구에 왔다. 관광객이 엄청 많다.
스페인 여행 중에 관람하면서 이어폰을 낀 경우가 세 번 있었는데,
프라도미술관, 알함브라궁전, 그리고 이곳 세비아 대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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